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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안성동 대총(용강 대총)과 쌍영총

1) 조사 경과

안성동 대총과 쌍영총은 용강에서 동방으로 약 590m 정도, 평남철도 진지 동역의 서남으로 약 1,580m 지점에 위치하는데, 안성동 대총이 쌍영총보다 서북쪽 높은 구릉 위에 위치한다. 이 두 고분의 조사는 화상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다음에 실시되었는데 조사 참가자는 세키노와 야쓰이, 구리야마, 이마니시이다. 여기에 오바, 오타, 이와이 등이 벽화 모사와 석실 실측도 작성을 맡았다. 세키노에게 고분의 존재를 소개한 것은 평안남도에서 서기를 하던 야마자키 사부로(山岐三郞)인데 세키노를 현장까지 안내하기도 하였다.
고분의 굴착 작업은 세키노가 현장에 도착하기 수 일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세키노와의 사전 협의 하에 이루어진 것인지 야마자키와 연결되는 제3의 인물이 임의로 굴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안성동 대총과 쌍영총의 조사는 석실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우선 확보하고, 먼저 세키노가 들어가 내부를 관찰한 후 간단한 약측과 소견을 적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이와이는 고분 봉토를 등고선을 넣어서 측량하고 석실 내부의 실측을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분의 벽화는 오타와 오바가 담당하였다.
세키노가 고분 내부에서 야장을 정리한 것은 9월 28일로 적혀 있다. 그런데 화상리 고분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안성동에 도착하여 조사를 시작한 것이 9월 26일이기 때문에 이틀 정도 굴착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기다리거나 주변 유적을 답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2) 안성동 대총(용강 대총)

안성동 대총의 조사는 봉토의 남쪽을 크게 굴착하여 연도 출입구를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圖243). 이는 봉토 상부를 통째로 굴착하여 매장 주체부의 상부를 찾던 한왕묘의 발굴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한왕묘 발굴 이후 연속된 조사 경험에서 고구려 봉토 석실분이 연도를 남쪽으로 낸다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일 것이다. 물론 세키노가 본격적인 조사를 하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도굴범들도 이미 연도의 위치를 일반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성동 대총은 구릉 위에 축조되어 당시 규모가 매우 크게 보였기 때문에 대총(大塚)이란 이름을 얻었다(圖230).
안성동 대총은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이다. 전실에는 남으로 연도가 길게 달리고 현실과는 통로로 연결된다. 전실은 동서로 긴 형태인데 천장을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의 구역은 2단에 걸쳐 고임돌로 모서리를 고이고 천장석을 덮어서 높게 처리하였다. 이는 간성리 고분과 구조상 유사하다(圖232, 241). 전실은 동서가 518cm이고, 남북이 173cm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70cm로 다른 고구려 고분에 비해 대형이다. 전실 벽면 전체에는 석회를 발랐고 천장도 석회 화장으로 마무리하였다.
현실은 수직으로 축조한 네 벽을 어깨 부위에서부터 만곡시키고 그 위에 3단으로 평행내어쌓기하였고, 그 위로 다시 고임돌로 모서리를 2번 죽여 천장 면적을 줄인 다음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현실 역시 전실과 마찬가지로 전면을 석회 화장하였기 때문에 내부 석재는 관찰되지 않았다(圖241, 242). 그 크기는 남북이 392cm, 동서가 324cm이다. 높이는 427cm인데 전실 바닥의 토사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정한 수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확성에는 문제가 있다.
전실 입구의 좌우에는 벽감을 설치하고, 네 모서리에는 기둥과 공포를 그렸다. 공포 위에 들보를 얹고 비스듬하게 걸쳐 놓은 목재를 표현하였다(圖233). 비스듬한 목재 사이에는 측시연화(側視蓮花)가 그려졌으나 박락되어 희미한 상태이다. 전실 천장의 각 구획에는 변형 인동문이 그려져 있다. 전실의 동쪽 벽에는 기둥 위에 걸쳐진 공포의 사이로 3명의 인물이 표현되었는데 박락이 심하다. 고분의 폐쇄 시설은 남아 있지 않으나 현실로 통하는 전실의 북벽 상단 이맛돌에는 폐쇄석을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홈이 관찰된다. 연도가 길게 시작되는 지점에도 폐쇄석의 흔적이 있다(圖241).
한편 세키노가 조사한 당시 현실에는 토사가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관찰 소견은 작성되지 않았다. 세키노는 벽의 박락이 심하여 이렇다 할 벽화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와이가 작성한 석실 실측도도 현실 내부에 토사가 가득 찬 상태로 그려져 있다(圖241). 토사가 찬 상태에서 세키노가 내부 조사를 끝낸 다음에 이와이 등이 작업을 계속하여 석실 내부를 정리하고 실측도를 작성하던 기존의 조사와는 분명 다른 점이다. 안성동 대총(용강 대총)의 현실에 쌓였던 토사를 언제 석실 밖으로 치워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최근 촬영된 사진을 보면 전실의 동벽 바닥에 세워진 석판에 따로 만들어 고정시킨 직사각형의 석비가 관찰된다. 석비는 쇠못으로 고정시키고 고정 구멍의 빈 틈은 하얀 석회로 메웠다. 그러나 세키노의 설명과 야장에서는 이 벽비에 대한 설명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이와이나 오바 쓰네키치의 실측과 벽화 모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석비는 1913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새로 만들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세키노의 야장에는 전실 벽에 그린 측시연화와 변형 인동문이 채색을 곁들여 그려져 있는데 9월 28일에 그린 것이다(圖239).
현재 안성동 대총은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출입구 시설이 폐쇄되고 봉토가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圖246, 247).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도면

圖229_안성동 대총 원경
圖230_안성동 대총 근경
圖231_발굴 전의 안성동 대총
圖231_발굴 후의 안성동 대총
圖232_석실 도면
圖233_용강 대총 내부 투시도
圖234_드러난 입구
圖235_천장부
圖236_전실에서 바로 본 연문
圖237_석실 모서리

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238_용강 대총 조사 기록
圖239_용강 대총 세부 기록

이와이의 실측 측량도

圖240_용강 대총 석실 평면도
圖241_측단면도
圖242_안성동 대총 천장도
圖243_안성동 대총 분구 측량도

오바의 벽화 모사

圖244_안성동 대총 벽화 모사

현재의 용강 대총(田中俊明제공)

圖245_안성동 고분군 위성사진
圖246_쌍영총에서 바라본 안성동 대총
圖247_남쪽에서 본 안성동 대총

3) 쌍영총

쌍영총은 조사 전 이미 봉토의 외형이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분의 내부 구조와 장식은 물론 벽화도 화려했기 때문에 조사자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이와이가 작성한 봉토 측량도를 통해 쌍영총은 연도 입구만을 정확하게 굴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실 실측도에는 조사 시에 봉토 밖에서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표시되어 있다. 고분의 굴착에는 조선인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이들 역시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있다(圖248). 이는 앞에서도 살폈듯이 인부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석실 내부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와이는 2m 간격의 등고선을 넣어서 봉토를 측량하였다(圖270). 간성리 고분, 연화리 대총(용강 대총)과 더불어 봉토의 외형이 가장 정확하게 측량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고적 조사에서 본격적으로 평판 측량이 채용된 것은 1916년도에 실시된 낙랑 고분의 발굴부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미 1913년의 고구려 고분 조사에서 채용되었음이 분명해졌다.
고분의 내부는 전실과 현실로 된 이실묘인데, 양실(兩室)의 연결 통로에 아름다운 기둥이 쌍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쌍영총(雙楹塚)이라 하였다. 전실은 동서 길이가 약 230cm이고, 남북이 225cm이다. 또한 현실은 동서 길이가 약 274cm, 남북 방향의 동벽이 약 299cm, 서벽이 294cm이다. 전실과 현실벽 모두는 약간 내경하는 수직벽에 평행으로 면을 3단이나 줄이고 삼각형으로 모서리를 줄여서 천장석을 덮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벽면과 천장은 모두 석회를 두껍게 발라 면처리하였다. 이와이의 도면을 보면 현실과 전실의 서쪽 벽 중앙에는 석회면이 크게 박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안으로 고분 축조에 사용된 석재가 보인다. 이를 보면 고분은 약간 가공된 돌로 쌓아올린 다음 석회를 두껍게 발라 조정한 것이다. 이는 석실의 동쪽 벽도 마찬가지이다(圖273~276).
전실과 현실 사이에 세워진 쌍기둥은 단면이 팔각형으로 돌 기둥 위에 두껍게 석회를 바른 것이다. 주좌(柱座)와 주두(柱頭)를 표현했으며 전면에 문양을 시문하였다. 전실에 달린 중앙 연문의 바깥쪽에는 천장 양쪽에 둥근 장부 구멍을 내고 바닥에는 한 단 높은 문지방을 만들어 두었다. 즉 쌍영총의 폐쇄는 전실의 연문에서 1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연도의 바깥에서 찍은 사진에는 두꺼운 폐쇄석이 찍혀 있고(圖272), 실측도에는 연도 끝 좌우로 돌출부가 있는데 이 역시 연실 바깥쪽을 폐쇄하기 위한 고안인 것으로 보인다.
연도의 좌우벽에는 여러 종류의 인물 그림을 그려 놓았다. 동벽에는 우차 2량, 갑주를 입고 말을 타는 사람, 다른 기마 인물 2명, 서 있는 인물상의 남녀 30명 정도를 그려 놓았다. 그 중에는 북을 치는 사람도 끼어 있다. 서벽에는 우차·기마·인물 외 30여 명 정도의 사람이 그려져 있다. 현실의 네 모서리에는 공포가 얹혀진 기둥이 서 있고, 그 위로 비스듬히 표현된 목재 사이 사이로 화초가 꽂힌 화병이 그려져 있다. 통로의 쌍기둥이 위치하는 곳 위에는 화병 대신 주작을 마주보게 하였다. 연도에서 전실로 가는 입구의 좌우측에는 역사(力士)를 그려 넣었고, 전실의 동서벽에는 청룡과 백호를 시문했으나 조사 시에는 이미 파손이 심한 상태였다. 남벽의 입구에는 인물의 입상이 있다. 네 벽 모서리에는 기둥을 그리고 그 위에 공포를 나타냈다. 현실 천장의 첫 번째 내어쌓기 면에는 당초문을, 두 번째 내어쌓기 면에는 봉황과 운문(雲文)을 그렸다. 삼각형 줄임의 하단에는 삼족오를 그려 넣었다. 고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천장석의 아래에는 연화문이 크게 그려져 있다(關野1913b).
북벽에는 중앙에 누각을 그리고 안에 부부를 그려 넣었는데 이 무덤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누각에는 부석과 계단 등이 그려져 있다. 부처의 좌우에는 남녀 시자들이 늘어서 있다.
전실과 현실의 천장 중앙에는 연화문이, 현실의 삼각 고임 아래에는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사진과 도면

圖248_발굴 당시 풍경
圖249_쌍기둥
圖250_쌍영총의 인물도(모사도) 1
圖251_쌍영총의 인물도(모사도) 2
圖252_쌍영총의 인물도(모사도) 3
圖253_천장 모서리의 벽화(사진)
圖254_천장의 연화(사진)
圖255_인물도(사진)
圖256_현실 모서리의 벽화(사진)
圖257_삼각고임돌의 벽화(삼족오)
圖258_삼각고임돌의 벽화(사진)
圖259_조사 후 복원 상태
圖260_쌍영총 내부 투시도

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261_세키노의 현장 조사 기록
圖262_세키노의 현장 조사 기록
圖263_쌍영총의 천장 약측도
圖264_쌍영총의 연문 약측도
圖265_쌍영총의 벽화(현실 북벽)
圖266_쌍영총의 벽화(현실 북벽)
圖267_쌍영총의 벽화(입구 측벽)
圖268_쌍영총의 벽화(현실 후벽)
圖269_쌍영총의 벽화 약측

이와이의 측량 실측도

圖270_쌍영총의 분구 측량도
圖271_쌍영총의 평면도
圖272_쌍영총의 천장도
圖273_쌍영총의 측단면도 1
圖274_쌍영총의 부분 실측
圖275_쌍영총의 부분 실측
圖276_쌍영총의 측단면도 2

현재의 쌍영총

圖277_쌍영총의 입구

오바의 벽화 모사도

圖278_현실 남벽
圖279_현실 북벽의 인물
圖280_현실 입구의 쌍기둥
圖281_전실 동벽의 청룡
圖282_전실 벽화와 내부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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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동 대총(용강 대총)과 쌍영총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6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