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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플란손의 보고서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А. 플란손 
  • 수신자
    А.П. 이즈볼스키
  • 발송일
    1907년 7월 12일(1907년 7월 12일)
  • 수신일
    1907년 8월 8일(1907년 08월 08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17,лл.130-132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외교(국제문제)/사회운동
  • 세부분류
    국제관계/독립운동
  • 주제어
    보호조약, 헤이그 밀사 파견
  • 색인어
    권신목, 윤택영, 이완용, 이종호, 이즈볼스키, 하야시, 헤이그 밀사 
  • 형태사항
    6  , 타이핑  , 러시아어 
수신 : 1907년 8월 8일
 
№44
서울, 1907년 7월 12일
 
А.П. 이즈볼스키 각하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각하
 
헤이그에 대한제국 사절이 예기치 않게 출현하여 초래된 서울의 사건들은 이곳[서울]에서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새롭게 바뀌는 까닭에 아직은 입수된 수많은 소식과 소문을 살피거나 그 중에서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고 이 사건들을 공정하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평가를 자제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아주 압축해서 나열하여 각하께서 검토하시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제국 황제는 자신의 뜻에 반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통치를 확립한 1905년 11월 4일(17일)의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부터 일본의 행태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의 향후 운명에 대한 결정을 문명화된 열강들의 법정에 세우려는 생각, 특히 헤이그 회의에서 검토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12월 29일자 보고 № 18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4월 말 윤택영과 권신목이라는 두 명의 한국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중 윤택영은 황제와 가까운 사람인 것 같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권신목은 통역관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윤택영이 저에게 밝히기를, 자신은 헤이그로 가서 그곳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인정과 수호를 청원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는데 저보고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물론 저는 말을 아끼지 않고 논거를 들어 그가 그런 의향을 단념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헤이그 회의 일정에는 최근 전쟁으로 초래된 문제, 즉 전쟁 밀수와 중립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은 전혀 검토되지 않을 것이다.
2. 대회에서 논의할 프로그램은 이미 러시아가 만들었으며 다른 열강들이 승인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전달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자기 명의로 초청장을 발송하고 있다. 새로운 문제를 발의하는 것은 이미 러시아가 관여할 수 없게 된 일이며, 이렇게 하는 것은 시기가 늦어서 단순히 기술적인 면에서도 불가능하다.
3. 원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한제국 문제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열강들은 다른 일들로 바쁘며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시기에 맞지 않게 제기하는 것은 좋아봐야 무익한 일이 될 것이고 상황이 안 좋으면 대한제국의 운명을 더 악화시킬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정말 대한제국에 등을 돌렸는가 하는 제 대담자의 질문에 저는, 대한제국에 대한 폐하의 호의는 변함이 없지만 대한제국이 스스로에 이익이 되려면 사태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순종하고 더 나은 상황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윤택영은 완전히 만족해서 헤이그에는 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면서 떠났습니다. 최근 사건은 그가 이 결심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무리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애국심이든, 아니면 사리(私利) 때문이든, 또는 어쩌면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든, 국제회의에 가겠다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이 무리들 중 한 무리가 이용익의 손자를 필두로 이종호주 001
번역주 001)
이종호가 이용익의 손자이므로 앞의 이종호는 다른 인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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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하는 사람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거기서 군총독 육군중장 플루크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며 그가 다시 저에게 이것을 문의했습니다.
지난 5월 6일자 회신 전보에서 앞에서 든 것과 거의 같은 논거를 육군중장 플루크에게 말해주고, 덧붙여서 대한제국 문제는 일본 전권대표들에 의해 국제회의에 상정될 것이고 따라서 한국인들의 입장을 허용할 것 같지는 않으며, 만일 그들이 그래도 헤이그로 반드시 가겠다고 한다면 러시아를 경유할 때 모든 외국 여행자에 부여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협조와 배려를 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서 이 대한제국 사절단도 출발을 취소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 번째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무리가 몰래 헤이그로 떠나 지금의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헤이그에서의 폭로가 이곳 일본인들에게 불러일으킨 최초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그들은 참지 못하고 분개했으며 신문에서는 대한제국 황제가 친히 일본에 사죄하러 가야 한다고 떠들썩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런 요구는 파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기꺼이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요구는 한국에서 강력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인민은 오래된 관례에 따라 군주에게 청원을 하려고 황궁에 이르는 가도에 무리를 이루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군중을 공격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도시 전체에 총성이 울렸습니다. 평양에서 군대를 불러왔으며 몇 몇 거리의 골목에는 기관총이 설치되고 기타 비상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 무렵 궁중에서는 일본 통감부의 앞잡이인 대한제국의 대신들이 한참을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틀 동안 강요한 후 그들은 7월 5일에서 6일로 가는 밤중에 황제를 설득하여 통치권을 통감에게 이양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했습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소동은 커졌습니다. 군중들의 분노는 주로 대한제국에 해를 끼치며 일본인들에게 충성한 대신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7월 6일 군중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두 명의 대신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습니다. 7월 5일 저녁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주 002
번역주 002)
하야시 타다스(林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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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이 도착했으며, 7월 12일인 오늘 이토 후작과, 한국인들이 증오하는 이완용이 서명한 새로운 조약 원문이 나왔습니다. 이런 조처가 이 나라를 안정시킬 것 같지는 않으며 새로운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깊은 존경과 충심을 다하여,
각하의 충복
플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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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호가 이용익의 손자이므로 앞의 이종호는 다른 인물이어야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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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손의 보고서 자료번호 : kifr.d_0004_029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