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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외교문서

내각 개조 후의 일본의 대외정책

  • 날짜
    1964년 9월 21일
  • 문서종류
    보고서
  • 형태사항
    필사  , 국한문 
一. 池田 삼선으로 내각이 개조될 때까지의 일본의 대외정책
1960년 7월에 池田 정권이 발족하여 금년 7월에 신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일본이 취해온 대외정책은
① 경제체제의 경비 확충을 통한 미국을 위시한 서구선진제국과의 유대 강화
② 아세아 및 이에 인접하는 서태평양 제국 간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영속적 협력관계 수립
이란 2대 정책으로 대별할 수 있다. 池田은 집권 4년간을 통하여 상기 2대 정책 수행에 있어서 얼마만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든가?
경제면에서 일본은 GATT 35조의 대일원용을 철회시켰고, IMF 8조구 및 GATT의 11조구에로의 이행에 성공하였고 OECD에의 가맹을 실현하며 서구선진제국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는 영국, 불란서, 서독 등과 각료정기협의회를 발족시킴으로서 서구와의 관계를 크게 진척시켰다. 더욱이 지난 1년간에 “폰피도-”불 수상, “쿠-보드뮬밀”불, “바틀러-”영, “슈레이더”서독 각 외상 등 세계일류급 외상들이 연달아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 사실은 일본 외교사상 획기적인 신국면이 개척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 서구 외교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일본외교도 아세아에 있어서는 “근린외교추진”이란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 실에 있어서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일국교정상화, 대 국부 및 중공 정책, Malasia 및 Indonesia 분쟁, 저개발원조와 무역확대 등 전 내각이 씨름하든 제 현안은 거의 전부가 미해결 채로 개조내각에로 인계되었다.
二. 내각개조와 일본외교정책의 방향
개조내각이 발족한 것이 겨우 2개월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앞으로의 일본의 대외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이냐를 시사하여 주는 징후로서 뚜렷이 나타난 것이 없다. “근린외교의 적극추진”이란 종래의 입장이 재강조되었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池田 수상이 자민당 총재로서 3선되어 계속집권을 하게 되었고, 이에 뒤따른 내각개조에 있어서도 종래의 순벌균형체제(巡閥均衡體制)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일본정부의 외교정책에 기본적인 변동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또한 推名 신임외상이 교섭에는 전연 경험이 없고 경제부문에서 활약하든 사람이며, 말이 없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만큼 종래의 외교노선을 변경하느니 보다는 그 노선을 그대로 답습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이유로 池田 수상의 외교 면에서의 통제와 지휘가 더 일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三. 앞으로의 일본대외정책에 대한 전망
상기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당장에 내각개조 후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으로 현시점에 있어서는 종래의 일본외교의 기본노선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과거의 일본외교의 실적을 검토하고 앞으로 이것이 어떤 pattern으로 어디에 중점을 두고 행하여 질 것인가를 전망하는 것이 타당하다할 것이다.
(1) 대미 및 대서구 외교
일본이 서구외교를 적극화한 것은 1962년의 池田 수상의 서구주 6개국 방문을 계기로 해서였다. 구주 방문에 앞서 池田 수상은
“지금까지의 일본의 입장은 미국과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구주와 일본 간에 Pipe를 통하고 이를 미국과 연결코저 한다. 그리고 일본, 서구, 미국의 3각 위에 자유진영을 안정시키겠다”고 말하였다.
이 발언 속에 대미 대서구 외교에 대한 그의 소신이 피력된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것을 주석하면 아래와 같은 의도였으리라고 볼 수 있다.
가. 대미 일변도의 외교자세를 서구와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서 시정하고, 미국, 서구 나아가서는 소련에까지도 그의 발언권을 강화하여 보자는 것
나. 대미편향을 지탄하는 국내 불만세력을 이와 같이 하여 완화하여 보자는 것
다. 세계경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저하함에 따라 EEC를 중심으로 한 구주경제의 활발화에 주목하여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달성에의 일조로 삼자는 것
이와 같은 발언이 행하여진 것은 이미 1962년이었고, 그간에 서구외교에 있어서 막대한 성과를 거두어 일본의 국제지위가 향상되었고 또한 계속집권을 하게 된 池田 정권으로서는 그의 소신대로 대미일변도 외교의 지양, 대서구 유대 강화의 □地가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하겠음으로 앞으로의 일본외교에 있어서의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2) 대아세아 외교(근린 외교)
대서구 외교에 있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고, 근린외교에서 성과를 올리지 못한 일본으로서는 아세 외교에 중점을 두게 될 것임은 능히 추진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일본의 방침은 이미 신내각에 의하여 천명된 바 있다. 그러나 근린외교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용이하게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세아 외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는 3개 문제를 들어 아래에서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가. 한일문제
1960년에 池田 정권이 발족한 이래 일본의 최대 외교 현안이었든 한일교섭 하나만을 보더라도 그 전도는 결코 용이한 것은 아니다.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지향하는 본래의 교섭은 과거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에 시달렸던 한국국민감정(대일경계심 : 대일불신감)이 학생 Demo라는 형태로 폭발하게 된 까닭에 한일교섭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빠졌고 교섭재개의 전망마저 보이지 않은 상태에 있다.
池田 수상은 회담재개까지의 연계책으로서 2,000만 불상당의 공업원자료 보수시설재재를 연불수출함으로서 한국국민의 대일감정을 완화해 보려고 하였든 것 같으나, 이 문제를 둘러싼 외무성, 대만성 간의 이견이 심하여 결과적으로(池田 □斷으로) 나타난 결과는 상환조건에 있어서 1년 거치 2년 상환이란 즉 당초 일본이 제의하였든 긴급원조정신과 거리가 먼 순수한 상업 Basis 의 조건으로 낙착되었다. 한국정부가 이와 같은 조건의 수락을 거부하자 일본정부는 1년 거치 4년 상환으로 조건을 완화할 것을 시사하였고 수일 내로 최종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이것은 일본정부 각성 내의 불통일성 또는 마찰을 드러낸 것으로 아세아 외교 실패의 하나의 중요 요소가 되어 왔다. 또한 이것은 推名 외상의 외상으로서의 능력을 Test하는 하나의 Case 로서 보여졌든 것이다. 그가 외무성의 입장을 관철 못하고 田中 대장대신의 입장에 굴복한 결과가 되고 말었다. 일본정계 일부에서는 심지어는 외무성 내에까지도 推名 외상 영도 하의 외무부의 비중약화를 자인하고 있다고 한다)
나. 대국부·중공정책
〔입력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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