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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현뢰를 경계로 삼으니, 날뛰던 행적이 이윽고 쇠퇴하였고,

현뢰를 경계로 삼으니, 날뛰던 행적이 이윽고 쇠퇴하였고,
『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유선우주 001
각주 001)
烏維單于는 흉노의 여섯 번째 선우로, 기원전 114~105년 동안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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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즉위하고서 무제가 처음으로 순수하였다. 친히 삭방[군]까지 이르러주 002
각주 002)
한무제는 元封 6년(기원전 105) 겨울 변경의 군현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雲陽에서 출발하여 上郡, 西河, 五原을 거쳐 장성 밖에 나갔다가 다시 朔方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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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18만 기를 정돈하여 용맹스러운 기개를 보였다. 이때 한은 동쪽으로는 예맥과 조선을 공략하여 군으로 삼았으며주 003
각주 003)
元封 3년(기원전 108) 한 무제가 왕검성을 함락하고, 그곳에 樂浪·玄菟·眞番·臨屯의 4군을 세운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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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으로는 주천군을 설치하여 호가 강과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게다가 [한은] 서쪽으로 월씨(월지)·대하와 통교하고, 공주주 004
각주 004)
이때 오손왕에게 시집한 이는 漢景帝의 손자인 江都王 劉建의 딸인 劉細君이다. 즉 종실의 딸이었는데, 무제는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하고 두 차례나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해당표현이 『한서』에는 翁主로, 『사기』에는 公主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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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오손왕에게 시집보내 흉노가 서쪽에서 [받는] 원조를 [그들로부터] 분리시켰다. 또한 북쪽으로 차츰 농지를 확대하여 현뢰주 005
각주 005)
眩雷는 고대 종족 명칭 중 하나이다. 烏孫보다 북쪽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존재 및 활동은 『사기』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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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거주하는 곳]까지 이르러 새로 삼았다. 그런데도 흉노는 끝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 참고
『漢書』 卷94上 匈奴 是歲 元鼎三年也 烏維單于立 而漢武帝始出巡狩郡縣 其後漢方南誅兩越 不擊匈奴 匈奴亦不入邊 … 是時 天子巡邊 親至朔方 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 而使郭吉風告單于 漢使楊信使於匈奴 是時漢東拔濊貉朝鮮以爲郡 而西置酒泉郡以隔絶胡與羌通之路 又西通月氏大夏 以翁主妻烏孫王 以分匈奴西方之援國 又北益廣田至眩雷爲塞 而匈奴終不敢以爲言

  • 각주 001)
    烏維單于는 흉노의 여섯 번째 선우로, 기원전 114~105년 동안 재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한무제는 元封 6년(기원전 105) 겨울 변경의 군현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雲陽에서 출발하여 上郡, 西河, 五原을 거쳐 장성 밖에 나갔다가 다시 朔方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元封 3년(기원전 108) 한 무제가 왕검성을 함락하고, 그곳에 樂浪·玄菟·眞番·臨屯의 4군을 세운 것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때 오손왕에게 시집한 이는 漢景帝의 손자인 江都王 劉建의 딸인 劉細君이다. 즉 종실의 딸이었는데, 무제는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하고 두 차례나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해당표현이 『한서』에는 翁主로, 『사기』에는 公主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眩雷는 고대 종족 명칭 중 하나이다. 烏孫보다 북쪽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존재 및 활동은 『사기』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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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뢰를 경계로 삼으니, 날뛰던 행적이 이윽고 쇠퇴하였고, 자료번호 : hw.k_0002_0010_0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