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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897년 나라현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유적답사나 유물 채집에 관심이 있었으며, 교토대학 문학부에서 1917년부터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에게 고고학을 배웠으며 나라고등사범학교(나라여자대학의 전신)의 조수(助手)가 되었다. 그 후 1921년에 금관총이 발굴되면서 신라 유적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총독부 학무국에 고적조사과가 신설되자 당시 궁내성의 제능료(諸陵寮)에서 근무하던 후지타 료사쿠와 함께 1922년 3월부터 경성으로 건너가 고적조사과의 촉탁으로 사령받아 일하면서 총독부 박물관의 일도 겸하였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정리하고 1922년에는 『남조선(南朝鮮)의 한대유적(漢代遺蹟)』을 후지타 료사쿠, 우메하라 스에지와 함께 발간했다.
그는 1924년에 실시된 평양에서의 낙랑 고분 조사작업에 참가하였는데 동년 11월에 지방재정 축소정책으로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과가 폐지되어 다른 직원들이 면직처분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혼자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그 후 1925년에 실시된 석암동 205호(왕우묘)의 발굴조사에 참가하였으며 1926년에는 경주에서 스웨덴의 황태자가 일시 참가하여 주목을 모았던 서봉총을 발굴을 주도했다.
1931년에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자 평양연구소에서 조사활동을 수행하였으며 1934년에 평양박물관이 창설되면서 관장이 된다. 평양에서는 장안성과 나성, 청암리 사지와 원오리 사지 등 고구려 유적의 조사에도 참가한다. 그가 서봉총에서 발굴한 금관을 빌려다 기생에게 씌워서 물의를 일으킨 것도 평양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해방 후 아리미쓰 교이치와 마찬가지로 1년간 평양에 남아 박물관과 고적조사와 관련된 인수인계 작업을 수행하다 가족을 데리고 평양을 탈출하여 곡절을 겪으며 삼팔선을 넘어 부산까지 도착한 다음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 과정에서 채협총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촬영한 영상물을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해방 정국에서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수집가들이었던 시바타[柴田], 토미타[富田], 모로오카[諸岡] 등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접수하여 당시의 평양박물관에 격납해 두었다 하였는데, 이 중 모로오카는 상당수의 고구려 유물을 소장하던 사람이어서 향후 추적조사가 필요하다.
1957년에는 나라국립박물관의 학예과장이 되고 1962년에는 텐리[天理]갤러리의 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하마다 고사쿠의 당부처럼 연구자로서,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고 최후까지 조선의 문화재를 지켜냈다고 자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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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