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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중신웅응조신(中臣熊凝朝臣; 나카토미노쿠마코리노아오미)

중신웅응조신(中臣熊凝朝臣; 나카토미노쿠마코리노아오미)
 위와 같다.
 
【주석】
1. 중신웅응조신(中臣熊凝朝臣)
앞의 중신습의조신과 마찬가지로, 중신(中臣)은 신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 신하를, 웅응(熊凝)은 지명을 가리킨다. 웅응이라는 지명이 처음 보이는 것은 천평 19년(747)2월 11일에 감록(勘錄)한 「대안사가람연기병유기자재장(大安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으로, 여기에 웅응촌(熊凝村)과 웅응사(熊凝寺)가 보인다. 웅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일본삼대실록』 원경(元慶) 4년(880) 10월 20일 경자조에 보이는데, 옛날에 성덕태자가 평군군(平群郡)에 웅응도량(熊凝道場)을 창건하였다는 대안사(大安寺) 삼강(三綱)의 말을 적고 있다. 훈해(訓海, 1386~1457)가 저술한 성덕태자 전기 『태자전옥림초(太子傳玉林抄)』 에서도 웅응사가 대화국 평군군 액전향(額田鄕)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 생구시(生駒市) 액전정(額田町)이다. 그러나 대학료의 학생이던 대강친통(大江親通, ?~1151)의 『칠대사순례사기(七大寺巡禮私記)』 대안사(大安寺)조에서는 상궁태자(上宮太子, 聖德太子)의 웅응사가 섭진주(攝津州, 섭진국) 웅응촌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중신웅응조신씨가 처음 보이는 것은 『속일본기』 양로 3년(719) 5월 계묘조로, 여기에서 종6위상 중신웅응련고마려(中臣熊凝連古麻呂) 등 7명이 조신 성을 사성받았다. 중신웅응조신씨의 옛 씨성이 중신웅응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중신웅응련씨는 고마려 이외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중신웅응조신씨로 육국사에 등장하는 사람은 고마려 이외에 『속일본기』 에 보이는 중신웅응조신오백도(中臣熊凝朝臣五百島)가 있을 뿐이다. 고마려는 737년 9월에 정6위하에서 외종5위하로 승서되고, 그해 12월에 황후궁직의 원외량(員外亮)으로 임명되었으며, 738년 윤7월에는 섭진국의 량이 되었고, 그해 8월에는 황후궁직의 량이 되었다. 742년 4월에는 종5위하로 승서되었고, 745년 8월에는 중신웅응조신에서 중신을 제하고 웅응조신을 사성받았다. 이후 웅응조신오백도는 천평승보 3년(767) 8월 2일부 「근강국갑가군장부향간전야지매매권(近江國甲可郡藏部鄕墾田野地賣買券)」(『대일본고문서』 3-514)에 보인다.
2. 동상(同上)
『신찬성씨록』 완본에서는 ‘신요속일명손미경저전명지후야(神饒速日命孫味瓊杵田命之後也)’라고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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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신웅응조신(中臣熊凝朝臣; 나카토미노쿠마코리노아오미)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