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仁宗) 때부터 먼 곳의 경략(經略)에 적극적이지 않아 조공사절도 거의 오지 않자 서역과 통교하기 위해 합리 추장에게 효유하여 이른 글
선덕 2년(1427)에 그 우두머리 타랄한역불랄(打剌罕亦不剌)
주 001이 내조(來朝)하여 말을 바쳤다.주 002
인종(仁宗, 1378~1425; 재위 1425)주 003
각주 003)
때부터 원방(遠方)에 대한 경략(經略)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선종(宣宗, 1399~1435; 재위 1425~1435)주 004仁宗: 명 왕조 4대 황제인 洪熙帝 朱高熾의 廟號이다. 洪熙帝는 永樂帝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락제가 황제위에 오르자 永樂 2년(1404)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永樂 22년(1424)에 부친을 뒤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祖宗의 偉功을 守成한다’라는 卽位의 조칙을 발하여, 영락제의 대외 적극정책에 반해 內治에 중점을 두어 통치코자 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여 즉위한 지 겨우 8개월만인 洪熙 원년(1425)에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노력은 그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諡號는 昭皇帝이며, 廟號는 仁宗이고, 陵은 獻陵이다.
각주 004)
이 황위(皇位)를 계승해서도 오랫동안 사신을 먼 지방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의 조공사절도 거의 오지 않았다. [선덕] 7년(1432)에 다시 중관 이귀에게 명하여 서역과 통교하도록 하고, 칙서를 내려 합렬의 추장 사합노(沙哈魯)에게 효유하여 이르기를, “이전에 짐의 황조(皇祖) 태종(太宗)
주 005
문황제(文皇帝)
주 006께서 국정(國政)에 임하실 때 너희들은 삼가 조정을 섬기면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는 데 시종 한결 같았다. 지금 짐이 삼가 천명(天命)을 받아 황제에 즉위하여 만방(萬方)을 주재(主宰)하면서 선덕(宣德)이라 연호(年號)를 정하였다. 크고 작은 정무(政務)를 모두 황조(皇祖)께서 하늘을 받들고 백성을 긍휼하며 일시동인(一視同仁)했던 마음을 체현(體現)하고자 한다. 전에 사신을 보내어 새서와 폐백을 가지고 가서 하사토록 하였는데, 길이 막혀 돌아왔다. 지금은 이미 개통되었으니, 특별히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너희 나라에] 가서 짐의 뜻을 효유케 하였다. 바라건대, 하늘의 뜻을 더욱 따르고, 영원히 충성과 우호[의 마음]을 돈독히 하여, 서로 왕래하여 한 집안이 되어, 상려(商旅)를 통행시켜 각기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아울러 문기·나금(羅錦)을 하사하였다.주 007
이귀 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조공사신 법호아정(法虎兒丁)
주 008이 이미 경사주 009에 이르러 객사(客舍)에서 사망하였다.주 010 관원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니, 담당 관원이 장례(葬禮)를 치러주었다.주 011 얼마 후 다시 사신을 이귀에 딸려 보내 낙타·말·옥석을 바쳤다. 이듬해(1433) 봄에 사신이 돌아갔다. 다시 이귀에게 명하여 호송토록 하고, 그 왕 및 [부락의] 우두머리에게 채폐를 하사하였다.주 012宣宗: 明朝 5대 황제인 宣德帝의 廟號이다. 그는 仁宗 洪熙帝와 誠孝 昭皇后의 장자로 1399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朱瞻基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永樂帝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앞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훈도를 받았다. 永樂 9년(1411)에 12살의 어린 나이에 皇太孫으로 책봉되었고, 영락제의 北征에 따라다녔다. 그가 군사 방면에 대해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이런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1424년에 洪熙帝가 제위에 오르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부친은 몸이 허약하여 요절 하고 말았다. 이에 1425년에 26세의 나이로 황제 위에 오르고 年號를 宣德이라 했다. 즉위해서 ‘제2의 靖難의 變’이라 일컫는 漢王 朱高煦의 반란을 진압하고, 宣德 2년(1427)에 安南과 화평을 맺고 交阯布政司를 폐지하여 安南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宣德 3년(1428)에는 兀良哈(Uriyangqai)의 침입을 격파하고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를 재건하였는가 하면 宣德 6년(1431)에는 영락제 시기부터 시작된 이른바 南海遠征을 속개하였다. 아울러 內政에서도 守成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宣德 연간은 內閣과 宦官이 실질적으로 明朝의 政治史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로 알려져 있다. 또 宣德帝는 冗官을 없애고, 수비를 위주로 한 방어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안정을 보였다. 다만 재위 10년만인 1435년에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善政은 이어지지 못했다. 諡號는 章皇帝이며, 그의 陵은 景陵이다.
각주 012)
이해 가을 및 정통 3년에 모두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이에 관한 내용은 『宣宗實錄』 卷99 宣德 8년 3월 戊辰條 참조. 한편 본문의 ‘其王’은 『宣宗實錄』에는 ‘沙哈魯鎖魯檀’ 즉 사합노 술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이 기사에서 李貴 등이 결국 7개월 사이에 西域 諸國을 왕래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에 대하여 張文德은 李貴 등이 실제로는 宣德 7년에 哈烈에 이르지 않았고, 기껏해야 哈密에 도달했을 뿐이며 바로 哈密에서 哈烈의 使節을 만나 이에 哈密과 哈烈의 使節과 함께 京師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永樂 12년(1414)에 哈烈에 出使했던 陳誠이 陝西 肅州衛로부터 출발하여 哈烈에 도달하기까지 9개월이나 걸렸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1, 32쪽 참조.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宣宗: 明朝 5대 황제인 宣德帝의 廟號이다. 그는 仁宗 洪熙帝와 誠孝 昭皇后의 장자로 1399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朱瞻基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永樂帝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앞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훈도를 받았다. 永樂 9년(1411)에 12살의 어린 나이에 皇太孫으로 책봉되었고, 영락제의 北征에 따라다녔다. 그가 군사 방면에 대해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이런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1424년에 洪熙帝가 제위에 오르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부친은 몸이 허약하여 요절 하고 말았다. 이에 1425년에 26세의 나이로 황제 위에 오르고 年號를 宣德이라 했다. 즉위해서 ‘제2의 靖難의 變’이라 일컫는 漢王 朱高煦의 반란을 진압하고, 宣德 2년(1427)에 安南과 화평을 맺고 交阯布政司를 폐지하여 安南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宣德 3년(1428)에는 兀良哈(Uriyangqai)의 침입을 격파하고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를 재건하였는가 하면 宣德 6년(1431)에는 영락제 시기부터 시작된 이른바 南海遠征을 속개하였다. 아울러 內政에서도 守成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宣德 연간은 內閣과 宦官이 실질적으로 明朝의 政治史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로 알려져 있다. 또 宣德帝는 冗官을 없애고, 수비를 위주로 한 방어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안정을 보였다. 다만 재위 10년만인 1435년에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善政은 이어지지 못했다. 諡號는 章皇帝이며, 그의 陵은 景陵이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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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이에 관한 내용은 『宣宗實錄』 卷99 宣德 8년 3월 戊辰條 참조. 한편 본문의 ‘其王’은 『宣宗實錄』에는 ‘沙哈魯鎖魯檀’ 즉 사합노 술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이 기사에서 李貴 등이 결국 7개월 사이에 西域 諸國을 왕래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에 대하여 張文德은 李貴 등이 실제로는 宣德 7년에 哈烈에 이르지 않았고, 기껏해야 哈密에 도달했을 뿐이며 바로 哈密에서 哈烈의 使節을 만나 이에 哈密과 哈烈의 使節과 함께 京師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永樂 12년(1414)에 哈烈에 出使했던 陳誠이 陝西 肅州衛로부터 출발하여 哈烈에 도달하기까지 9개월이나 걸렸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1, 32쪽 참조.
색인어
- 이름
- 타랄한역불랄(打剌罕亦不剌), 인종, 仁宗, 선종, 宣宗, 이귀, 사합노(沙哈魯),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 이귀, 법호아정(法虎兒丁), 이귀, 이귀
- 지명
- 서역, 합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