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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3년 8월에 오사카부[大阪府] 미나미가와치군[南河内郡] 후루이치촌[古市村, 現 羽曳野市]에서 태어났다.
圖 1_우메하라 스에지
1913년에 도시샤보통학교[同志社普通學校, 現 同志社高等學校]를 졸업하고 병약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지만 1914년에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과대학(文科大學)의 진열관(陳列館) 조수(助手)가 되어 하마다 고사쿠[賓田耕作]의 지도를 받으면서 유물의 정리와 관리를 맡게 된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유적답사와 유물수집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체득한 실측과 탁본 실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1921년에 경주에서 금관총의 매장주체부가 드러나 무수한 황금유물이 출토되자 일약 연구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는데, 우메하라는 하마다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위원이 되어 금관총 출토유물의 정리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한반도에서 수많은 고적조사 사업에 관여하게 된다. 1925년부터 3년 4개월에 걸쳐 유럽과 아메리카에 유학하게 되는데, 이 역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우메하라에 대한 하마다의 배려로 보여져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하마다가 우메하라에 보인 애정의 크기를 알게 한다. 우메하라가 현장에서 직접 정리하여 작성한 금관총 보고서를 포함하여 다수의 고적조사 보고서에 하마다의 이름이 공저자로 올라 있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서 설명할 수 있다.
1929年에는 동방문화학원 교토연구소[東方文化學院 京都硏究所, 지금의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의 소원(所員)으로 임명되면서 문학부의 강사가 되어 고고학을 지도했다. 1933년에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조교수가 되어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를 대신하여 고고학 강좌를 맡게 되었고, 1939년에 교수로 승진하였다. 1948년에는 교토대학의 평의원이 되고, 1956년에는 명예교수가 된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다수의 조선고적조사에 참가하였으며 보고서 작성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는데, 특히 유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실측도의 작성과 탁본과 꼼꼼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러한 유물관찰 기술과 실측도 작성법은 일찍이 고적조사를 주도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확립한 것인데,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즉 건축한 전공자로서 설계도와 도면 작성에 능했던 세키노가 한반도에서 고적조사를 실시하면서 완성시킨 고적과 출토유물의 기록법을 전수받은 것은, 도쿄대학의 연구자가 아닌 교토대학의 교원이 된 우메하라 스에지였고 그 기술은 교토대학 고고학연구실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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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