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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세이이치 (谷井濟一, 1880~1959)

야쓰이 세이이치는 1880년 와카야마현(和歌山縣)에서 태어났다. 1907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지만, 1908년 도쿄로 돌아와 도쿄제실박물관의 수장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였다. 1909년 세키노의 한국 조사에 조수로 내정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다른 조사에 참가중인 관계로 야쓰이가 대신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야쓰이의 사진촬영 기술이 인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이후 세키노가 서양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실시한 거의 모든 조사의 실무를 담당하였고, 『조선고적도보』의 편집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09년도부터 많은 유적을 굴착 조사하였는데, 1913년의 고구려 유적 조사, 1916년의 낙랑 고분 발굴 조사를 현장에서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여 능산리 고분, 나주 반남면 고분군의 발굴 조사로도 알려져 있다. 총독부가 실시하는 정식 조사 이외 울산 등지에 산재한 왜성(倭城)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1921년 부친의 병으로 일본에 돌아간 후 와카야마시의 공안위원, 시의 문화재 보호위원, 회사 간부 등을 역임하다가 1959년(80세)에 사망하였다.
야쓰이의 한국관은 1909년 『한홍엽(韓紅葉)』에 실린「상세(上世)의 일한관계(日韓關係)」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반도는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고, 소위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의 ‘신공황후 신라정벌설(神功皇后 新羅征伐說)’에 기초한 일선동조론에 가까운 역사관을 드러냈다. 나주 옹관묘 발굴을 마친 후 그 보고에서 피장자를 왜인으로 규정한 바 있다. 왜성 연구 역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관계 맺기’를 통한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 창출과 관계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쌓여진 왜성을 부각시켜 한국합병의 정당성을 관철시키려고 한 것이다. 야쓰이가 남긴 글을 보면, 제국이 식민 지배하는 한반도의 고적 조사 현장에서 활약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적극적으로 확인시키고 선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자신을 일체화시켜 그들만을 위한 굴절된 애국을 실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야쓰이의 한국관은 그의 스승이 쿠로사카 가쓰미(黑坂勝美)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형성 배경을 추측할 수 있다.
圖1_강서지역 고구려 고분의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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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세이이치 (谷井濟一, 1880~1959)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