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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한왕묘의 조사

1) 조사 경과

1911년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 조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왕묘(漢王墓)의 발굴이다. 일명 황제묘, 혹은 한평동 고분이라고도 불리던 고분으로 당시 강동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것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를 경신리 1호라고 부른다.주 001
각주 001)
김형직이 만든 경신중학교가 근처에 있어 행정 구역을 경신리로 바꾸고, 고분도 경신리 1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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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묘는 이미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1909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의 하기노와 이마니시가 굴착 조사를 시도하다 실패한 고분이다. 1909년 형식적으로 한국정부의 촉탁을 받아 평양에서 고적을 조사 중이던 세키노에게 고분의 존재를 알려 준 것은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타와 쇼지(白川正治)였다. 그렇지만 당시 세키노는 다른 조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이 맞지 않아 조사할 수 없었다.
세키노가 한왕묘의 조사를 시도한 것은 1911년 10월 5일로, 현지 관헌의 도움을 받았다.주 002
각주 002)
‘세키노 컬렉션’의 관련 야장에는 그가 조사 한달 전인 1911년 9월 5일에 일명 『吳州誌』라고 불리는 『강동군지』에서 한왕묘에 관한 기사를 발췌해서 정리해 둔 카드가 있다. 치밀하게 조사 준비를 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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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주체부인 현실을 확인한 것은 18일인데, 이처럼 봉토 굴착에 시간이 걸린 것은 봉토 절개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0월 10일 수직으로 굴착하던 봉토가 붕괴되면서 작업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 1명이 매몰되고 2명이 허리까지 묻히고 말았다. 이에 인부들은 고분을 파면 천벌을 받는다고 하며 작업을 거부하고 모두 돌아가 버렸다.주 003
각주 003)
야장에 기입된 날짜로 보아 인부가 작업을 거부하고 돌아가고 난 다음 세키노는 한왕묘 주변의 지형도를 그리고 향산 자락에 분포하는 고분을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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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어 주변의 다른 유적을 답사한 후 평양으로 돌아갔다. 16일 평양에서 조선인 인부 10여 명을 확보하여 그들을 데리고 강동의 조사 현장에 도착한 다음에야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결국 18일 현실 내부로 들어가 조사를 마치고 그 다음날(19일) 아침에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2) 조사 방법

한왕묘의 조사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이 없으나,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봉토 상부를 굴착하여 평탄면을 만드는 것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굴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토사는 봉토 사면에 버렸다(圖27). 봉토 상부에 평탄면을 확보한 다음에는 매장 주체부를 확인하기 위해 봉토의 중앙을 수직에 가깝게 파내려 갔는데, 인부가 매몰된 것은 절개면이 수직이면서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圖32).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작업이 진행되었음은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한왕묘의 조사에서도 사동 고분의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 인부들에게 흰 두건을 씌워 임금 지급을 포함한 현장 작업의 편의를 도모하였다(圖32).
현실로 진입하는 방법에 대해 야쓰이는 연도를 통해서라고 했지만, 사진으로 볼 때 현실의 천장을 통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현장에서 세키노가 작성한 도면의 연도에 토사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圖25, 39). 석실에서 연도 쪽을 보고 찍은 사진도 있는데 이 역시 연도를 통해 출입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圖43). 즉 연도의 석비(石扉) 상단 모서리가 깨져 빛이 들어오는 사진으로, 이를 참고하면 세키노는 봉토를 수직으로 굴착해서 찾은 현실로 먼저 들어간 다음, 연도를 확인하고 토사 일부를 제거한 후 석실의 내부 구조를 관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왕묘 조사에서는 아직 고구려 봉토분의 연도가 남쪽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사 내용

한왕묘는 강동읍에서 서남으로 약 1.56km 정도 떨어진 대동강변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진행하던 대동강이 크게 꺾이고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형성된 폭이 좁은 산등성이에 위치한 향산(向山)의 남사면을 야트막한 구릉이 감싸는 곳에 형성되었다. 향산 자락에는 18기 정도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는데 고분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한왕묘는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사진으로 미루어 보건데 조사 당시 한왕묘의 주변은 넓게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圖26, 27).
고분은 2단 기단 위에 봉토를 쌓아 올린 기단식 봉토분이다(圖28). 기단은 평면에서 볼 때 사각형으로, 전면과 서쪽면은 높이 30cm 정도의 돌을 나열하여 쌓았고, 동쪽 면은 지세가 약간 높기 때문에 1단으로 하고, 북쪽 면은 봉토가 형성되는 기반토가 높기 때문에 별도로 기단을 만들지 않았다. 기단이 있는 봉토의 크기는 직경이 약 54m, 높이가 약 12m 정도이며, 묘(墓)의 남방에는 직사각형으로 긴 돌을 나열해서 공간을 만들었다(圖24).
봉토를 굴착하면서 표토 아래 30cm 지점에서 암키와, 수키와, 막새기와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세키노는 이를 빗물이 고분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라고 하였다. 현실은 방형인데 동서가 345cm, 남북이 337cm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47m이다. 네 벽은 돌로 쌓고 그 위에 회를 발라 마무리 하였는데, 평행고임을 2번 하고 다시 삼각고임을 2번 한 다음 그 위로 면이 깔끔하게 조정된 마감돌을 올려놓았다. 네 벽과 고임돌의 표면에는 석회를 깨끗하게 발랐지만 벽화는 확인되지 않았다(圖29, 30). 세키노는 원래 벽화가 있었던 것이 벗겨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연도는 남쪽에 달았는데 폭이 151cm, 길이가 5.38cm 정도이며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구조이다. 야장에 그려진 도면으로 보건데 연도는 3군데에서 폐쇄하였다. 현실에 면한 연문에 문턱과 이마를 만들고 장부 구멍이 설치된 돌문을 달았으며, 연도가 길게 시작되는 곳에는 2장의 판석을 세워 폐쇄하였는데 그 바깥 쪽에는 토사가 가득 차 있었다. 연도의 바깥은 큰 판석을 기대 세우고 그 바깥에 돌을 쌓아 막음하였다. 세키노 일행이 현실로 들어갔을 때 이미 연도의 돌문들이 파괴되어 있었다. 연도의 벽과 천장에도 석회가 깨끗하게 발라져 있었다(圖25, 39, 40).
현실 내에는 2개의 두꺼운 시상대가 있는데 좌우로 나란히 배열하였다. 시상에는 면을 깨끗이 가공한 다리가 붙어있다(圖40). 세키노가 현실에 들어갔을 때는 돌 시상 위에 목관 파편이 동서방향으로 겹쳐 있었다고 한다. 목관의 내부에는 붉은 칠과 검은 칠을 한 흔적이 있다. 연도에 달린 문짝과 축은 한 몸으로 된 돌을 가공하여 만들었고 손잡이를 고정하던 둥근 구멍이 각각 5개씩 나 있다. 세키노의 야장에는 천장 막음석의 상면에 일정한 두께의 자갈층이 확인되는데 이는 석회에다 자갈을 섞어서 콘크리트처럼 만들어 씌운 것이라고 한다(關野1914). 벽 천장 등도 석회로 충전하였기 때문에 무척 견고하였다.

4) 출토 유물

현실에서 부장품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키노는 이미 한왕묘가 도굴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봉토 30cm 지점에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봉토의 90cm 깊이에서는 완형 토기 1점도 출토되었다(圖34). 세키노는 봉토에서 출토된 토기가 형태나 소성면에서 신라나 가야의 것과 다르고 오히려 낙랑 토기와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關野1914). 이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예리한 판단인데 이미 석암리 등지에서 실시했던 발굴 조사를 통해 낙랑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에 대한 기초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봉토에서 출토된 토기는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나 그 보관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봉토의 표면 아래 30cm 깊이에서 출토된 기와류는 『조선고적도보』Ⅱ에 공개되었는데, 막새기와 3점, 암키와 1점, 수키와 1점이다(圖34). 조사 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세키노 소속 공학부로 반출하였다. 그런데 도쿄대학 공학부 건축학연구실을 조사한 결과 당시 한왕묘에서 출토된 기와 중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된 기와가 보고에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암키와는 1점이 아니라 12점이었으며, 수키와는 2점이었다(圖44~54). 다만 막새는 원래 건축학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 중 1점이 문학부 고고학 연구실로 옮겨졌고 나머지 2점은 행방을 확인할 수 없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문학부에 소장되었던 고고 자료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공학부에 보관된 자료 대부분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도쿄대학의 어딘가에 이 막새기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한왕묘에서 출토된 수막새기와는 막새면의 문양이 집안의 왕묘에서 출토된 막새와 유사하며, 평양 토성리 출토기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고식이다. 이들 와당은 문양 구성에서 서로 유사하지만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동일한 문양 구성인 막새 2점과 와당면 제작에 사용된 거푸집은 서로 미세한 차이가 있다. 모두가 동일한 거푸집으로 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수키와는 내면에 포흔이 뚜렷하지만 모골의 흔적은 없다. 외면에는 성형(成形) 과정에 이루어진 타날에 의한 노끈 흔적이 뚜렷하다. 즉 노끈을 감은 타날구로 두드려서 1차 성형하였음이 분명한데 그 외면을 목판 조정하여 타날흔을 지우면서 마무리하였다.
암키와는 내면에 모골과 포흔, 점토띠 접합흔이 뚜렷한 것이 많다. 외면에는 단판이나 중판 정도의 타날구에 노끈을 감아 두드린 것이 확인되고 1차적으로 성형이 마무리된 후에는 굵은 조선(條線)을 횡으로 돌려가며 남겼다. 기와의 네 모서리를 잘라서 조정하고 상·하단도 깎아 조정하였다. 이러한 제작 공정은 서로 유사하지만 성형에 사용된 타날구는 서로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색조 역시 동일하지 않아서 서로 다른 소성 환경에서 구워졌음을 알 수 있다. 표면에 고운 모래가 뿌려진 것이 있는 반면 전혀 관찰되지 않는 것도 있어 이러한 기와들이 한왕묘의 축조를 위해 일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키와를 포함하여 한왕묘에서 출토된 평기와는 요면(凹面)과 이음 부위에 석회가 묻어 있는데, 이 역시 출토 기와들이 실제로는 건축 부재로 사용되었던 것이었으나 전용된 결과임을 말해 준다.
끝으로 한왕묘에서 출토된 목관 파편도 현재 도쿄대학 총합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5) 조사자 의견

조사 후 세키노는 무덤의 규모가 큰 점, 그 구조와 형식이 평양지역 고구려 무덤 중에서는 가장 완비된 점을 들어 국내성 부근의 분묘 형식과 연결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와당의 문양은 세키노가 광개토왕의 무덤이라고 판단한 집안현 장군총에서 출토된 것과 형식은 같지만 시기가 약간 늦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오주지(吳州誌)』 즉 『강동읍지(江東邑誌)』의 한왕묘 기사를 통해 고분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皇帝墓.......... 漢王墓, 혹은 황제묘라고 부르는 그 곳. 지금은 마산면 한평동이라고 하지만 舊전포리 漢岱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오주지』의 설에는 그 고분을 동천왕의 묘라고 추정하였다. 조선 역사에서는 동천왕이 魏의 관구검 때문에 그 도성 환도성이 함락되어 평양으로 일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평양에는 낙랑군이 융성하고 있었기에 동천왕은 평양까지 오지 않고 환도로 돌아 갔다. 그 무덤은 아마도 환도 부근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왕묘를 동천왕이라 비정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 연대는 아마 1500년 전(1911년 기준)에 가까워야 하는데 장수왕 전후의 왕묘로 비정해야 할 것이다.
 
위 내용을 통해 한왕묘를 장수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한왕묘의 조사가 마무리 된 후 『조선고적도보』Ⅱ에는 도면과 도판만을 실어 보고하였다. 이후 추가된 『조선고적도보 해설(朝鮮古蹟圖譜解說)』에 그 설명이 소략하게 소개되었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평안남도 강동군 마산면 한평동 강동을 서서북으로 멀어지기 약 4리. 대동강 우안의 소구릉지에 (고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황제묘라고 불린다. 방형 2층의 기단 위에 쌓은 것인데 커다란 圓墳이며 남으로 면한다. 직경이 약 23間이고 높이는 약 6間이다. 묘의 남쪽으로는 돌로 열을 세우고 전후로 긴 사각형의 前庭을 만들어 두었다.
봉토의 표면에서 깊이 1척(30.03cm) 정도 되는 지점에는 1면에 평와와 환와(수키와), 와당 등의 파편을 가지런히 깔아 빗물이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玄室은 方形으로 사벽의 평행고임 2단, 삼각고임 3단으로 가공한 돌을 걸쳐서 줄인 다음 마지막으로 그 위에 돌 하나를 덮어 절묘하게 천장을 짰다. 그 형식은 통구 지방의 토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실의 남면에 연도와 통하는 입구를 만들어 두었다.
연도를 길게 하여 안·가운데·바깥의 세 군데에 돌문, 혹은 돌을 세워서 폐쇄시켰다. 현실과 연도의 벽 천정에는 두껍게 석회를 발랐다. 玄室내에는 좌우 각 2개의 석재 관대를 나열시켜 두고 그 위에 원래 동서로 길게 목관을 두었는데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았다.
목관의 내부에는 주칠을 하고 외부에는 흑칠을 한 흔적이 있다. 이 고분은 일찍이 도굴된 것이기 때문에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는데 극히 일부 봉토에서 도제 광구의 소호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강동군의 읍지인 『吳州誌』에는 그 고분을 東川王의 무덤이라고 하였지만 맞지 않다.
묘 위에서 출토된 기와의 수법은 집안의 장군총에서 출토된 것과 가깝기에 아마도 장수왕 혹은 그것에서 멀지 않은 시대의 능묘로 볼 수 있다.
 

6) 기타

세키노가 현장에서 작성한 야장에 그려진 고분의 약측도를 보면, 『조선고적도보』Ⅱ에 실린 도면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즉 『조선고적도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한왕묘의 각종 도면은 세키노가 현장에서 작성한 것을 약간 손질하여 그대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세키노의 야장 작성 방법은 우선 현장에서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두고 이를 숙소에서 만년필 등으로 정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키노의 야장에 그려진 각종 도면에는 미처 지워지지 않은 연필 밑그림이 관찰되는 경우가 많다. 야장은 필요에 따라서는 채색을 하기도 하였다(도 38, 39 참조).

  • 각주 001)
    김형직이 만든 경신중학교가 근처에 있어 행정 구역을 경신리로 바꾸고, 고분도 경신리 1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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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세키노 컬렉션’의 관련 야장에는 그가 조사 한달 전인 1911년 9월 5일에 일명 『吳州誌』라고 불리는 『강동군지』에서 한왕묘에 관한 기사를 발췌해서 정리해 둔 카드가 있다. 치밀하게 조사 준비를 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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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야장에 기입된 날짜로 보아 인부가 작업을 거부하고 돌아가고 난 다음 세키노는 한왕묘 주변의 지형도를 그리고 향산 자락에 분포하는 고분을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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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묘의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4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