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에서 기업을 열었으니, 조타는 멀리 후손을 이어갔고,
『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월왕 조타주 002는 진정주 003사람이다. 진이 천하를 병합하고 양월주 004
각주 004)
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주 005·남해[군]주 006·상군주 007越과 粤은 통용자이며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발음을 ‘粤’로 발음하였으므로 越은 人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史記』에는 南越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漢書』에는 南粤이라 표기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으나,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6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南海·象郡 3군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다. 군 치소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위의 책, 297~298쪽).
각주 007)
을 설치하였다. 진말에 남해위 임오가 병들어 죽음에 임박해서, 용천[현]령주 008象郡은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기원전 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 越南 維州 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각주 008)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승 등이 난을 일으키고, 호걸들은 진을 배반하고 서로 일어난다고 들었소. 남해[군]은 멀리 치우쳐 있지만, 도적떼 같은 군사들이 이곳을 칠까 두렵소. 내가 군사를 일으켜 신도주 009를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니, 고로 이를 공에게 알라고자 불렀소.’ 즉시 [조타에게] 조서로 남해위 일을 행하게 했다. [임]오가 죽자 [조]타는 곧 횡포[관]주 010·양산[관]주 011·황계관주 012『顔師古注』에서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 「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 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 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기원전 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 卷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라고 하였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299쪽).
각주 012)
에 격문을 돌려 포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 터이니, 서둘러 길을 끊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스스로 지키도록 하라.’ 진이 망하자 [조]타는 곧 계림[군]과 상군을 쳐서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무왕에 즉위하였다. 고제(기원전 202~195)가 천하를 평정한 후 육가를 보내어 [조]타를 남월왕으로 삼았다. 부를 나누어주어 사신을 왕래토록 하였다. [조타로] 하여금 백월을 평화롭게 모아 변경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史爲樂 主編, 위의 책, 2618쪽).
• 참고
『漢書』 卷95 兩粵 南粵王趙佗 眞定人也 秦并天下 略定揚粵 置桂林 南海 象郡 以適徙民與粵雜處 十三歲至二世時 南海尉任囂病且死 召龍川令趙佗 語曰 聞陳勝等作亂 豪桀叛秦相立 南海辟遠 恐盜兵侵此 吾欲興兵絕新道 自備待諸侯變 會疾甚 且番禺負山險阻 南北東西數千里 頗有中國人相輔 此亦一州之主 可爲國 郡中長吏亡足與謀者 故召公告之 卽被佗書 行南海尉事 囂死 佗卽移檄告橫浦 陽山 湟谿關 曰盜兵且至 急絕道聚兵自守 因稍以法誅秦所置吏 以其黨爲守假 秦已滅 佗卽擊并桂林 象郡 自立爲南粵武王 高帝已定天下 爲中國勞苦 故釋佗不誅 十一年 遣陸賈立佗爲南粵王 與剖符通使 使和輯百粵 毋爲南邊害 與長沙接境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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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越과 粤은 통용자이며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발음을 ‘粤’로 발음하였으므로 越은 人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史記』에는 南越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漢書』에는 南粤이라 표기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으나,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6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南海·象郡 3군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다. 군 치소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위의 책, 297~298쪽).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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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象郡은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기원전 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 越南 維州 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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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顔師古注』에서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 「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 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 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기원전 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 卷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라고 하였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299쪽).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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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史爲樂 主編, 위의 책, 26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