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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현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소재한 전 동명왕릉 부근에 위치하는 진파리 고분군 중 제1호분, 동 제4호분은 1941년 5월에 구(舊)일본 육군의 연습 중에 발견되어 같은 해 6월에 긴급히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진파리 고분군에 대한 최초의 학술조사였다(圖 1, 圖 2).
그러나 6월이 끝나갈 무렵으로 곧 장마에 돌입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일단 조사를 중단하고 같은 해 가을인 9월~10월에 제1호분과 제4호분에 대한 보충조사와 함께 제3호분, 제7호분, 제9호분의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던 중에 전 동명왕릉 주변지역 정비작업을 실시해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고구려 와요지를 발견했고 청동기시대 주거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주 001
각주 001)
‘옆에 있는 밭 안에서 고구려 기와의 요지가 발견되어’라고 되어 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小泉顯夫, 1942, 14쪽). 혹은 정릉사지 일대에 산포되어 있던 고구려 기와를 와요지가 있었던 것으로 오인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小泉顯夫가 남긴 저서에는 진파리 고분군에 대한 2차에 걸친 조사내용을 구별하지 않고 기술한 것이 보이는데(小泉顯夫, 1942, 1986) 진파리 벽화고분의 조사에 관한 혼란스러운 정보유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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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분과 제4호분은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고분으로 이 발견은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관심도 높았다. 그래서인지 6월의 조사 종료 후, 겨우 10일 뒤인 7월 8일에 잡지 『녹기(綠旗)』 주체의 좌담회가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사회로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출석해 행하였다(小川敬吉 他, 1941). 또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한 상세한 소개 기사가 같은 해 9월 1일에 발행된 여행잡지 『문화조선(文化朝鮮)』에 게재되어 있다(小泉顯夫, 1941).
당시 고구려고분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높아 진파리 벽화고분의 보고서 간행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에 의하면 1942년 10월 24일에 요네다 미요지가 죽은 뒤 전 동명왕릉의 조사에 관해 평양 쪽에서 기념출판의 계획이 있었다고는 하나(藤田亮策, 1942:17) 발간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圖 1_평양부 부근 지형도
圖 2_진파리 고분군 분포도
보고서가 조사 후 신속히 간행되지 못했던 이유로서는 요네다 미요지의 죽음에 의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지만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의 재정사정의 절박함과, 그 해 12월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긴박한 상황에서 조사나 정리경비와 물자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에서의 일본인에 의한 발굴조사 보고가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 간행된 적은 없었다.
조사 참가자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리된 소개는 앞에서 밝힌 2개의 잡지 이외에도 일본의 패전 후에 아리미쓰 교이치가 개설서(有光敎一, 1970, 1972) 등에서 다루고 있고, 고이즈미 아키오가 회고록(小泉顯夫, 1986)에서 다루고 있는 이외에는 없다.
이 밖에는 조사의 총괄적인 입장이었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에 의해 간단한 설명문과 벽화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Umehara, Suyeji, 1952;梅原末治·藤田亮策, 1966).
한편 광복 후에 진파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연구자에 의해 실시되었다. 우선 1961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의 손에 의해 재조사가 행해졌고(전주농, 1963), 이후 1974년에는 전 동명왕릉을 포함한 진파리 고분군이 김일성종합대학의 손에 의해 발굴, 재조사가 이루어져 보고서가 간행되었다(김일성종합대학, 1976).
최근 필자 등은 아리미쓰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 중 1941년 7월 19일에 개최된 경성고고담화회 제6회례회의 기록인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좌담회」를 소개했다(有光敎一·藤井和夫·朱洪奎編, 2008). 내용은 1941년 6월에 조사된 진파리 벽화고분 제1호분 및 제4호분에 관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해 가을에 실시된 계속조사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위에서 말한 것이 현재까지 출간된 1941년 실시된 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에 관해 기재되어 있는 주요 간행물인데, 조사기간에 대해서조차 차이가 있어주 002
각주 002)
조사기간에 관한 다양한 기술이 있고 조사 참가자에 관해서도 혼란이 보인다. 小川敬吉는 ‘(前略) 6월 17일부터 10일간’이라고 밝히고 있다(小川敬吉他, 1941, 84쪽). 그러나 小泉顯夫는 ‘5월 중순 (中略) 神保부대의 부대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中略) 우리들은 (中略) 6월 1일을 기해 해당 고분의 조사에 착수했다’(小泉顯夫, 1941, 57쪽)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前略) 6월 15일 米田군과 함께 현장에 도착, 동명왕릉의 齊館을 숙소로 해 조사를 개시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小泉顯夫, 1942, 13쪽).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는 ‘(前略) 昭和 16년(1941년) 5월의 반이 지났을 무렵, (中略) 神保부대가 中和 방면에서 연습하던 중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에 있는 동명왕릉 (中略) 부근 일대에 산재한 고분군 중에서 도굴되어 입구가 열려 있는 고분이 있는데 훌륭한 벽화가 남아 있으므로 급히 와 주길 바란다’라는 전언을 받고 ‘다음 날 경성에 전화해 藤田 박물관 주임에게 이에 관해 차례로 보고해 양해를 구하고 거기를 (中略) 발굴조사는 5월 하순부터 실행에 옮겨졌다’라고 기술하고 있다(小泉顯夫, 1986, 353~355쪽). 이처럼 동일인에 의한 기록이지만 틀린 것이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아리미쓰의 조사보고에서는 6월 16일부터 29일까지 시행되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공식적인 조사기간으로 생각된다. 또한 가을에도 보완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조사기간은 확실하지 않다. 조사참가자는 米田美代治, 澤俊一, 有光敎一, 小川敬吉, 小泉顯夫, 小場恆吉, 小野忠明, 蔡秉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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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유구의 실측도조차 전부 소개되지 않은 상황이다.주 003
각주 003)
당시의 석실 실측도 일부는 불충분하지만 이미 소개되어 있다(小川敬吉他,1 941;有光敎一,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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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장에서는 아리미쓰 교이치의 수중에 있던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 경성고고담화회 제6회례회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좌담회」, 『낙랑고분 발굴품 및 고구려 고분벽화모사 특별전관안내』를 약간의 해제를 더해 번역해 소개하고자 한다.

  • 각주 001)
    ‘옆에 있는 밭 안에서 고구려 기와의 요지가 발견되어’라고 되어 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小泉顯夫, 1942, 14쪽). 혹은 정릉사지 일대에 산포되어 있던 고구려 기와를 와요지가 있었던 것으로 오인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小泉顯夫가 남긴 저서에는 진파리 고분군에 대한 2차에 걸친 조사내용을 구별하지 않고 기술한 것이 보이는데(小泉顯夫, 1942, 1986) 진파리 벽화고분의 조사에 관한 혼란스러운 정보유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조사기간에 관한 다양한 기술이 있고 조사 참가자에 관해서도 혼란이 보인다. 小川敬吉는 ‘(前略) 6월 17일부터 10일간’이라고 밝히고 있다(小川敬吉他, 1941, 84쪽). 그러나 小泉顯夫는 ‘5월 중순 (中略) 神保부대의 부대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中略) 우리들은 (中略) 6월 1일을 기해 해당 고분의 조사에 착수했다’(小泉顯夫, 1941, 57쪽)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前略) 6월 15일 米田군과 함께 현장에 도착, 동명왕릉의 齊館을 숙소로 해 조사를 개시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小泉顯夫, 1942, 13쪽).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는 ‘(前略) 昭和 16년(1941년) 5월의 반이 지났을 무렵, (中略) 神保부대가 中和 방면에서 연습하던 중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에 있는 동명왕릉 (中略) 부근 일대에 산재한 고분군 중에서 도굴되어 입구가 열려 있는 고분이 있는데 훌륭한 벽화가 남아 있으므로 급히 와 주길 바란다’라는 전언을 받고 ‘다음 날 경성에 전화해 藤田 박물관 주임에게 이에 관해 차례로 보고해 양해를 구하고 거기를 (中略) 발굴조사는 5월 하순부터 실행에 옮겨졌다’라고 기술하고 있다(小泉顯夫, 1986, 353~355쪽). 이처럼 동일인에 의한 기록이지만 틀린 것이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아리미쓰의 조사보고에서는 6월 16일부터 29일까지 시행되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공식적인 조사기간으로 생각된다. 또한 가을에도 보완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조사기간은 확실하지 않다. 조사참가자는 米田美代治, 澤俊一, 有光敎一, 小川敬吉, 小泉顯夫, 小場恆吉, 小野忠明, 蔡秉瑞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당시의 석실 실측도 일부는 불충분하지만 이미 소개되어 있다(小川敬吉他,1 941;有光敎一, 1970).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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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