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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울릉도는 조선의 속도(屬島)로 일본의 속도(屬島)라는 증거가 없음

一. 이 사건은 재작년 겨울 하시베 이에몬(橋邊伊右衛門)이 말해 줘서 처음으로 들었는데, 이에몬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이것은 보기 드문 일로, 중대사입니다. 죽도는 일본의 땅인가, 조선의 땅인가 하는 것을 잘 결론지어서 조선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전부터 어떠한 일이든 시작하는 데 조심성이 없고 가벼이 거론하여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작년 초여름에 이신님이 아메노모리(雨森)씨주 001
각주 001)
"아메노모리(雨森)씨 :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 에도시대 중기의 유학자로 이름은 노부키요(誠淸)이며 통칭 도고로(東五郞)이다. 그는 본래 의사 가문 출신이나, 유학자가 되고자 에도에서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 준안의 천거로 1692년부터 쓰시마번에서 유학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조선의 왜관에서 조선어를 공부하여 외국어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막부의 중진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는 같은 문하였으나, 각각 막부와 쓰시마번에 속한 입장이어서 1711년 조선통신사의 접대나 조선 무역의 유지(은 수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쓰시마번에 출사한 이래 조선 관계의 제반사에 관여하였으며, 이후 조선 역관사의 밀무역 사건이 벌어지자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번의 정무에서 한걸음 떨어진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관계나 번의 정무에 관한 자문은 계속 이어갔으며, 1729년에는 사신으로서 조선에 도해하기도 했다. 만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조선어통사(朝鮮語通詞)의 양성이나 유학 교육에도 힘썼다.
한편 사료상의 작년 여름, 즉 1694년 여름에 호슈는 에도에 있었지만, 해당 시기에 에도 번저의 기록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행적이 불분명하다.(泉澄一, 『雨森芳洲の基礎的硏究』) 따라서 가시마가 들었다고 하는 호슈의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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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장을 거론했을 때에도 그것은 지엽적인 일이었습니다. 처음 막부에서 이 일에 관하여 조선에 전하라고 지시했을 때, 죽도의 내력을 막부가 잘 알고 있는지 여쭈어 보고 쓰시마가 알고 있는 사실도 말씀드려서
잘 결론지은 뒤, 향후의 정세 변화까지 지시를 받아서 조선에 전달했다면 조선이 난색을 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난색을 표했다면 그 사정을 막부에 보고하고, 다시 지시받은 사항을 전달했다면 주군주 002
각주 002)
"여기서의 ‘주군[殿樣]’은 소 요시미치(宗義方)를 칭한 것이다. 울릉도쟁계가 발발한 시점에 쓰시마번의 번주는 4대 소 요시쓰구(宗義倫, 1671~1694)로, 그는 요시자네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일찍 죽어 후계자가 되었다. 1684년에 종4위하 우쿄타유(右京大夫)에 임관하였으며, 1692년에 요시자네가 은거한 뒤 번주에 취임했으나 2년 만에 사거하였다. 1694년 11월, 요시자네의 또 다른 아들인 요시미치(義方)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5대 번주가 되었고, 요시자네는 계속 섭정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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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곤란해지실 정도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一. 13통의 서찰을 보아도 지난날 죽도가 일본에 속했다는 고실(故實)이나 이번 일의 발단부터 에도 막부에 아뢰어 온 정황, 그리고 현재 귀하께서 에도에서 로주(老中)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 또한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서찰을 통해 사정을 듣고 싶은 바가 많습니다.
一. 주고받은 세 통의 서찰을 보았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쪽에서 주장한 취지도, 조선에게서 받은 답변도, 저라면 이렇게는 처리하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는 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바가 각각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딱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중 우리 쪽에서 보낸 서한에는 막부를 통해 조선을 위협하려는 어감이 강한 곳도 있는데, 조선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
一. 쟁론(爭論)이란 어떠한 일이든 쟁론한 상황에 시비와 진위가 있고 쟁론한 자의 인품에 지우(智愚)와 곡직(曲直)이 있으며, 이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어 그 시비・진위・지우・곡직을 밝혀 승패를 정하며 어리석은 자를 패자로 삼고 현명한 자를 승자로 삼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서계, 그리고 조선 측과 문답한 내용을 적은 서찰을 보니 공교롭게도 울릉도(蔚陵島)는 조선의 속도(屬島)로, 80년 전부터 일본에 속해 왔다고 하는 말은 그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표류민을 송환할 때의 서계에 적힌 글을 지금에 와서 무어라고 지적하는 듯이 보입니다. 만약 쟁론에서 이겨 [죽도가] 일본에 속하는 섬이라고 결정되면 세 차례의 서계에 오류가 있음을 내뱉으면서 [죽도를] 얻게 되었다고 떠들어대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조선에서 80년 전 울릉도가 일본에 속하게 된 증거 문서를 제출하라고 하면 증거 문서가 될 만한게 있겠습니까.
세 통의 서계는 표류민을 송환하는 서계였을 뿐 증거 문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로 조선측이 보내올 답서에 갈등을 유발할 만한 내용이 적히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지금 쟁론을 중국(中華)에서 심사하게 된다면 어찌 일본에 [죽도를] 속하게 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가 어느정도 변론을 준비하더라도 조선에서 죽도를 일본에 부속시킨다는 말에는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각주 001)
    "아메노모리(雨森)씨 :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 에도시대 중기의 유학자로 이름은 노부키요(誠淸)이며 통칭 도고로(東五郞)이다. 그는 본래 의사 가문 출신이나, 유학자가 되고자 에도에서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 준안의 천거로 1692년부터 쓰시마번에서 유학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조선의 왜관에서 조선어를 공부하여 외국어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막부의 중진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는 같은 문하였으나, 각각 막부와 쓰시마번에 속한 입장이어서 1711년 조선통신사의 접대나 조선 무역의 유지(은 수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쓰시마번에 출사한 이래 조선 관계의 제반사에 관여하였으며, 이후 조선 역관사의 밀무역 사건이 벌어지자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번의 정무에서 한걸음 떨어진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관계나 번의 정무에 관한 자문은 계속 이어갔으며, 1729년에는 사신으로서 조선에 도해하기도 했다. 만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조선어통사(朝鮮語通詞)의 양성이나 유학 교육에도 힘썼다.
    한편 사료상의 작년 여름, 즉 1694년 여름에 호슈는 에도에 있었지만, 해당 시기에 에도 번저의 기록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행적이 불분명하다.(泉澄一, 『雨森芳洲の基礎的硏究』) 따라서 가시마가 들었다고 하는 호슈의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여기서의 ‘주군[殿樣]’은 소 요시미치(宗義方)를 칭한 것이다. 울릉도쟁계가 발발한 시점에 쓰시마번의 번주는 4대 소 요시쓰구(宗義倫, 1671~1694)로, 그는 요시자네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일찍 죽어 후계자가 되었다. 1684년에 종4위하 우쿄타유(右京大夫)에 임관하였으며, 1692년에 요시자네가 은거한 뒤 번주에 취임했으나 2년 만에 사거하였다. 1694년 11월, 요시자네의 또 다른 아들인 요시미치(義方)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5대 번주가 되었고, 요시자네는 계속 섭정을 맡았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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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조선의 속도(屬島)로 일본의 속도(屬島)라는 증거가 없음 자료번호 : kn.k_0003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