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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4-3-3 미쓰이 미이케탄광

연합군 포로 레스터 테니 | 1942년 포로가 되어 1943년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
 
미국인 레스터 테니는 1942년 4월 필리핀 바탄(Bataan)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수용소에서 도망쳐 게릴라에 가담했으나 붙잡혀 고문을 받았습니다. 바탄, 카바나투아(Cabanatuan)를 거쳐 마닐라에서 오무타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미이케탄광에서는 하루에 12시간의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때로는 삽이나 곡괭이, 석탄 운반용 쇠사슬로 구타당하는 학대도 받았습니다. 노예처럼 학대당하며 제대로 된 식사는 주지도 않고 치료도 받을 수 없는 비참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탄, 먼 길의 끝에서(バターン 遠い道のりのさきに)』, 梨の木舎, 2003
 
연합군 포로 로이 에드워드 프리스 | 1942년 포로가 되어 1943년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
 
미국인 로이 에드워드 프리스는 1942년 5월 필리핀 코레히도르(Corregidor) 섬에서 포로가 되어 카나바투안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1943년 7월 크라이드호로 일본에 실려가 미쓰이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173번’이라는 번호로 불렸습니다. 강제노동을 피하기 위해 동료에게 왼쪽 손가락을 부러뜨리게 해서 징벌방에 3일간 갇혔습니다. ‘차렷’, ‘우향우’라는 일본어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군 포로・가족과의 교류회」에서의 증언
 
연합군 포로 해리 코레 | 1942년 일본군 포로가 되어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
 
미국인 해리 코레는 1942년 5월 필리핀 코레히도르에서 포로가 되어 미이케에 연행되어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노동은 10일간 연속해서 하루 10시간에서 14시간을 일했고, 낙반이나 부상도 많았습니다. 낙반 사고를 두 번 당해 부상을 입었고, 갱 밖에서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군 포로・가족과의 교류회」에서의 증언
 
연합군 포로 폴 다니엘 | 1943년 일본군 포로가 되어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
 
네덜란드인 폴 다니엘은 자바 섬에서 포로가 되어 1943년 12월 후쿠오카 비행장 공사에 동원되었고 1944년 12월 미이케탄광으로 보내졌습니다. 폴 씨는 당시에 괴로웠던 것은 고문이었는데, ‘입으로 호스로 물을 넣어 가득차면 배위에 올라탔다, 어떤 때는 무릎을 꿇리고 무릎 뒤에 작대기를 넣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하였고, 머리 위에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게 한 적도 있었다, 일본인 광부 여러 명과 포로였던 본인들이 여러 명 같이 일을 했지만 작업은 고통스러웠다’라고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는 때가 많고 큰 소리를 지르거나 흠뻑 땀을 흘리거나 해서 부인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전 포로의 가족과 규슈의 포로수용소 터를 여행하며(蘭元捕虜の家族と九州の捕虜収容所跡地を旅して』」, POW연구회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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