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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머리말

Ⅰ. 머리말

크라스키노 발해유적의 발굴조사는 1994년 7-8월에 약 20여 일의 일정으로 진행된 바 있는데, 10여년이 경과된 지금에야 조사결과를 정리하게 되었음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90년대 초반 우리 고대사의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바 있다. 당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발해 영역에 관심을 가졌던 대륙연구소의 적극적 지원으로 발해유적 조사단이 조직되면서 곧바로 92년의 기초조사가 진행되면서 발해유적에 대한 본격적 발굴조사가 준비되기에 이른다. 이후 93년에는 발해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크라스키노와 코르사코프카 및 우스리스크에서 처음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러시아발해유적”으로 발표되어 건국사상 초유의 해외 발굴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1994년의 발해유적 조사는 1993년의 발굴조사와 마찬가지로 대륙연구소의 지원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93년 조사의 계속사업이면서 후속조치이기도 하다. 물론 1993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단위유적에 대한 조사이기에 그 자체로 마무리되었지만, 발해유적으로 보다 분명한 성격을 얻을 필요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1회의 발굴조사로 발해를 운위하는 것은 물론 획득된 자료 자체의 해석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고, 나아가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유적에 대한 보다 지속적 관심과 발굴의 필요성이 있었다. 여기에 발해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될 필요가 있었기에 94년의 조사도 무리없이 진행된 것이다.
발굴조사는 1994년 7월 23일에 한국을 출발하여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조사지역인 크라스키노에는 25일에 당도하여 이튿날인 26일부터 조사를 시작하였다. 발굴조사는 8월 16일에 마무리하였는데 일기 등의 제반 장애요건으로 말미암아 조사작업은 약 3주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단위유적으로 전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비롯하여 곁에 있는 와요지 흔적을 확인하는 성과로 미루어 93년 발굴조사에서 미흡하였던 발해흔적에의 접근이 이루어져 결과에 만족할 수 있었다. 특히 출토된 유물 중에 연화문 장식이라던가 치미, 그리고 각종 발해의 기와는 크라스키노 지역이 발해시대 중요 거점지역이었음을 추정케 하면서 찬란한 발해문화의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었다.
본 발해유적의 조사는 하나의 단위기관 조사단에 의해 진행된 것이 아니고, 관련분야의 전문가 및 필요한 발굴요원을 참여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러시아 현지의 고고학자도 함께 참여하는가 하면, 발굴에 실제 소요되는 작업인부 등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94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유적의 발굴조사단은 1, 2팀으로 조직되었고, 크라스키노 성지 내에서 각기 다른 구역을 담당하여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제 2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조사 단장 : 김정배(고려대학교 총장)
∙ 조사 부단장 : 김성훈(중앙대학교 교수)
∙ 조사 위원 : 한규철(경성대학교 교수)
      이남석(공주대학교 교수)
∙ 조사원 : 한성욱(목포대학교 대학원)
     조원창(공주대학교 대학원)
     김동우(고려대학교 대학원)
     이현숙(공주대학교 대학원)
 
한편, 러시아 연해주 극동지역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연구원 라자 및 랭코프, 샤샤, 유리가 파트너로 참가하였는데, 이 외에 극동대학 학부생들도 작업인부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방대한 형태로 조사단이 조직되었지만 그에 따른 문제점도 적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93년의 발굴조사는 러시아 고고학자들의 적극적 지원 속에 우리 조사단의 독자적 행보 속에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94년 조사는 우리 조사단의 독자적 조사가 아닌 러시아 조사단과의 공동조사라는 조건이 제시되었고, 그 결과 조사대상의 선정·조사방식 및 조사 자료의 공유문제 등에서 우선적으로 러시아 조사단의 의견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발굴조사의 속성 상 조사된 유물의 정리나 자료화는 현장조사 후 시간을 가지고 면밀하게 실시하여야 함에도, 한국으로 유물 반출이 절대적으로 불가한 실정에서 귀중한 출토유물의 조사가 현장에서 개략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어려움도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 정리되는 보고내용은 현장발굴조사과정에서 획득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며, 특히 출토유물에 대한 정확한 복원을 진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황만을 정리한다는 한계도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국력증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고, 더불어 고고학과 같은 학문의 발전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10여 년 전의 해외발굴은 제반여건 상 쉽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 역사의 단편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하면서 발굴을 지원하였던 대륙연구소, 발굴조사가 있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사업을 추진한 조사단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헌신적 노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재정지원을 담당하였던 대륙연구소의 사정으로 94년 발굴조사의 결과 정리를 미루었던 조사단의 게으름과 무책임은 자성만으로 충족될 수 없음을 자인하면서 본 보고서가 간행될 수 있도록 배려한 고구려연구재단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본 보고서의 작성은 이남석이 진행하였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을 위한 기초자료는 한성욱이 현장에서 작성한 기록을 토대로 진행하였으며, 유물의 정리 및 기술, 그리고 도면의 작성 등은 이현숙이 공주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의 도움 하에 담당한 것을 수합하여 정리한 것이기에 이들의 역할이 보다 절대적이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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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료번호 : kr.d_0001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