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송은 공적을 높였으니, 단청에 초상을 의탁하였고,
양송은 공적을 높였으니, 단청에 초상을 의탁하였고,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제 [때에], 영창·익주의 오랑캐들이 모두 반란하였다.주 001 이에 종사 촉군 [사람] 양송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접유에 이르러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강성하여 미처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먼저 조서를 고시하여 현상(懸賞)을 거듭하니, 이내 진군하여 봉리 등과 싸워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참수한 것이 3만여 급이었으며 재물로 획득한 것이 4천여 만이었는데, 이로써 군사들에게 포상하였다. 봉리 등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함께 모의하였던 거수를 참수하고 [양]송에게 가서 항복을 구걸하니, [양]송은 후하게 위로를 베풀고 받아들였다. 그 나머지 36개 종족도 모두 와서 항복[할 뜻]을 드러냈다. [양]송이 인하여 장리에게 만이를 간악하고 교활하게 침범하였던 90인을 아뢰었다.주 002 [그런데] 주 안에서 논한 공이 왕에 이르기도 전에 공교롭게도 [양]송은 병이 들어 죽었다. 익주자사 장교주 003는 이것이 심히 애통하고 애석하여, 돌을 깎아 명문을 새기고 그의 모습을 그렸다.”
• 참고
『後漢書』 卷86 邛都夷 安帝元初三年 郡徼外夷大羊等八種 戶三萬一千 口十六萬七千六百二十 慕義內屬時郡縣賦斂煩數 五年 卷夷大牛種封離等反畔 殺遂久令 明年 永昌益州及蜀郡夷皆叛應之 衆遂十餘萬 破壞二十餘縣 殺長吏 燔燒邑郭 剽略百姓 骸骨委積 千里無人 詔益州刺史張喬選堪能從事討之 喬乃遣從事楊竦將兵至楪楡擊之 賊盛未敢進 先以詔書告示三郡 密徵求武士 重其購賞 乃進軍與封離等戰 大破之 斬首三萬餘級 獲生口千五百人 資財四千餘萬 悉以賞軍士 封離等惶怖 斬其同謀渠帥 詣竦乞降 竦厚加慰納 其餘三十六種皆來降附 竦因奏長吏姦猾侵犯蠻夷者九十人 皆減死 州中論功未及上 會竦病創卒 張喬深痛惜之 乃刻石勒銘 圖畫其像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