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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의 개요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서북지역에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중요 고분군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특히 한·중 양국에 걸친 고구려 고분군은 그 학술적인 중요성과 예술성이 동시에 인정되어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고분은 주로 중국의 집안, 북한의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대동군, 황해남도 안악군 등지에 분포하며, 최근 문제가 된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들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고구려 고분군 중에서 대중과 연구자의 관심이 높은 것이 벽화고분인데,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고구려 벽화고분을 소개하는 다양한 연구서와 도록이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 고구려 고분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일본인 관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사된 고구려 고분은 대부분 간단한 설명과 도면·사진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을 뿐 정식으로 보고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일제강점 초기에 조선에서 ‘고적 조사(古潰調査)’를 주도했던 세키노 다다스(關野貞)가 1929년 작성한 『고구려시대의 유적 (高句麗時代之遺跡)』에도 1916년 이후에 조사된 일부 고분과 채집 고구려 기와의 도면·도판만이 게재되었을 뿐 조사 경과와 내용은 전부 누락되었다. 이는 『낙랑군시대의 유적 (樂浪郡時代之遺跡)』이 도면과 도판이 출간된 직후 본문이 충실하게 보충되었던 사례나 『채협총(彩篋塚)』, 『왕광묘(王光墓)』, 『왕우묘(王旴墓)』 등 단일 낙랑 고분의 조사 결과가 비교적 충실하게 보고된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라 하겠다.
한왕묘, 강서 삼묘, 쌍영총 등의 유명 고구려 고분이 언제 조사되었으며, 조사 주체가 누구였는지, 조사 경과와 조사 내용은 무엇인지, 출토 유물이 있었다면 그 유물의 귀속과 현재 소재는 어디인지에 대한 기초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들이 조사한 고구려 고분의 주요 내용은 물론,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 조차 주체적으로 평가하고 총괄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수많은 고구려 고분의 조사·연구 내용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그 첫 작업으로 우선 고구려 고분이 처음으로 조사되기 시작하는 강제병합 전후부터 중요 고구려 고분의 발굴이 집중되는 1913년까지의 조사 경과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한 주 자료는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Ⅱ에 공개된 사진과 도면, 세키노가 중심이 되어 일본학계에 발표한 논문과 강연회 기록, 도쿄대학에 남아있는 세키노가 현장에서 기록한 야장(필드 카드)이다. 여기에 도쿄대학 소장의 고구려 고분 측량도와 실측도, 벽화고분 모사 등도 참고하였다.
먼저 일제강점기 동안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의 조사 사례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이를 통해 안악 고분군과 덕흥리 벽화고분 등을 제외한 유명 고구려 벽화고분 대부분이 이미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고구려 고분 굴착이 국권이 강탈된 1910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근대에 가장 먼저 고구려 고분을 굴착한 사람은 강서군수였던 이우영(李宇榮)으로, 1904년 강서에 있는 고구려 무덤을 굴착한 사실이 확인된다.주 001
각주 001)
사오토메의 정리(甲乙女雅博, 2006)에서 1902년이라 한 부분을 인용하여 필자도 1902년 설을 따른 바 있으나(정인성, 2006), 1913년도에 간행된 잡지에서 세키노가 1911년을 기준으로 7년 전이라 했으므로 1904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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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은 당시 대묘와 중묘를 굴착했는데,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은 강서에 주둔하던 일본군 오타 후쿠조(太田福藏)이다. 오타는 1905년부터 일본군 제15사단 제58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위생병으로 평양에 머물렀는데, 강서에도 8개월 간 파견되었다(內田, 2001; 早乙女, 2006). 군수 이우영이 이전에 강서 고분을 굴착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타는 부대장을 설득하고 이우영 군수의 허락을 받아 동료군인과 자신이 가르치던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1906년 11월 26일 굴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굴착 시작한지 3일 만에 고분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갈 때 현지인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는 무덤의 굴착을 금기시하는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를 의식한 행동이며, 대한제국의 국권이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실 안에서 유물은 찾을 수 없었고, 네 벽면과 천장에 벽화가 있어 이를 확인하고 스케치하였다.
강점기 초기에 고구려 고분을 포함한 각종 ‘고적 조사’를 주도한 세키노가 오타의 스케치를 확인한 것은 1911년 12월이었다. 당시 제대 후 도쿄미술학교주 002
각주 002)
현재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위치한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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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복학한 오타는 강의를 나왔던 세키노에게 그 스케치를 보여 주었고, 세키노는 이를 고구려 고분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강서 삼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는 계기였다.
그 후 1906년에 강서에 주재하던 일본인 오카무라 코이치(岡村幸一)가 군수와 접촉하여 자비로 강서 대묘와 중묘를 굴착하고 벽화무덤을 확인하였는데, 이때 출토된 석비의 파편을 오카무라가 가져갔다고 한다. 오카무라가 군수 이우영과 접촉하여 강서 고분을 굴착했다는 것은, 1904년의 굴착도 이우영이 단독으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조상 무덤의 굴착을 금기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그것도 동네에서 조망이 좋은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고분을 조선인 군수가 단독으로 파헤쳤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이 마을의 고분을 예로부터 왕후묘로 판단하여 군수가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당시 개성과 강화도에서 일어난 이주 일본인 주도의 고분 도굴과 관련이 깊으며, 일본인들의 이같은 요구에 이우영이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다.주 003
각주 003)
이우영은 러일전쟁 때 적(러시아측)의 정보를 적절하게 일본군에게 전한 공을 인정받은 1908년경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는 당시 이우영이 일본 군부와 강하게 밀착되 있었음을 알려준다. 강서 고분의 발굴도 실제 오타처럼 고대 고분과 그 출토 유물에 관심이 있던 일본인의 요구에 이우영이 협조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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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04년은 터일전 쟁이 발발한 해로, 고분이 위치하는 강서지역은 진남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군하는 길목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즉, 고구려 고분의 굴착행위는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조선 사람을 대동하고 임의로 굴착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 각주 001)
    사오토메의 정리(甲乙女雅博, 2006)에서 1902년이라 한 부분을 인용하여 필자도 1902년 설을 따른 바 있으나(정인성, 2006), 1913년도에 간행된 잡지에서 세키노가 1911년을 기준으로 7년 전이라 했으므로 1904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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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현재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위치한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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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이우영은 러일전쟁 때 적(러시아측)의 정보를 적절하게 일본군에게 전한 공을 인정받은 1908년경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는 당시 이우영이 일본 군부와 강하게 밀착되 있었음을 알려준다. 강서 고분의 발굴도 실제 오타처럼 고대 고분과 그 출토 유물에 관심이 있던 일본인의 요구에 이우영이 협조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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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의 개요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