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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통치이념 수용과 전개

4. 유교적 통치이념 수용과 전개

삼국에서 일찍부터 한자를 바탕으로 한학이 발달하였고, 이를 기초로 유교의 정치이념을 수용하였다. 4세기 무렵에 고구려의 국상(國相)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재난이 거듭되어 백성들이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삼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수양(修養)하며 반성할 때라고 충고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근신하지 않고 폭정을 계속 행하자, 결국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은 것은 인(仁)한 것이 아니며, 신하가 간하지 않는 것은 충(忠)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봉상왕을 살해하고 서천왕의 아들 을불(乙弗 : 미천왕)을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자연현상과 정치를 긴밀하게 대응시켜 설명한 유교의 학설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르면,주 124
각주 124)
맹자의 왕도사상과 상서(祥瑞)·재이(災異)로 표현되는 자연현상을 연결시켜 천인감응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한대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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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현상은 군주의 실정(失政)에서 비롯되는데, 항
나아가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고, 지방에는 경당(.堂)을 두어서 평민 자제들이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였다. 고구려에서 유학의 교육과 보급에 노력한 결과 고구려인이 『사기』 등의 역사서와 유교경전, 『옥편』 등의 사전, 『문선』과 같은 문학 서적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백제는 일찍이 한학에 밝은 5경박사가 존재하였고, 6세기 중엽에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시경』과 『예기』에 밝은 사람을 구하는 등 유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신라의 진흥왕순수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 『서경』과 『논어』를 인용한 구절이 나온다. 특히 마운령비에서 진흥왕이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며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스스로 몸을 닦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안민(安民)의 조건이 국왕의 ‘수기(修己)’임을 강조하며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밖에 원광법사는 세속오계에서 충과 효를 강조하였고, 임신서기석에는 두 청년이 유교경전과 도덕을 공부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겠다고 맹세한 내용이 보여서 진흥왕대 이후에 유학이 널리 보급되는 추세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유학의 교육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은 중고기 말부터였다. 640년(선덕여왕 2) 5월에 왕이 귀족의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는 당에 가서 국학을 참관하고, 그의 아들 문왕(文王)에게 당에 숙위하며 거기에서 수학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651년(진덕여왕 5)에 국학 설립을 준비하는 관리를 두었고, 673년(문무왕 13) 무렵에 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설인선(薛因宣)을 국학박사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682년(신문왕 2)에 유학을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박사와 조교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을 현령과 소수와 같은 지방관으로 채용한다는 규정도 정비하였다. 국학교육과 관리 등용을 연계시킨 것에서 통일신라에서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음을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원성왕은 국학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독서삼품과를 두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국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학문 능력을 평가해 그 성적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고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였다. 비록 진골귀족들이 천거제를 더 선호하면서 독서삼품과를 통한 관리의 등용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독서삼품과의 설치는 유학을 널리 보급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유학의 보급과 더불어 덕치(德治)를 행하면 나라가 안정된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다. 신문왕은 687년에 이르러 여러 가지 괴변이 나타나자, 대신을 종묘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그 제문에서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주 125
각주 125)
夏四月 遣大臣於祖廟. 致祭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之靈. -- 比者 道喪君臨 義乖天鑒 怪成星象 火宿沉輝 戰戰慄慄 若墜淵谷. 謹遣使某官某 奉陳不腆之物 以虔如在之靈(『三國史記』 新羅本紀第8 神文王 7년 여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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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이 여러 가지 괴변이 발생하자, 그것을 천견(天譴)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통일 직후인 신문왕대에 유교적 천인감응설에 입각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려준다. 통일기에 유교적 천인감응설을 강조한 전통은 선덕왕(宣德王)의 유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달에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과인은 본래 재주와 덕이 없어 왕위에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함을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농사가 잘 되지 않고 백성들의 살림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나의 덕이 백성들의 소망에 맞지 아니하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9 선덕왕 6년 봄 정월).
 
선덕왕은 자신의 덕이 부족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살림이 곤궁해졌다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민심과 천심에 부합하는 정치를 펼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선덕왕은 제왕(帝王)이 덕치(德治)를 하지 않으면 민심(民心), 천심(天心)이 배반하여 국가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인지하였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헌강왕대에는 왕이 덕치로서 백성들을 다스린 결과,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다고 전한다.주 126
각주 126)
九月九日 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헌강왕 6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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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앞의 사례와 달리 제왕이 덕치를 행하여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국가체제가 안정되었음을 전해준다.
통일신라에서 국왕이 덕치를 행하면 백성들이 편안해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바로 경덕왕의 요청으로 충담사(忠談師)가 지은 안민가(安民歌)이다. 여기서 충담사는 임금은 부(父)로, 관료는 모(母)로, 백성들은 자(子)로 설정하고, 그들 각자가 처한 본분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관료는 관료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행동하면, 나라가 태평해진다고 주장하였다.주 127
각주 127)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나오는 안민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관료)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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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가는 비록 승려가 지은 것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유교적인 충효이념 및 본분에 따른 사회분업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안민과 태평을 희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충담사는 경덕왕에게 군주와 관료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대우하여 덕(德)으로 다스린다면, 백성들이 편안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도 자연히 태평해질 것이라고 충고하였던 것이다.

  • 각주 124)
    맹자의 왕도사상과 상서(祥瑞)·재이(災異)로 표현되는 자연현상을 연결시켜 천인감응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한대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였다. 바로가기
  • 각주 125)
    夏四月 遣大臣於祖廟. 致祭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之靈. -- 比者 道喪君臨 義乖天鑒 怪成星象 火宿沉輝 戰戰慄慄 若墜淵谷. 謹遣使某官某 奉陳不腆之物 以虔如在之靈(『三國史記』 新羅本紀第8 神文王 7년 여름 4월). 바로가기
  • 각주 126)
    九月九日 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헌강왕 6년 9월 9일). 바로가기
  • 각주 127)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나오는 안민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관료)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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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통치이념 수용과 전개 자료번호 : edeah.d_0002_003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