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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백작 각하

Милостивый Государь Граф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베베르
  • 수신자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카프니스트
  • 발송일
    1895년 10월 20일(1895년 10월 20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6,лл.121-133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
  • 세부분류
    정치세력/왕실관계/외국인
  • 주제어
    을미사변, 세레딘 사바틴
  • 색인어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카프니시트, 세레딘 사바틴, 조선, 서울, 제물포, 시모노세키 해협, 일본, 지부, 르 장드르, 조선, 일본, 러시아, 요동반도, 여순 항, 베베르, 그레이트하우스, 다이, 닌스테드, 이학균, 유길준, 김가진, 김가구, 박영효, 김옥균, 손탁, 즈푸
  • 형태사항
    26  , 필사본  , 러시아어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주 001
번역주 001)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카프니스트(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Капнист).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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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각하
 
즈푸주 002
번역주 002)
芝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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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 러시아제국 부영사관
1895년 10월 20일
№202.
매우 흥미롭다.주 003
번역주 003)
황제가 친필로 작성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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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19일 석판 인쇄됨.
 
카프니스트 백작 각하에게
 
제물포를 출항한 포함 ‘코레예츠(Кореец)’ 호가 10월 11일 지부에 입항했습니다. 러시아 신민이며, 항해학교 학생 출신인 세레딘 사바틴주 004
번역주 004)
러시아의 건축 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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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사람은 조선에서 12년을 거주했으며, 최근에는 조선 정부에서 국왕의 호신요원으로서 근무했으나, 그 직책 상 오히려 궁궐 경비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는 금년 9월 26일(10월 8일) 서울에서 일본인들과 조선 군사들에 의하여 발생한 살육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입니다.
세레딘 사바틴 씨가 위 사건의 전말에 관하여 현재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문서로써 제출한 바가 없다고 밝힌 것을 고려하여, 저는 위에서 언급된 서울에서의 사건을 묘사해 볼 것을 그에게 제안했습니다.
세레딘 사바틴 씨가 본인에게 제출한 서울 궁궐에서 9월 26일(10월 8일)에 발생한 궁정혁명을 묘사한 내용을 복사본으로 여기 각하께 제출하면서 반드시 말씀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즉 저는 여기에 묘사된 유혈 사태를 목격한 세레딘 사바틴 씨와 대화를 가졌으며,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는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이 얘기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세레딘 사바틴 씨가 이 사건의 지도자 중에서 일부 일본인과 조선인의 성명은 물론, 심지어 조선의 왕후에게 닥쳐오고 있었던 운명을 더욱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을 묘사한 세레딘 사바틴 씨는 궁궐 습격을 주도한 일본인의 이름을 정말 모르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약 자신이 그 일본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해도,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언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처신에 대한 이유로서 든 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세레딘 사바틴 씨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조선으로 되돌아 가, 그곳에서 자신에게 적당한 업무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는 그곳 현지에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 활동가들이 자신을 상대로 무장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는 지적이고 호의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옹색한 형편에 처해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
10월 18/30일 세레딘 사바틴 씨는 우리나라 공사의 초청을 받아 북경으로 출발했습니다.
저의 깊은 존경과 진정한 충성심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충복 (판독불능)
 
‘일본당’의 (일본인에 의해 훈련 받은) 조선 군사들의 조선 왕궁 점령, 일본인들의 조선 궁녀 살해와 왕후 시해, 조선의 새로운 ‘친일’ 당파의 승리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친일’ 당파에 의해 실질적인 포로(또는 체포)가 된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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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 8일 아침 서울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을 완전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제가 직접 목격하고 증인이 된 사건을 우선적으로 묘사할 것이며, 그 다음에 설명의 형태로써 앞의 사건을 전반적으로 기술하고, 올해 10월 8일에 발생한 비극적 사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확신되는 일부 유럽 대표들(외교관들)의 활동을 서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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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에 조선 국왕은 실질적으로 일본인들의 포로 또는 적어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상태이셨습니다. 국왕께서는 일부 유럽 대표(러시아와 미국)의 조언 및 전혀 선경지명도 없고 편협하기까지 한, 그 당시 자신의 고문이었던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주 005
번역주 005)
조선의 내부협판, 고종의 법률고문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Clarence Ridgley. 1846-1899, 具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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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충고에 따라 몇 명의 유럽인들(다이주 006
번역주 006)
다이(Dye, William. M. 茶伊).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조선의 군사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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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닌스테드주 007
번역주 007)
닌스테드(Neinstead, F. H. 仁施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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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그리고 저 세레딘 사바틴)을 궁궐로 초빙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객관적 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궁궐에서 어떻게 명령을 내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다이장군, 닌스테드 대령 그리고 저)의 의무는 순서에 따라 매 6일 중에서 4일 동안 (실제로는 야간에) 궁궐 내에 체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궁궐에는 항상 두 명의 유럽인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10월 7일에서 8일로 넘어가는 날 밤에 궁궐 안에는 다이 장군 그리고 제가 근무 중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이 밤이 지났습니다. 새벽 4시에 조선인 부령인 이학균주 008
번역주 008)
이학균(李學均). 본문에서는 ‘이가균(И-га-кюн)으로 되어 있다. 영어의 ’H' 발음이 러시아어에서는 ‘Г’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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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다이 장군의 전문 수석 통역관입니다)이 저와 다이 장군이 취침 중이던 건물로 뛰어왔습니다. 그는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일본 병사와 (일본인에 의해 훈련을 받은) 조선인 병사들이 궁궐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저와 다이 장군은 그 즉시 침상에서 일어나 초병 막사(평면도의 5번 건물)로 향했습니다. 이 막사에는 궁정 장교단이 반드시 위치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초병 막사에는 최소한 6-7명의 장교와 2명의 부령이 필히 자리해 있어야만 했으나, 우리가 초병 막사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약 4시 30분 무렵 다이 장군은 성문을 한 바퀴 돌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했습니다. 다이 장군은 이학균 부령에게 (통역관의 자격으로)함께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이 장군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조선인들 중에는 다이 장군을 수행하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비록 다이 장군이 요청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제가 그를 수행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판단했습니다. 북동문주 009
번역주 009)
춘생문(春生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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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가가면서 우리는 (폭이 약 3인치 정도 되는) 문틈을 통해서 일본군 병사들의 독일식 군모에 둘러져 있는 노란색 리본과 함께 번쩍거리는 총검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을 향해 다가서자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져 성벽을 따라 정렬했습니다. 우리가 근사치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 병사의 수는 40-50명에 달했습니다. 이후 우리들은 북동문(평면도에서는 북동문/2)으로 다가갔습니다. 그곳에는 (조선인들의 말에 따르면) 약 200-300명의 조선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조선 병사도 목격할 수가 없었으며, 단지 웅성거리는 소리만을 들었을 따름인데, 외견상 무엇인가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는 군중 같았습니다. 북동문을 향해 우리가 다가서자 조선인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달라며, 커다란 목소리로 몇 차례에 걸쳐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침 5시에 궁궐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동문/2의 뒤쪽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풍부한 표현력으로 노래를 부르듯) 연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연설이 매끄럽게 흐르는 것을 볼 때, 사전에 준비되었으며 마치 책을 읽는 듯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조선인 군중들의 함성과 포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포위 중이던 이들은 (서쪽으로부터) 성벽을 넘어와 궁궐수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말할 것도 없이 궁궐수비대는 소총을 버려두거나 혹은 미리 [자신의 소총에서] 탄환을 제거한 뒤, 자신의 초소를 이탈하여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주 010
번역주 010)
점은 본문에 따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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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내에는 총 1,500명의 병사들과 40명의 장교들이 있었습니다. (4시 30분부터) 5시 무렵 궁궐에 남아 있던 병력은 250-300명의 병사와 장교 8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제복 상의를 벗어버리고 소총과 탄환을 내던지고 도주했습니다. 5시 10분 또는 5시 15분에 공격 중이던 조선인들이 (북쪽의 작은 문을 통해서) 궁궐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남아 있던 궁궐수비대원들(약 300명)과 장교들(8명)은 북쪽의 작은 문에서 국왕의 처소가 있는 곳(평면도의 1번을 보시오)으로 이어지는 거리 위에 집결했습니다. 궁궐수비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거리의 왼쪽 측면을 점령했습니다. 공격 중인 병사들은 북쪽 작은 문의 갈라진 틈을 통해서 계속해서 총격을 가했습니다(문틈의 수는 5-6개, 너비는 1에서 2인치). 궁궐로 밀고 들어온 조선의 신식 군대는 궁궐수비대원들을 향해 세 차례에 걸쳐 일제사격(매회 당 30-40발)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공격자 측은 많은 사람들(즉 궁궐수비대원들)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바, 그 이유는 매우 높은 각도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이 장군과 함께 사선(射線) 내에서 성벽을 따라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 모두 작은 쪽문 안에서, 저는 오른편 쪽문 안에 그리고 다이 장군은 왼편의 쪽문 안에 서 있었던 덕분에 담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평면도를 보면, а가 저고, в가 다이 장군입니다). 우리는 총격을 가하는 병사들로부터 약 80보(또는 80야드)가 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가 받은 인상에 따라 판단해보면, 사람의 머리보다 20-30피트 이상 더 높은 곳에서 탄도가 형성된 것 같았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일제사격으로) 단 한 명의 궁궐수비대원만이 제 눈앞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을 따름입니다. 첫 번째 일제사격 당시 전체 궁궐수비대원들은 단 한발도 응사하지 않았으며, 소총을 내버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군복의 상의를 벗어던지면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의 탄환은 물론, 소총에서 탄환을 제거한 뒤 소총마저 버렸습니다(즉 사격을 가해서 탄환을 없앤 것이 아니라, 소총의 약실에서 탄환을 꺼내서 제거했습니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두 개의 다른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이 있는 쪽으로 몰려가 거리로부터 우리들(유럽인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을 향해 왼쪽으로 향했으며, 다이 장군은 그들에 의해 떠밀리듯 딸려갔습니다. 그곳으로는 공격하는 병사들이 향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약 300명(군인, 궁궐에서 근무하며 ‘red coats’라고 불리는 다양한 하인들과 기타)으로 이루어진 다른 무리에 (약 60-70보 가량) 밀려서 왕후와 조선의 궁녀들이 거처하고 있는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고 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휩쓸린 채, 왕후의 거처가 있는 뜰(평면도의 С를 보시오) 안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개의 작은 쪽문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일본인 병사 5명과 일본인 장교 1명을 목격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그곳에는 신식 조선 군대 소속의 1개 소대와 일본식 키리몬(桐紋)과 유럽식 복장을 한 일본인이 20-25명가량 있었습니다. 일본의 초병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으며, 일본인 장교 또한 그와 동일하게 서 있었습니다. 신식 조선 군대 소속의 1개 소대 역시 소총을 다리에 붙인 상태에서 왕후의 처소가 있는 건물의 맞은편에서 약간 기울어진 형태로 정렬해 있었습니다. 조선군 소대가 있는 근처에 풍채가 매우 훌륭하고 품위 있는 복장(유럽식 복장)을 갖춘 일본인이 서 있었습니다. 이 일본인은 오른 손에 단검(유럽식 단검이며, 칼날의 길이는 8-10인치 정도)을 빼어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다른 일본인들을 지휘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들 일본인들은 고함치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채를 휘어잡고 조선 여자들을 질질 끌어내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습니다(높이는 약 6피트 정도). 제가 왕후의 궁궐에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왕후의 처소 한 곳에서 창문을 통해 궁궐 마당으로 10-12명의 여인들을 내던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들 중 단 한명도 신음소리를 내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에 더하여 모든 여인들은 머리채를 잡고 끌어낼 때도 그리고 창밖으로 던져져 떨어질 때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에도 저는 옷 위에서도, 조선 여인들의 몸에서도 그리고 광포하게 날뛰는 일본인들의 일본도에서도 피를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여기에 반드시 덧붙여 말씀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20명 또는 25명 정도의 일본인들 중에서 칼을 빼든 사람은 4-5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일본인들은 칼을 차고 있었지만 (그 중 일부는 양쪽에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칼을 모두 칼집에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왕후 처소의 뜰에서 목격한 모든 조선 여성들이 전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부언해야 할 것은 제가 그들 모두 살해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조선 여성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그녀들이 지니고 있는 실로 고귀한 수준의 용기에 따른 것으로써 설명될 수 있음을 제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가 왕후의 처소가 있는 궁궐로 들어갔을 때, 제가 있던 곳으로부터 겨우 5-6보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 여성 두 명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 나왔는데, 저는 지금도 그녀들의 얼굴을 매우 명확하게 목격했으며, 당시 그녀들이 살아 있었음에 그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외견상 상처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로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저는 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그 두 명의 조선 여인들은 입술을 깨물어 물 듯 다문 상태에서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 다닐 때도 그리고 툇마루에서 마당으로 던져질 때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에 더하여 위에서 언급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여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명확하게 목격한 것은 그녀들 중의 한 명은 매우 뒤로 넘어진 상태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자신의 두 눈으로 멀어지는 일본인들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여인의 얼굴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무감각하다는, 진정한 냉담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왕후의 처소가 있는 궁궐에 있던 조선 여인들의 얼굴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제가 그녀들로부터 20-25보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인 병사들과 장교를 목격한 후, 저는 일본군 장교의 보호를 받던가 아니면 여하한 경우에도 일본 육군 장교의 책임에 제 운명을 맡기는 것이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결심했습니다. 이에 저는 일본군 장교에게 다가가 처음에는 영어로 말을 건넸으나, 이후 그가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는 일본어로 (저는 일본어 몇 마디를 구사할 줄 압니다)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는 제가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들은 그 순간, 제가 본 바로는 자신은 전혀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척 하며 저를 피했습니다. 이에 저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저를 외면했으며, 저를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일본군 장교나 일본군 병사들 모두가 저를 상황, 즉 일본인 살인자들의 전횡에 맡기려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것처럼 저 역시 같은 심정에, 단검으로 무장하고 제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여인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고 다니는 일본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 신사에게 저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저는 일본인 두목, 즉 지휘관(간결하게 저는 그 사람을 지휘관으로 호칭하겠습니다)에게 (영어로) 아침 인사를 하면서, 그 일본인 지도자가 영어를 상당히 훌륭하게 구사한다는 것에 만족(만족이란 당연히 상대적인 것이지만)했습니다. 그 일본인 지도자는 저의 인사말에 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즉시 엄격하고도 쌀쌀하게 “귀하의 이름은?”이라는 질문을 저에게 던졌습니다. 이에 저는 “사바틴입니다”라고 그 질문에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귀하의 직책(duty주 011
번역주 011)
duty'라는 영어 단어는 본문에서 세레딘 사바틴이 직접 사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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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라고 다시 물었으며, “저는 건축기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저는 그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요청)을 했습니다. 즉 “저는 제 희망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의 모든 일본인 신사들이 처해 있는 이런 흥분된 상황 속에서 (저는 이 말을 하면서, 제 두 눈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조선 여인들을 끌고 다니는 일본인들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실로 유감이지만,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며, 그것이 아니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제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보호하고 방어해 주십사 귀하께 삼가 요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일본인 지휘관은 시종일관 나를 직접 응시하면서 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 집중하며 경청했습니다. 여기서 만약 제가 연기를 잘하지 못해서 두려움, 공포 혹은 (이 경우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과도한 용기를 명백하게 드러낼 경우, 당연히 제 문제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일본인 신사의 이런 시험하는 듯하며,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붙잡아 두려고 침착하게 조력했습니다. 잠시간에 걸쳐 생각에 잠겼던 일본인은 건조하고도 무뚝뚝한 말투로 저에게 “귀관은 안전하오. 여기에 서있고 움직이지 마시요(You are protected; stay here and be stationary주 012
번역주 012)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영어로도 병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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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그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에 저는 재차 그에게 “귀하의 호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 신사들은 제가 귀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는 이 점을 고려하시어, 저에게 한 명이나 두 명의 병사들을 배정해 주심으로써 친절을 마지막까지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인 지휘관은 그 즉시 왕후의 처소가 있는 뜰에 정렬해 있던 신식 조선 군대 중에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병사 두 명을 호출하여 제 근처에 시립해 있도록 하명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약 15분 정도 더 서 있었습니다(지금까지 저는 모든 사건의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병사가 호위하는 조건 하에서는 시간을 체크하는 행동이 전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 않았습니다). 이 15분 동안 저는 위에 제가 묘사한 모든 것, 즉 일본인들이 왕후의 처소에 있는 창문을 통해 10-12명의 조선 여인을 마당으로 내던진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가 왕후 처소의 뜰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물고 있었던 그 15분의 시간 중 거의 끝 무렵, 일본인 다섯 명은 얼굴이 붉게 흥분된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 고함치면서 (왕후 처소의) 툇마루로 나왔습니다. 이 다섯 명의 일본인들 중 한 명이 일본어로 외견상 매우 강경한 어떤 연설을 했으며, 그 뒤를 이어 일본인 다섯은 다시 처소의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이어 그들은 어떤 조선 여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외치면서 그 처소로부터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다섯 명의 일본인 모두는 처소의 툇마루로부터 뛰어내려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희생자를 놓아준 뒤, 매우 빠른 속도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는 듯이 저를 향해 직선으로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흥분한 일본인들은 (세 명은 키리몬을 입고 있었으며, 두 명은 유럽식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극도로 놀란 것 같아 보였으며, 예기치 않은 상황에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들은 흥분되고 충혈 된 눈으로 저를 응시하더니, 흉포하면서도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침묵하며 몇 초 동안 (약 10초)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후 그들 모두가 동시에 한 목소리로 제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일본어와 조선어로 저에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는 제가 약간이지만 일본어와 조선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가장 분별력을 갖춘 행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들을 상대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일본인들 중 누구든 한 명이라도 제가 영어로 한 말을 이해한 것인지(이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저는 그들이 제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면 저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 병사들의 설명에 만족한 것인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겠지만, 이들 다섯 명의 일본인들은 그 즉시 돌아서서 왕후의 처소로 향했습니다.
이때 제가 얼굴을 알고 있는 조선인 한 명이 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그 또한 제가 들어왔던 그 문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나를 확인한 조선인은 반기는 듯이 놀라워하며 “아~ 아”라고 소리 내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두고 되돌아가던 다섯 명의 일본인을 불러 세운 후, 그들에게 다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매우 활기차게 애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인과 (일본어로) 대화를 나눈 이들 다섯 명의 일본인들은 저를 향해서 갑자기 돌아서더니 사나운 소리를 내지르며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그 순간이 가장 불쾌했으며, 심지어 제 입장에서는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격노한 상태에서 저에게 달려들었으며, 그에 더하여 저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 병사들은 옆으로 물러나서 일본의 악한들에게 길을 터 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저에게 달려들어, 한 명은 제 옷깃을 다른 한 명은 제 소매와 상의의 앞깃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둘이 동시에 소리 지르고 위협하면서 제가 왕후를 지목하도록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일본어와 조선어로 소리를 지르는 동안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저에 대한 일본인들의 근거 없고 상스러운 태도에 놀랐다는 듯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인들 중에서 제 옷깃을 잡고 당기고 있던 사람이 상당히 명확한 영어로 저에게 “왕후는 어디 있는가? 왕후를 지목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나는 단 한 번도 왕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며, 나는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그에 앞서 남자로서 조선 왕후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머무는 장소를 알 수 있는 권리나 가능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고 설득하고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이런 해명과 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왕후의 처소로 나를 끌고 갔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들에게 왕후를 지목하도록 강요하려는 확고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일본인 지휘관이 다가 왔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저를 끌고 가던 일본인들이 저를 세우고서는 자신의 지휘관에게 무엇인가를 매우 공손한 형태로 설명하기 시작했으며, 설명 중에 계속해서 저와 저를 알아본 조선인을 가리키다가, 잔혹하고 격렬한 몸짓을 했습니다. 자기 부하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한 일본인 지휘관은 저에게 다가와 매우 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우리들은 왕후를 찾을 수가 없다. 당신은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이에 대해 저는 조선의 관습과 법률에 따라 왕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며, 그녀가 어디에 거처하는지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가리키라고 저에게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본인 지휘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인은 제가 설명한 이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저를 가만히 놔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단 저를 알아본 조선인은 저 또한 그를 (얼굴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한 듯, 저를 지켜주고 있는 일본인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 조선인이 유일하고도 위험한 목격자인 저를 살려둔다는 것은 절적하지 않다는 점을 일본인에게 설득시키려 했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일본인 지휘관이 조선인의 견해에 동의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지어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어디로 가려는 듯 준비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리석게도 제가 처해 버린 이 쥐덫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실행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 배치된 초병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빠른 걸음으로 일본인 지휘관에게 다가갔습니다. 우선 저로 인해 염려를 끼쳐드려 미안하다는 점을 밝힌 뒤, 그가 저를 보호해 주기로 언급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일본 신사들이 자신의 발언에 언제나 충실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실제로 수차례에 걸쳐 기분 좋은 경험을 지니고 있는바, 일본인 지휘관 역시 그런 신사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자신이 약속한 보호와 예의를 끝가지 실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궁궐로부터 저를 호위해 줄 병사들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일본인은 저를 보호 중이던 두 명의 병사들에게 저를 궁궐 내부로부터 데리고 나가라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조선인은 이런 결정에 불만인 듯 보였으며, 심지어 저와 함께 동행하면서 궁궐 뒤쪽의 외진 곳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저에게 앞서 가라고 명령했고 저는 그 명령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왕후의 궁궐로부터 나와서 약간 더 전진했을 때, 저는 조선인 병사들에게 조금 앞서서 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제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조선 병사들은 마지못해 하며 저의 제안에 따랐습니다. 제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제가 느낀 바로는, 저를 알아본 조선인이 벌써부터 저를 호위하고 있는 조선인 병사들에게 속삭이면서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실로 은밀하게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 즉 궁궐 내부의 남쪽 문으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가장 빠르고 큰 도로가 몇 개나 있었음에도 저를 외진 곳으로 인도했다는 것 자체가 저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본인들로부터 벗어나서, 단 두 명의 조선인 병사와 연약한 모습의 양반에 무장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조선인을 옆에 두고 있었던 저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자연히 필요한 경우 내 목숨을 위해 투쟁할 준비도 갖추었습니다. 저를 향해 다섯 명의 일본인 ‘소시(壯士, soshi)’들이 달려들었을 당시 저는 이런 의도를 고려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불안해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거나, 본능적이라 할지라도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방어하듯 두 팔을 들어 올렸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제 목숨이 그곳에서 끝을 맺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 앞에다 팔짱을 낀 상태로 서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완전히 안전하게 궁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궁궐 안의 여러 장소에 위치한 많은 일본 병사들과 장교들을 목격했으며, 국왕께서 평소 외국인들을 알현하시는 건물 근처에 약 8-10명의 일본 장교 지휘 하에 약 100-150명 정도의 일본 병사들로 구성된 초병들이 배치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배치되어 있었던 일본군 병사들의 수와 동일 장소에 많은 수의 조선인 고관들이 배석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국왕이 계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궁궐로부터 빠져나온 시각은 아침 6시였습니다. 제가 왕후의 처소가 있는 장소로부터 궁궐의 남쪽 문까지의 거리를 지나오면서 10-15분의 시간을 소요한 것으로 예상할 경우, 왕후께서는 5시 45분에서 심지어 5시 50분까지도 발각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궁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 즉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으며, 약 6시 30분 무렵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도착 즉시 우리나라의 대리공사인 베베르(К. И. Вебер) 각하께 제가 목격한 그 모든 것에 관하여 보고를 드렸습니다. 저는 우선 대리공사 베베르 각하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공사관 서기관에게 우리 공사관은 제가 말씀드린 것을 문서로써 작성하여 보관하실 의향이 있는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답 ......주 013
번역주 013)
이후의 한 줄이 복사되지 않은 것 같다. 이 보고서의 각 쪽은 27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의 쪽, 즉 л.128об.는 26줄만이 있다. 또한 내용이나 철자로도 뒤쪽의 문장과 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아마도 마지막 한 행이 복사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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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불행하게도 상황의 합류점에서, 우연한 그리고 유럽인들 중에서는 유일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으며, 그 서울에서 발생한 사태(금년 10월 8일)를 제가 묘사한 ......주 014
번역주 014)
문장 상 위에서 복사되지 않은 마지막 한 행과 연관되어 있어서 번역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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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몇 명의 외국인(예를 들면 서울주재 독일영사)들이 지금 작성한 것과 같은 종류의 문서상의 기록을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수신자가 누구이든 제가 지금 작성한 이것이 첫 번째 기록물입니다. 서울 사태(금년 10월 8일)와 관련된 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부언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설명이나 결론이 과연 필요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여기서 기술해야 할 것인가, 즉 그 설명이나 결론을 여러 면에서 사실들과 결부시켜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더 부언해야(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은 단 하나, 즉 왜 제가 저를 위해서는 불행한 상황이었던 서울 사태의 목격자가 되었는가라는 점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조선주재 대리공사 각하께서는 다른 (유럽의) 대표들과 함께 일본공사를 방문하시어, 단 한 명의 일본인도 궁궐 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일본 공사가 확신하는 것을 우선 경청하신 후, 공사께서는 유럽인 목격자를 데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무엇을 목격했는지와 관련하여 그에게(대리공사 각하께) 말씀드린 것을 일본 공사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가장 슬픈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즉 첫째, 일본인 지휘관을 포함한 서울 사태의 모든 주모자들이 그 즉시 서둘러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향했으며(그곳에서는 조선으로부터 출항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모든 일본인들과 새로운 (일본)당 소속의 조선인들은 제가 실제로 목격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의심하면서 제 목숨이 실질적인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베르 각하께서도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밝히려 들지 않는다고 보아 저를 의심하셨으며, 심지어 자신의 서기관이 참석한 중에도 저에게 직접적으로 의심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심은 저에게 극도로 모욕적이며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즉 금년 10월 8일 저는 한 명의 유럽인과 두 명의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인과 조선인들 범죄자들이 저를 암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즉 그들은 제가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으며, 바로 그런 점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향후 실행될 수 있는 대질심문에서 제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간혹 매우 불안한 정보를 입수했을 때는, 제가 집에 있으면 제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제 가족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제가 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저는 신경성 오한과 함께, 어떤 하찮은 일본인 광신자에 의해서 혹은 난폭하고 비겁한 조선인에 의해서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지속적인 공포 속에 생활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궁궐에서의 임시직도 잃었습니다. 실직 당하기 얼마 전에 공사관으로부터 문서를 전달받았습니다. 공사관은 이 문서를 통해 더 이상 조선에서는 저에게 어떤 직무도 추천하기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또한 저는 공사관을 건설하면서 제가 수령했어야만 하는 금액, 즉 공사관 내에 건축된 건물의 건설비용 중 7%를 저에게 지불해달라는 본인의 요청에 대한 공사관 측의 답변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다가오는 겨울에 우리 가족에게는 단 한 푼의 생활비도 남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조선을 떠나, 저와 우리 가족의 생계비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극도로 애석하지만, 공사관과 저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상황 하에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도착한 특별위원회가 수행하던 조사가 끝날 때까지 현실적으로 제가 처해 있었던 위험을 고려할 때,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조선을 떠난 것이 제가 할 수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입니다.
실제로, 서울 사태의 다음 날(금년 10월 9일) 내부대신 고문이라는 매우 훌륭한 직책을 저에게 (공식적으로)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조선의 새로운 파벌이 자신에게 위험한 인물로서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증거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이 제안이 오히려 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조선의 새로운 정부로부터 이런 제안이 있었음을 베베르 각하에게 보고를 드려야만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영사관의 문서보관소에 보관할 수 있도록 조선 내부협판 유길준(그는 1882년부터 1888년까지 미국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1888년 조선으로 귀국하자 그 즉시 5-6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을 점령하는 시점, 즉 1894년 7월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의 제안서를 증거물로써 베베르 씨에게 제출했습니다. 저는 조선 정부가 저에게 고문 직책을 제안한 것을 고려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대리공사 각하에게 조언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공사관은 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없으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10월 8일의 서울 사건에 관하여 본인이 위에 작성한 모든 것은 위에서 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제가 목격했던 실질적인 사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금년 10월 8일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에서 돌아다니는 소문과 유언비어 그리고 비록 제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소간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들로부터 제가 직접 입수한 일부 사실들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언급한 모든 인물들(정보원들)과 절친한 사이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사실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일본의 설명에 따르면, 궁궐을 침략한 것은 조선의 신식 군대입니다. 이 신식 군대는 궁궐수비대에 대한 시기심에서 조선 국왕의 개인 경호대(근위대)가 되는 명예를 힘으로 획득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설명(이 역시 일본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의 신식 군대가 역시 신식인 조선 경찰과의 불쾌한 오해(충돌)를 지닌 상태에서 연대가 해산될 위협을 받자 국왕을 찾아가 사면과 기타의 것을 사적으로 요청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 중에서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일본공사에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궁궐 침략 및 조선 여인들과 조선 대신들의 살해에 일본인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추측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만일 금년 10월 8일의 모든 사태에 심지어 일본공사관도 절대 관여하지 않다면, 금년 10월 8일에 발생한 사건의 거의 대부분을 목격한 저의 증언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 자기를 고발한 이들이 들고 있는 패를 이미 파악했으며, 따라서 자국의 (외교) 게임을 확실히 그것에 맞출 것으로 정말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인들이 내가 폭로자(목격자)인 것을 몰랐다면, 실로 분명히 그들은 많은 실수를 했을 것이며, 실수를 폭로함으로써 일본인을 상대로 우월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 시점에서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무엇을 비난하는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정책을 그 비난에 맞춤으로써(폭로에 의하여 야기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정책을 준비함으로써), 그런 비난으로부터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러시아 대표가 금년 10월 8일 서울에서 발생한 혼란 속에 일본인들이 참여한 것을 목격한 사람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우리 대표를 통해 알게 된 후, 당연히 자신의 서기관을 이 목격자에게 파견하여, 그 증거의 질에 관하여 최대한 알아보게 했습니다. 또한 이 목격자(즉 저)는 제가 목격했던 것 중에서 무엇인가를 억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방문한 일본공사관 서기에게 제가 목격했던 일부 사실들을 진술하지 않거나, 그 사실들을 조잡하게 왜곡하는 것이 분별 있는 행위로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도로 위험했을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금년 10월 8일 사태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제물포와 서울에서 떠도는 모든 루머들 역시 흥미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정부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다수의 증거(흔적)를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즉 금년 10월 10일 두 척의 일본 군함이 제물포에 입항했습니다. 같은 날, 즉 10월 10일 밤 일본의 하천용 기선(речной пароход)이 두 척의 군함에 접근했으며, 많은 (사복 차림을 한)일본인들이 상륙했습니다. 일본 전함 중 한척은 그 즉시 닻을 올려 외해로 출항했습니다. 금년 10월 9일 저녁 9시에 제물포를 벗어나 (일본으로)출항해야만 했던 일본 기선 중 한척 역시 10월 9일 새벽에 갑자기 닻을 올려 일본으로 출항했습니다(독일 기선 ‘Chow-chow-foo’).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 기선이 시모노세키 해협에 있는 등대 바로 옆에서 갑자기 암초에 좌초했다는 것입니다. 기선으로부터 일본인 승객들이 하선했습니다.
왕후와 관련된 소문은 매우 많으며 가장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왕후가 시해되었는지 혹은 생존해 있는지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석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자세하게 기술하겠습니다). 만약 왕후에게 어떤 (황당무계한) 보호와 유럽인들의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는 동기가 없었다면, 왕후는 언제나 자신을 위협하던 위험을 예방하고 피하기 위한 대책을 사전에 미리 수립했을 것입니다. 당시 왕후는 보호의 약속에 이미 매우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궁궐에 유럽인들이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왕후를 비롯하여 궁궐에 있는 모든 조선인들이 안심하게끔 현혹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목격자가 되어야 했던 최근의 서울 사건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의 진술을 이 정도에서 마치고자 합니다. 이제부터는 조선 정부에서 발생한 (금년 10월 8일의) 혁명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제가 생각하는 모든 원인들을 간략하게 부가적으로 진술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막 점령했던 작년, 중국파로 불리며, 왕후의 친척들인 민씨 일족이 그 수장으로 있는 조선의 보수파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힘을 모두 잃었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자신의 직책을 부여 받은 중간 계층의 조선인들이 조선 정부의 지배층으로 등극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그들 역시 귀족(양반) 출신이었으나, 그들의 일족이 조선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런 조선인들의 예를 들자면 현재의 수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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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을 이렇게 쓴 것 같다. 김가진을 총리대신으로 본 것은 세레딘 사바틴의 오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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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김가진(金嘉鎭)과 작년에 대원군이 비밀리에 파견한 조선인들에 의해 살해된 김가구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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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우(金鶴羽). 법부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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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인물이 있습니다. 조선에 있는 이 두 개의 파벌 중에서 보수파가 항상 러시아와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진보주의자들의 다른 일파(친일파)는 언제나 일본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보수주의자들은 물론, 진보주의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항상 교묘하게 행동했습니다. 제 견해로는 조선주재 미국 외교관들의 이런 이중적 술책이 일본인들이 조선을 점령한 이후부터는 특히 적절치 못한 행위였습니다. 제3자의 눈에도 명확했던 바와 같이 러시아 대표는 언제나 보수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만약 부족하나마 제 견해를 밝혀도 된다면, 보수파가 언제나 백성들 사이에서 상당한 확실한 안정성, 연대감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에서 그의 방법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파의 수장은 언제나 왕후였습니다(대원군도 수장이었습니다만, 약간 다른 과에 속했습니다). 제 생각에, 매우 중요한 사실은 왕후께서는 언제나 중국인들에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는 많은 예(증거) 중에서 하나를 들자면, 1888년 중국인들이 유명한 ‘명명(命名) 만두(именинный пирог)’를 이용하여 왕후를 독살하려 했던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왕후는 항상 뛰어나게 교묘했으며, 지력과 조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의 사실이 이것을 잘 증명해주는 생생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왕후는 그런 기지로써 1884년 조선에서 실패로 끝난 혁명의 참가자였으며, 상해에서 살해된 김옥균(金玉均) 이후 일본파의 거두로 잘 알려진 박영효를 상대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조선의 왕후는 특히 과거에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쓰라린 경험(1876년, 특히 1882년과 1884년의 경험) 덕분에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처리할 정도로, 즉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고 왕후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지금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났을 것이라고 볼 만큼 매우 똑똑하면서도 실로 조심스럽고 영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달랐습니다. 1876년과 1884년 그리고 특히 1882년에 왕후는 소름끼치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력과 기지 덕분에 항상 위험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으며, 그에 더하여, 언제나 오해를 해결한 뒤에는 일시적으로 상실했던 영향력과 힘을 재차 복구할 수 있었던바, 이것이 본질적이면서도 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불행한 조선 왕후를 위한 상황이 극도로 바람직하지 못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유럽인들이 개입하여, 모든 위험으로부터 완전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왕후께서는 여러 번에 걸친 안전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성공으로 증명된 자신의 오래되고도 동양식 기지에서 나온 계책을 계속해서 고수하셨습니다. 왕후께서는 일본인과 조선의 일본파들을 상대로 하여 요동반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인들이 외교적 패배주 017
번역주 017)
청일전쟁 이후의 삼국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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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경험한 그 시점까지 가장 격렬한 외교전을 치렀으며, 이런 사실은 모두가 확연이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피치 못하게 여순 항과 요동반도를 포기한 이후, 왕후께서는 일본인들이 그런 류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행사하도록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점차 확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왕후의 주변 인물들은 이제 모든 위협은 지나갔으며, 더 이상 일본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왕후께서 확신하시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인들로써, 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남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다양한 종류의 이권과 특권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결국 그들(미국인들)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즉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치욕스러울 정도의 불리한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금광개발권을 획득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대표이신 베베르 각하 역시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것을 고려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런 목적에서 자신의 인척인 손탁주 018
번역주 018)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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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주 019
번역주 019)
알자스로렌 지역의 알자스(Alsace, 독일어로는 Elsass)를 말한다. 지금은 프랑스령이지만, 당시에는 독일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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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의 미혼 중년 여인) 여사를 조선 정부의 관직에 임명시켰습니다(특히 조선 국왕의 궁내부에 임명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인들의 눈에는 그것 역시 더욱 중요하고 일본을 위해 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손탁 여사가 담당한 (외형상) 임무는 조선의 양반집 규수들을 위해 뜨개질 학교를 개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요리법을 조언해주었으며, 유럽식 의전 만찬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이 진행될 때는 찬모(饌母)로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자신의 이례적인 지위, 즉 자신의 새로운 직책 덕분에 손탁 여사는 매우 자주 왕후를 찾아보았으며, 그녀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종종 왕후의 곁에서 2-3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시기에 그리고 다른 상황, 즉 보다 더 정상적이고 조선을 위해 보다 더 유리한 조건 하에서는 이 모든 것이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으로 하여금 자신의 탐욕을 억제하도록 만들고, 모든 일본인들에게 귀중한 염원이었던 요동반도의 점유를 포기하도록 만든 나라인 러시아의 대표가 보여준 자신에 대한 이런 관심을 확인하게 된 불행한 왕후는 당시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언제나 보여주었던 조심성을 서서히 망각하게 되었으며, 마치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존재가 이미 완전하게 일소된 것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일부 적절하지 못한 시점에서 손탁 여사가 왕후와 극도로 밀접한 친분을 맺게 되면서, 일본인과 일본파 조선인들의 분노가 최후의 한계에까지 도달했는데, 이런 사실에 대해서 서울 내에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반드시 여기서 말씀드려야 할 것은, 손탁 여사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기질을 볼 때, 외교를 담당하기에는 전혀 적절치 않은 인물이었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현재와 같이 확실하지 않고 가변적인 상황 하에서는 (심지어 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불행한 왕후를 위해서는 당연히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즉 금년 9월 초(4일)에 궁궐 내에서는 현 조선왕조 수립 50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미국인 르장드르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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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장드르(Charles W. Le Gendre, 李善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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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손탁 여사 그리고 저로 구성된 축제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저는 장식 분야를 담당했으며, 손탁 여사는 만찬 준비와 식탁에서의 시중을 담당했습니다. 르장드르 장군은 말하자면 일종의 명예직이었습니다. 본 위원회에서 축제계획을 작성할 당시 약 20명 가량의 조선 고관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면서 일본파에 속하는 두 명의 고관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식탁 뒤에서 시중을 들 수 있도록 일본인 웨이터를 초빙하자는 문제를 안건으로 제시했습니다. 일본인 한 명의 성명이 거론되는 순간,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전체 일본인들을 상대로 험담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와중에 심지어 침을 뱉었습니다..... 안목이 너무나 좁고 아둔했던 르장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을 사귀는 기사인 양,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일견하기에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사건 및 이와 유사한 작은 사건들이 매우 부당한 것이었으며, 불난 곳에 점점 더 강하게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습니다. 결국 이 화마는 10월 8일에 상대적으로 이렇게 급작스럽게 타오른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부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미국인들이 금광 채굴권과 같은 최고의 이권을 획득했습니다. 또한 손탁 여사는 자기 개인저택을 건설할 비용으로 $10,000나 되는 자금을 하사 받았으며, 그 외에도 손탁 여사의 지도하에 다양한 뜨개질을 조선의 규수들에게 교수하기 위하여 학교를 건립할 예정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이권이나 특권으로부터 단호하게 배제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일본인들과 일본파에 속하는 조선인들은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안과 관련하여 더 많은 사실들을 더 열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가 간략하게 묘사한 것을 통해서도 얼마 전(금년 10월 8일) 서울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충분히 명확해지기를 바랍니다.
 
А. И. 세레딘 사바틴.
1894년 10월 18/30일,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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