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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오바 쓰네키치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는 1878년 1월 25일 아키타[秋田]현 아키타시에서 태어나 1958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호는 유처(幽處)인데 1903년에 도쿄미술학교 도안학과를 졸업하고, 이바라기현립 다케가자키 중학교, 아키타현립 아키타공업학교에 근무하였다. 1908년에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조수가 되었는데 1912년에 조교수로 승진한 전후에 세키노 다다시의 권유로 한 번씩 평양에 출장하여 고구려 벽화고분의 실측과 모사를 담당하게 된다. 1916년에는 낙랑 고분의 조사와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와 모사작업을 위한 현지 출장이 어려워지자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거주지를 경성으로 옮긴 다음 각종 고적조사사업에 참가하였다(出版科學硏究所, 1987).
圖 1_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
1912년에 세키노를 보조하여 강서삼묘를 실측하고 벽화를 모사했으며, 1913년에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수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도우면서 벽화를 모사하였다. 쌍영총과 안성리 대총, 화상리 성총과 대연화총의 벽화를 모사한 것도 1912년인데 당시의 모사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예술대학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1916년에 ‘고적조사’와 관련된 법령이 지정되면서 그 첫 사업으로 평양에서 낙랑 고분 10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오바 쓰네키치는 현장조사에도 참가하였다. 그가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 것은 당시 대학에서 조사를 위한 장기간 출장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직접 조사한 고분은 정백동 1호, 3호였는데,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중요유물과 칠기의 실측작업을 전담하며 자신의 특기를 충분히 발휘하였다. 특히 석암동 9호에서 출토된 칠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명문칠기를 처음 발견하였는데, 이후 낙랑 고분의 발굴에서 기년명 칠기에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년명 칠기는 낙랑 고분의 편년을 정하는 기준을 마련하여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유효한 낙랑 고분 편년 지표로 활용되기 때문에 그 학사적 의의는 크다. 1916년에는 평양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에도 관여하여, 대성산성 일대의 고분군, 순천군의 천왕지신총, 그리고 만달면에 산재하는 고구려 고분의 간이 조사와 석실 실측작업에도 참가하였다.
1917년에는 황해도 봉산군과 순천군을 답사하고 압록강 양안을 오가며 용호동, 덕암동, 만호동, 사장리, 신천동, 유수림자 등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답사여행에 참가하여 다수의 실측도를 작성하였다(정인성, 2009). 같은 해에는 능산리 백제 고분의 조사와 고분벽화의 모사를 담당하고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고분의 발굴조사에도 참가하였다. 특히 실측도와 벽화 모사도 작성에 종사했던 오바[小場]가 1916년도부터 현장 발굴조사에도 관여하게 되는 부분이 주목된다. 이는 당시 고적조사를 주도하던 세키노 다다시의 특별한 배려와 벽화모사를 하면서 쌓은 현장 경험의 덕분으로 여겨진다.
1923년에는 경상북도 경주와 영천 금호동, 천군리 동서탑, 불국사 등을 답사하고 경주 남산 불적에 대한 예비조사를 실시하였다. 경주 남산의 불적을 조사하고 평양에서 낙랑 고분에 대한 조사사업에 참가하여 석암리 200호의 발굴을 전담하였지만, 이 해에 행정조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해임되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고적조사사업에서 그 역할이 약간 줄어들었지만 세키노의 도움으로 도쿄예술대학의 강사로 발령받아 출장 형식을 빌어서 고적조사사업에 계속 참가한 사실이 확인된다. 1925년에 도쿄대학 문학부의 주최로 실시된 석암리 205호 왕우묘 발굴조사에서는 매장주체부의 실측과 칠기를 포함한 중요 출토유물의 실측도 작성을 전담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후 1928년까지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분포도 작성에도 관여하였으며, 1929년에는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의 정리작업과 실측을 위해 출장하기도 했다. 이때 강서삼묘의 벽화를 전체적으로 다시 모사하였다. 또 오야리 18, 19, 20호를 발굴조사하였지만, 특기할 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1931년에는 낙랑 채협총 발굴조사에 참가하고, 1932년에는 낙랑 왕광묘의 발굴에 종사하여 많은 수의 칠기를 정리하고 실측도를 작성한다. 1933년에는 정백리 13, 17, 59호를 발굴하고, 1934년에도 낙랑 고분조사에서 중심 조사원으로 활약하였다. 물론 1935년에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현지조사에도 동행하여 도면작성 임무를 담당하였다. 1937년에는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전면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보고서에 실린 거의 모든 도면을 오바가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평양 인근의 임원면 고산리에서 5기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하였고 대보면과 서기리에서도 고구려 고분을 조사하고 도면을 작성하였다. 1941년에 실시된 진파리 고분의 발굴조사에도 참가하여 1호와 4호를 정리하고 벽화를 직접 모사하였다.
이처럼 오바는 경주 남산의 불적조사에도 관여했지만 주로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벽화고분과 낙랑 유적의 조사를 담당하였다. 이는 도쿄미술학교에서 조교수까지 지낸 그의 재능을 배려한 세키노 다다시의 안배라고 판단된다.
오바는 광복 후 1946년에 다시 도쿄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도쿄미술학교는 현재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이다. 퇴임 후에도 닛코[日光]의 도쇼구[東照宮] 수리에 참가하고 우치의 평등원 봉황당 문양을 모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가 한반도에서 실시한 고적조사 과정에서 남긴 다양한 자료는 현재 일본 각지에 분산·보관되어 있다. 그중에서 도쿄예술대학에 보관되었던 낙랑 고분 출토의 칠기 모사도는 그의 후손이 최근 사진첩으로 묶어서 공개한 바 있다(小場恒吉,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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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 쓰네키치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