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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905년의 집안 조사

한편 도리이가 집안을 조사한 것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만주, 즉 중국 동북지방을 완전히 손에 넣은 1905년이다. 당시 군경의 도움을 받은 도리이는 요동(遼東)의 여러 곳을 답사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집안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德島縣立博物館, 1993).
도리이는 그의 수기(手記)에 1905년의 만주 조사와 관련된 사항을 정리해 두고 있다. 여기에는 그가 만주를 다시 답사하기 전인 3월에 만주에서 육군 관련의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 도쿄대학의 인류학 교실을 방문하여 요동에서 채집한 토기를 보여준 일이 적혀 있다. 이것이 만주 답사를 다시 마음 먹은 계기라 하였으나 실제의 조사에서는 집안 답사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鳥居, 1953). 물론 1895년의 조사에서는 선사토기를 전혀 확인하지 못했던 터라 일본 민족의 기원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도리이가 흥미를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학문적 욕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1895년의 조사에서 선사토기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일본의 죠몬토기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사 과정에서 일본의 죠몬토기와 닮은 문양을 가진 토기만을 발견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 지역의 문양 없는 선사토기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鳥居, 1953).
그러던 즈음 마침 도쿄제국대학은 러일전쟁으로 확보한 만주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교원을 요동으로 파견할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곧장 실행에 옮겨져 문과대학에서 이치무라, 공과대학 건축학 연구실에서 이토츄타, 그리고 이과대학에서는 이미 만주에 대한 조사 경험이 있는 인류학교실의 도리이를 파견하게 된다. 러일전쟁 직후에 국가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제국대학의 학자들을 만주에 파견한 것을 보면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제국을 꿈꾸던 일본이 무력으로 획득한 만주지역에 대한 기초 조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9월에 도쿄를 떠난주 001
각주 001)
「滿洲調査復命書」에는 8월 8일에 도쿄대학의 명령으로 도쿄을 출발하여 동월 18일에 대련에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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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은 우시나[宇品]에서 같은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는데, 대학의 교원이 된 도리이에 대한 대우는 1895년주 002
각주 002)
1895년의 조사에서는 특별한 직위가 없었기 때문에 요동에 도착할 때까지 갑판으로 나올 수도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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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사뭇 달랐다(鳥居, 1953).
요동에 도착한 도리이는 10년 만에 러시아 풍의 도시로 바뀐 여순의 면모에 놀라며 일본이 접수한 요동지역을 본격적으로 답사한다. 당시 그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만주 민족의 인종학적인 연구였는데 이를 위하여 체질과 언어, 토속과 심성을 집중 조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대의 각종 유적과 전세 유물을 조사하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유적과 고고유물에 대해서도 조사를 병행하는 등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실로 다양했다.
그가 요동에서 가장 먼저 조사한 곳은 석기가 출토되었다는 보란점 주변의 유적이었다. 여기에서 석기와 각종 토기를 채집한 도리이는 1895년에 문양전을 채집했던 웅악성을 다시 방문하였는데(鳥居, 1953), 조사 당시 여전히 이들 유물을 고구려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장춘(長春)까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도리이는 1895년 때보다 더 넓은 지역을 조사할 수 있었다. 1903년에 러시아가 설치한 철도를 이용하여 심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전쟁을 끝낸 일본군 사령부의 주둔지가 설치된 곳이었다. 도리이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정해진 숙소에서 체재하며 그들의 지시로 청령궁(淸寧宮) 등의 유물을 조사하였다(鳥居, 1906). 심양의 청령궁에서 청대(淸代)의 각종 문서와 소장품을 조사한 도리이는 흥경으로 조사지를 옮겨 비슷한 성격의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였다.
그 후 다시 심양으로 돌아온 다음 드디어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결심한다. 고구려 유적이라고 해도 그 중심은 광개토대왕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884년도에 일본군 장교였던 사카와 가케노부가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하면서 촉발된 일본 내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특히 1889년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성과인 『회여록(會餘錄)』이 발간되면서 집안 고구려 유적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논쟁도 학계에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도리이의 집안 조사를 도운 것은 주둔군 장군이었던 가와무라[川村]와 고급 부관인 미우라[三浦] 대좌였는데, 그들은 집안으로 가는 방법을 상세하게 일러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호위군인은 물론 통역과 중국인 마부까지 지원받고 중국 마차에 군에서 마련해 준 1개월 분량의 식량과 짐을 싣고 흥경을 출발하였다. 도리이는 여행 도중에 흥경과 통화 사이의 지리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통화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회인(懷仁, 환인)과 통화 사이는 그들이 말하는 비적(匪賊)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호위군인과 함께 조사단이 통과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중국인이 모여들어 행동을 같이했다(鳥居, 1953). 통화에서 백두산의 지맥에 해당하는 험준한 고개를 넘어 압록강으로 나오는데 3일을 소비한 도리이는 압록강을 따라 내려와 집안에 도착해서 3일간에 걸쳐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다(鳥居, 1909).

⊙ 광개토대왕비

도리이가 처음으로 집안평야의 광개토대왕비 앞에 섰을 때, 이미 비석에는 탁본을 만들기 위한 나무 발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유명세를 탄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 수시로 작성되고 있었던 정황을 잘 말해 준다. 그는 비석의 단면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왜곡이 있음을 지적하고 석갈(石碣)이나 선돌로 부를 수도 있다고 하였다(鳥居, 1953).
1909년의 강연을 옮긴 글(鳥居, 1909)에는 당시의 간단한 조사보고가 실려 있는데 이를 부분적으로 정리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의 고비는 하나의 긴 사각형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는데, 높이는 2丈정도이고 폭은 정면이 5척이며 그 오른쪽은 폭이 4척 8촌, 왼쪽은 5척, 후방이 6척 5촌으로, 비의 臺石은 땅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을 알 수 없다. 정면은 압록강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큰 돌을 여기까지 운반한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 동 비문 중에 “永樂五年, 歲在乙未……”라고 적힌 부분을 참고하면 지금의 鴨家河[모아강] 부근에서 人馬를 사역하여 끌어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羊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겠지만 지금으로 보면 이상하다. 오른쪽의 大塚에 마주하여 이 大石碑가 서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가장 조화롭다. 고구려 연구에는 이 古墓와 비석을 따로 떼어 살핀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조사 당시 도리이는 광개토대왕비를 태왕릉과 관련시키고 있음이 주목된다.
한편 광개토대왕비를 기술하기 전에 고구려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주목되는데, 이미 조사 전의 선행연구를 통해 신묘년 기사를 일본이 한반도로 건너와 고구려와 대등하게 전쟁을 치른 관계로 이해하며, 아울러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까지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鳥居, 1909).
이러한 사실은 도리이가 당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집안지역을 기어이 조사한 동기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 집안의 고구려 고분

광개토대왕비를 본 다음에는 장군총을 답사하고 주변의 고분을 둘러본 정황이 수기(手記)에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의 조사에서 고구려 고분을 1,300기까지 확인했는데 자세히 조사하면 1,400~1,500기의 고구려 고총이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鳥居, 1953).
또한 도리이는 집안의 고구려 무덤을 토총과 석총으로 나누고 석총은 평면 원형인 것과 방형인 것으로 구분하였다(鳥居, 1909). 그중 피라미드 형의 장군총이 가장 크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군총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7단의 무덤인데 위에서 3단째에 석곽이 있고, 그 속에는 2개의 석관이 존재한다. 이 석관을 만든 돌은 석회암처럼 보인다. 이 두 개의 석관은 깨진 상태이다. 이 두 개의 석관은 왕과 왕비의 것일 것이다. 석곽 내벽을 쌓는 방법은 일본의 고분과 많이 달라서 아주 규칙적이고, 화강암을 연마한 것처럼 아주 훌륭하게 조립하였다. 그리고 무덤은 이미 말한 것처럼 전부 화강암으로 쌓았는데, 이 석단이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아래에 지탱석을 두고 있다. 이 무덤을 위에서 보면 큰 상자를 아래에 두고 점점 작은 상자를 포개 쌓은 것 같다. 그 위쪽에는 기와를 얹은 집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포목이 있는 와편이 있다. 이 커다란 고분은 일본에서는 도저히 볼수 없는 형태이다.
태왕릉 주 003
각주 003)
도리이는 이를 태왕릉이라 하지 않고 장군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리이가 조사할 당시 현지인들은 지금의 장군총과 태왕릉을 모두 장군총이라 부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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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장군총이라고 불리는 고분이 있는데, 지금 무너져서 형태를 충분이 알지 못하지만 그림과 같은 것이다. 앞의 고분과 비교하면 그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그 하부에 커다란 돌을 세워 놓은 것은 여러 단으로 쌓은 돌이 무너지지 않게하게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윗부분의 석곽은 앞의 고분과 비슷하다. 그렇게 보면 이 장군총이라는 것은 원래 앞의 것과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위 석곽의 횡단면을 보면 도면과 같다. 폭은 4척 8촌, 길이는 1장 5척, 이 (석곽)벽의 조립형태도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잘 보인다. 이런 종류의 무덤도 그 속은 흙과 작을 돌로 이루어져 여기에 화강암을 층층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무덤에서 2~3丁정도 떨어진 곳에 고량밭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위가 7척이고 8각으로 된 대석이 있다. 이 부근을 조심스레 살피면 오래된 기와가 발견된다. 이곳은 옛날 殿堂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는 회백색의 토기와 같은 파편이 많이 산포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주목해야 될 것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전이다. 그것은 육군인 모씨가 도쿄제실박물관에 기부한 것인데, 이 塼에는 “願大王之墓安如山固如丘”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호태왕 무덤의 묘명인 것으로 보이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이것이 이곳에서 나왔는지 앞의 무덤(지금의 장군총)에서 나왔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두 개의 무덤 중에서 하나가 호태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충분이 증명되었다 할 수 있다.
 
우선 장군총의 상부에 기와집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과, 장군총과 지금의 태왕릉 중 하나가 호태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판단한 최초의 연구자가 도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왕릉에서 가장 먼저 채집된 기와를 군인이 도쿄제실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도 주목되는 바이며, 현지에서 기와를 채집한 정황은 확인되지만 도리이가 스스로 명문전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러한 대형 무덤이 고구려의 능묘(陵墓)라 판단하고 이를 문헌사가와 같이 연구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圖2_도리이 조사단이 그린 장군총 석실 단면(갓을 쓴 조선 사람을 그려 두었다)
圖3_장군총 배총 약측도(鳥居, 1909에서 전재 - 이하 동일)
圖4_도리이 조사단이 그린 태왕릉
圖5_기단식 토총
圖6_연통형 고분
圖7_횡혈식 토총(봉토분)
圖8_수혈식 토총(봉토분)
圖9_도리이가 장군총 배총과 비슷하다고 여긴 탁자식 지석묘
한편 하부에 기단을 가지나 상부가 봉토인 형태의 무덤을 일본의 고분과 유사하다하고 그중 하나를 도면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지금 집안 현지의 어떤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조사 당시 이미 파괴(도굴)되어 석곽 입구가 반 정도 노출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장군총의 배총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圖3 참조)하고 있는데, 이를 유럽의 스톤헨지와 비교하였다. 그 형태를 기술한 다음 전방의 장군총과 다르지만 하부 형태는 닮았다고 하였으며 장군총을 간략화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상석의 아래 부분 주연(周緣)을 따라 홈(圖3 참조)이 있음을 지적하고 문을 설치하거나 비가 내부로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라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도리이가 이를 요동과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지석묘와 관련지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요동반도의 절목성(折木城) 부근에서 그가 발견한 탁자식 지석묘의 도면을 게재하여 배총과 비교하고 있는 것(圖9 참조)이다.
이미 요동반도에서 탁자식 지석묘를 관찰한 경험이 있는 도리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고고학에서 실물자료에 대한 관찰경험이 새로운 자료를 해석하는 데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를 역설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키노가 1909년에 평양에서 처음으로 전실묘를 조사하고 이를 고구려 무덤이라고 판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 자연돌로 벽석을 만들고 천장을 2장의 판석으로 덮은 횡혈식 석실을 소개하고(圖7 참조) 이것이 일본의 고분과 가장 유사하다고 하였다. 또한 입구가 두 군데이지만 천장석을 같은 뚜껑돌로 덮은 고분을 소개하고 이는 석재 부족이 원인이라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석실의 면적이 좁지만 천장이 매우 높은 고분(圖6 참조)을 발견하고 이를 연통형 고분(煙筒形古墳)이라고 이름지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도리이가 설명하는 고분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분류된 고분은 집안 뿐만이 아니라 압록강을 따라 그 하류와 환인까지의 사이에도 많다고 한 것을 보면 집안조사 후의 귀로(歸路)에서도 많은 고구려 고분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안의 여러 곳에서 각종 건물지를 확인하고 초석과 유물이 산란되어 있던 곳에서 와전편을 채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길을 이용하여 흥경으로 돌아간 도리이는 가와무라 장군과 미우라 부관에게 인사를 하고 심양으로 돌아가 그 주변을 다시 조사하였다.
그 후 요양에 들러 백탑(白塔) 등을 조사하던 도중에 근처 군병원의 이토[伊藤] 군의관이 찾아와서 병원 부지 옆에 벽돌로 만든 유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곧바로 군의 허가를 얻어 조사한 결과 이것이 전실묘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내부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때 한경(漢鏡)과 토기(土器) 그리고 오수전(五銖錢) 등이 출토되어 요동지역의 전실묘가 한족(漢族)과 관련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이는 학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 요동지역의 전축(塼築) 유구가 고구려가 아니라 한(漢)문화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전 웅악성과 요동의 각지에서 채집한 문양전도 고구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경험은 세키노 다다시가 1909년에 발굴한 평양의 석암리 전실묘를 고구려 고분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비판하고, 이를 한(漢, 낙랑군)과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경험 증거가 되었다(정인성, 2006).
圖10_요양에서 전곽묘를 조사하는 도리이(오른쪽 끝)
그 후 1907년에는 프랑스의 중국 학자 샤반느가 집안을 방문하여 조사하고 관련 유적의 내용을 보고하였다. 이때의 조사내용은 「북지나고고도보(北支那考古圖譜)」에 수록되었는데, 최근 서길수가 그 내용을 꼼꼼히 정리하였다(서길수, 2006). 다만 서길수는 1907년에 샤반느가 촬영한 집안의 고구려 고분과 광개토대왕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하였으나(서길수, 2006)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1905년에 도리이가 촬영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주 004
각주 004)
1896년의 조사에서는 카메라를 사용한 기록이 없고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904년의 대만 조사에서 학교에 부탁하여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하였으며, 스스로 사용법을 배워 조사에 활용하고 있다. 물론 1905년의 조사에서도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논고의 삽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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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샤반느가 『통보(通報)』에 게재한 논문도, 실은 도리이의 1905년조사 결과보고인 「남만주조사복명서(南滿洲調査復命書)」를 일본 방문 중이던 샤반느가 읽고난 후 인용하겠다는 의사를 도리이를 찾아와 직접 타진했다고 한다(鳥居, 1909). 즉 샤반느의 1907년 조사는 도리이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는 아니지만 이후 1909년에 도리이는 다시 한 번 요동반도를 조사하게 되는데, 이 조사를 통해서 요동지역의 전축 유구가 한문화(漢文化)와 관련있다는 그의 인식은 확고한 것이 된다. 그것은 이 조사에서 조사한 다수의 전실분에서도 한식(漢式)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 각주 001)
    「滿洲調査復命書」에는 8월 8일에 도쿄대학의 명령으로 도쿄을 출발하여 동월 18일에 대련에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1895년의 조사에서는 특별한 직위가 없었기 때문에 요동에 도착할 때까지 갑판으로 나올 수도 없는 처지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도리이는 이를 태왕릉이라 하지 않고 장군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리이가 조사할 당시 현지인들은 지금의 장군총과 태왕릉을 모두 장군총이라 부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가기
  • 각주 004)
    1896년의 조사에서는 카메라를 사용한 기록이 없고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904년의 대만 조사에서 학교에 부탁하여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하였으며, 스스로 사용법을 배워 조사에 활용하고 있다. 물론 1905년의 조사에서도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논고의 삽도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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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집안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