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발문(跋文)을 대신하여

진파리 제1호분과 제4호분은 후기 고구려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중요한 고분이면서도 최초의 조사인 1941년에 조사보고가 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야 말았다. 불충분하지만 감히 여기서 소개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진파리 제1호분이 후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편년연구, 나아가서는 후기 고구려고분의 편년연구에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진파리 제1호분 현실 북벽에는 중앙에 현무가 있고 좌우에는 산악이 그려져 있고, 산악의 위에 수목이 그려져 있다(圖 14).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도의 사신도이다.주 001
각주 001)
내리(內里) 제1호분은 도굴에 의해 파괴가 심하나 현실 북벽에 현무의 일부와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하며 사신도와 함께 소나무와 운문을 그리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진파리 제1호분과 가깝다고 본다(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1990, 238쪽). 또한 이를 근거로 내리 제1호분은 진파리 제1호분의 예와 매우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김진순, 2009, 39쪽). 그러나 현재까지 공간된 자료에 의하면 내리 제1호분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발굴조사보고에서도 북벽에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형상을 그리고, 거기에 머리 부분과 사족을 붙였으며 더우기 뒤엉킨 긴 뱀이 늘어선 형상을 살펴볼 수도 있는데 현무의 세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뱀의 머리도 불명확하다’라고만 되어 있으므로(有光敎一, 1937, 22쪽)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기술은 없다
닫기

이와 동일한 양식의 수목이 그려진 벽화가 1986년에 중국 산동성 臨朐縣에서 발견되었다. 일찍이 진파리 제1호분과의 연계가 지적된(李泰浩, 2003) 북제(北齊)의 최분벽화묘(崔芬壁畫墓)가 바로 그것이다(산동성문물고고연구소 臨朐縣博物館, 2002;臨朐縣博物館, 2002). 이 벽화묘에서는 묘지(墓誌)가 출토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묘주(墓主)는 위열장군(威烈將軍) 남토대행태도군장사(南討大行台都軍長史)였던 최분(崔芬)으로 天保 원년(550년) 10월 19일에 죽었고 다음 해인 天保 2년 10월 9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圖 14_진파리 제1호분 현실 북벽 벽화 모사
최분(崔芬) 묘는 무덤안길과 묘실로 되어 있는데 벽감(壁龕)이 북벽과 서벽의 중앙에 붙어 있다. 무덤안길과 묘실에서 벽화가 보이는데 무덤안길에는 무사도, 묘실에는 동쪽 벽의 윗부분에 청룡과 동방칠숙도(東方七宿圖)(圖 15)가, 서쪽 벽의 윗부분에는 백호와 서방칠숙도(西方七宿圖)가, 서벽의 아랫부분에 있는 이실(耳室)의 입구 위에는 묘주부부의 출행도(圖 16)가, 남쪽 벽 아래의 문 서쪽에 주작과 남방칠숙도(南方七宿圖)(圖 17)가, 북벽의 윗부분에 현무와 북방칠숙도(北方七宿圖)(圖 16)가 있다. 동·서·북벽의 아랫부분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과 영계기도첩병풍(榮啓期圖牒屛風), 무용도 등이 그려져 있다. 묘주인 최분은 북위(北魏) 및 남조(南朝) 제왕조(諸王朝)와 관계가 깊었던 청하(淸河) 최씨(氏) 출신이다. 출행도나 인물도첩병풍(人物圖牒屛風) 등 이 고분의 벽화에는 북조(北朝)와 함께 남조(南朝) 미술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최분 묘 북벽의 현무도 구도와 묘실 전체에 다수 그려진 수석도(樹石圖)에 보이는 수목이다(圖 18). 진파리 제1호분 현실 북벽 현무도의 좌우에는 이와 동일한 모양의 수목도가 그려져 있다(圖 19). 이 수목을 최분 묘 보고에서는 ‘괴수(槐樹:회화나무)’로 되어 있는데 그림의 모양으로 보아 타당하다고 생각된다(산동성문물고고연구소 臨朐縣博物館, 2002). 그렇게 본다면 진파리 제1호분의 수목도 조사 당시부터 ‘소나무’로 불려왔으나(小川敬吉他, 1941) 실제 나무의 종류로 동정(同定)해 본다면 소나무가 아니라 회화나무를 그린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圖 15_최분묘 묘실 동벽 벽화
圖 16_최분묘 묘실 북벽 및 서벽 벽화(부분)
圖 17_최분묘 묘실 남벽 벽화
圖 18_최분묘 묘실 서벽 북측 수목도
圖 19_진파리 제1호분 북벽 벽화 부분(❶ 서측 수목도 ❷ 동측 수목도)
그럼 두 고분의 현무도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최분 묘의 현무도는 북벽 밑부분 중앙에 있는 벽감(壁龕)의 윗부분에 그려져 있다. 그 중심에 그려진 현무의 몸에는 머리부분보다 꼬리부분 쪽을 향해 뱀이 삼중으로 감아 반전해서 뒤돌아보는 현무와 서로 노려보고 있다. 등에는 신인(神人)이 타고 앞뒤에 각 3명의 방상씨(方相氏)가 보인다. 현무의 밑부분에는 산악도를, 그 좌우에는 산악에서 나온 수목을 그리고 있고 비운문도 보이며 배경에도 산악도와 수목도가 보인다. 이러한 사신도의 배경에 산악도와 수목도를 배치한 예는 무정(武定) 8년(550년)에 죽은 동위(東魏)의 여여공주(茹茹公主)의 묘(磁縣文化館, 1984) 등이 있다. 여여공주묘는 묘실 천장이 붕괴되어 벽화의 잔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묘실 북벽과 서벽에 부분적으로 있는 현무와 백호의 배경에서도 보인다(湯池, 1984).
진파리 제1호분 현실 북벽의 벽화는 중심에 현무를 그렸는데 뱀이 몸통을 2번 휘감고 현무의 목 쪽으로 나온 후 전방으로 머리부분을 쭉 뻗어 뒤돌아서 현무와 마주본다. 배경에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연화문, 인동당초문, 비운문이 유려하고 자유분방한 터치로 그려져 있는데 약동감이 넘치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밑부분에는 산악도가 있는데 좌우의 산악도 위쪽에는 최분묘와 동일한 형상의 수목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주제가 되는 사신도의 좌우에 수목을 배치한 구도는 진파리 제1호분의 현무도뿐이다(註 14 참조) .
이러한 진파리 제1호분의 현무도는 수목도의 표현이나 수목 사이에 주제를 그리는 구도라는 점에서 최분 묘의 현무도와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北魏), 동위(東魏)에 이어 북제(北齊)와의 관계가 양호했는데 최분 묘와 평양은 지리적으로 황해(黃海)를 건너기만 하면 그다지 멀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남조(南朝)보다는 동위 혹은 북제에 전래된 분본(粉本)과 비슷한 계통의 것이 동위 혹은 북제를 경유해서 전해졌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파리 제1호분의 사신도만을 가지고 보면 북조(北朝)계통인 최분 묘의 사신도와는 달리 남조 계통인 사신도의 색채가 농후하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이 유려하게 그려진 비운문이나 날고 있는 연화문 등은 남조계통의 것이다. 물론 남조의 미술양식이 북조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것이 남조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양원왕대에 남조(南朝)와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선대인 안원왕대에는 동위뿐만이 아니라 양(梁) 과도 양호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진파리 제1호분 벽화에 사용된 회화 요소의 다양한 정보가 동위를 경유하지 않고 남조에서 직접 고구려에 들어왔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양원왕대에 고구려가 남조에 조공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러한 정보가 전래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립한다고 해도 문화는 흐른다는 것을 역사가 나타내 주고 있으므로 양원왕 치세 하에 있어서 양(梁), 진(陳)으로부터의 문화전파의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6세기대 중국미술에서의 양식변화의 간격을 20년 정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으므로 진파리 제1호분 벽화의 제작시기가 최분(崔芬) 묘(墓) 벽화제작의 연대인 551년과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로 6세기 중엽 경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파리 제1호분의 벽화는 최분 묘보다 약간 고양(古様)으로 최분 묘보다 시기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동일 계통의 분본(粉本)이 남조(南朝)에서 동위, 북제(北齊)로 전해지는 것보다 빨리 고구려에 전래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동위, 북제보다 늦게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목도와 동일한 양식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이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시간적으로 접근한 최분 묘와 진파리 제1호분과의 선후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나, 이 책에서는 일단 진파리 제1호분의 조영연대를 550~560년 경으로 두고자 한다. 그렇다고 볼 때 만약 진파리 제1호분을 왕릉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그 피장자의 제1후보로는 양원왕(재위:545~559년)이 된다. 그러나 선대인 안원왕(545년 沒)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므로 왕릉임을 감안할 때의 피장자를 결정하는 최종판단은 자료가 더 발견된 후에 행해져야 할 것이다.
圖 20_아리미쓰 교이치의 자료(❶ 진파리 제1호분 문부 서벽 무인 스케치 ❷ 진파리 제1호분 문부 동벽 무인 스케치)
진파리 제1호분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그 벽화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고분이다. 또한 묘지(墓誌) 등 기년명이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으나 묘지명(銘)을 동반한 중국 북조(北朝)시기의 벽화묘에 의해 어느 정도 좁혀서 절대연대의 추정이 가능하고 벽화고분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 고분편년에 있어서 중요한 고분으로 사료된다.
또한 진파리 제4호분의 벽화는 옛날에 행해진 도굴에 의해 잔존상태가 매우 나쁘나 연도의 좌우에 그려진 연지도(蓮池圖)에 보이는 수목의 표현은 진파리 제1호분 수목도(樹木圖)에 비교해 보다 사실적이어서 진파리 제1호분보다는 약간 시기를 내려 보는 것이 가능한데 그 연대는 진파리 제1호분에 뒤이은 6세기 제 3/4기에 조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구에서는 주변 제 지역의 회화자료와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주창되고 있고(박아림, 2009) 또한 그 편년연구에 있어서는 벽화의 내용이나 양식연구가 중요하다고 지적되고 있는데(김진순, 2009), 진파리 제1호분의 예로 본다면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에 있어서는 고고학뿐만이 아니라 미술사학의 학술적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재인식된다. 특히 최근에는 미술사학에서의 접근도 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진이나 모사가 한 장이라도 더 많이 공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이 그 일조를 담당하기를 바란다.
아리미쓰 교이치는 일본이 패전한 후의 혼란기에 한국의 국립박물관 개설준비에 협력하기 위해서 그대로 머물렀고, 다음 해인 1946년에 호우총, 은령총의 발굴조사에 협력한 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얼마 안 되는 조사 관계자료를 간신히 가지고 갔다. 이것은 자신이 발굴조사에 관여했으면서도 미보고인 채로 남아 있던 고분 등이 있어서 그에 관한 보고서를 간행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발굴조사도 ‘도굴(私掘)’(有光敎一, 藤井和夫, 2002, 17쪽 주 8)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해서든 발굴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소지한 물건만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허락된 와중에 고생고생하며 가져온 자료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자료는 그중 일부이다. 얼마되지 않는 자료 중에서 진파리 벽화고분 조사관계의 일부를 찢은 것이 몇 장 발견되었다(圖 20).주 002
각주 002)
‘4호분’이라고 적혀 있으나 ‘1호분’의 오기다.
닫기
아리미쓰 선생의 노고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 각주 001)
    내리(內里) 제1호분은 도굴에 의해 파괴가 심하나 현실 북벽에 현무의 일부와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하며 사신도와 함께 소나무와 운문을 그리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진파리 제1호분과 가깝다고 본다(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1990, 238쪽). 또한 이를 근거로 내리 제1호분은 진파리 제1호분의 예와 매우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김진순, 2009, 39쪽). 그러나 현재까지 공간된 자료에 의하면 내리 제1호분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발굴조사보고에서도 북벽에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형상을 그리고, 거기에 머리 부분과 사족을 붙였으며 더우기 뒤엉킨 긴 뱀이 늘어선 형상을 살펴볼 수도 있는데 현무의 세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뱀의 머리도 불명확하다’라고만 되어 있으므로(有光敎一, 1937, 22쪽)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기술은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02)
    ‘4호분’이라고 적혀 있으나 ‘1호분’의 오기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발문(跋文)을 대신하여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