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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손이 이즈볼스키에게 보낸 보고서

 
  • 구분보고서
  • 저필자플란손
  • 수신자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
  • 발송일1908년 9월 13일
  • 문서번호АВПРИ,ф.150,оп.493,д.30,лл.339-342об.
  • 원소장처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현소장처외교사료관
  • 대분류사회운동/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의병/독립운동/외국인/이민(국외이주)
  • 주제어의병투쟁, 항일투쟁
  • 색인어무장봉기, 이범윤, 길림, 두만강, 헨리 쿡번(Henry Cockburn), 빨치산, 개경포, 무산
  • 형태사항7 타이핑 러시아어 
 
№35
서울, 1908년 9월 13일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 각하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각하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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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9.13.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 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임



지난 7월 22일 №29의 제 보고서에 근거하면서, 그 보고서에 언급된 한국인 이범윤에 대해 저에게 도착한 몇 가지 소문들을 보충하고자 하옵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과 활동에 대해 이곳에 오는 정보들은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그런 유의 그리고 특히 무장봉기자와 관련된 정보가 그렇듯 언제나 지극히 극히 일면적입니다.
예를 들면, 이 이범윤이 한 달 이상 전에 6-7,000명의 수장으로 길림성의 경계인 몽구가이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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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연해주 바라바쉬 지역임

쯤에서 일본부대와 전투를 치렀고, 이에 일본인들의 손실은 3명의 장교와 약 40명의 병사를 헤아린다고 길림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현 체제에 불만을 품고 국경을 넘으며 그에게 가담하는 한인들에 대한 얘기는 아직까지 사방에서 들립니다. 한국 신문들에는 대부분 북쪽의 두만강 근처인 경산, 경흥, 경원, 회령 등의 도시 부근에서 무장봉기자들과 한국의 병사들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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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병사를 잘못 표현한 것으로 판단됨

과 있었던 충돌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도시들은 제가 7월 5일 №25의 보고서에 동봉한 지도에 표기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각하께 한국의 일본군 참모부가 계속하여 입수하고 있는 일본군사가 반도에서 활동한 결과에 대한 현재 소식목록을 보고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7월 5일 동봉한 목록과 마찬가지로 단지 그러한 류의 보도를 거의 문자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거나 적어도 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지역신문들에 보도되는 소식들은 극단적으로 일면적인데 이는 극히 조심(신문정간을 두려워하면서)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본신문들은 사망자의 수에 대해 단지 한인만을 열거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아들들은 항상 이러한 운명을 피해가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한 일반적인 일본 언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곳의 영국 총영사 헨리 쿡번(Henry Cockburn)은 얼마 전 일본 언론의 특성에 대해 비길 데 없이 적절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평가 전체를 인용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어떠한 보도이든 일본특파원들에 의해 일본신문에 보도된 단편적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할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저는 제가 이미 영광스럽게도 방금 언급한 보고서의 끝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에 보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제가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소식들은 적어도 완전히 불충분하고 반드시 공정하지만은 않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심지어는 사실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끔 원산에 있는 우리의 임시 영사지부에서 저에게 얼마간의 소식을 보내옵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 전 비류코프(Бирюков)씨는 한국의 빨치산들이 여전히 북쪽에서 강하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7월 달에 그곳에서 일본군인 및 헌병들이 한국 빨치산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있었고 게다가 후자 쪽에 의해서 얼마간의 사망자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총을 빼앗기는 일도 발생했답니다. 한번은 한국인들에게 틀림없이 온전한 기관총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8월 달에 있었던 전투에 대해 전하면서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100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어,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를 하는 한국인 통역관을 구하는데 지역 군참모부가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전문을 받았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하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일본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을 피하고 있고, 그들의 확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의 완력에 의해 얼마간이라도 이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극히 불쾌해 하며 일한답니다.
얼마 전, 비류코프씨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국인 빨치산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회령과 개경포 사이의 어딘가에서 충돌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50명의 일본군, 3명의 헌병, 4명의 한국인 경찰과 2명의 통역이 사망했습니다.
같은 곳에서 최근에 받은 소식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백사봉 고개에서 일본인들이 빨치산을 포위했는데 전투 후에 그들 중 일부가 무너져 무산으로 갔습니다. 갑산에서 온 빨치산들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생각건대 무산지역은 숲이 매우 무성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곳에서 큰 부대가 활동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이 지역에 유명한 이범윤이 은신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범윤은 가끔 자신의 추종자들 일부와 함께 간도에 은신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은 그에게 은신하기에 특별한 위험이 없고 마땅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소문에 의하면 이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 대부분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게 극단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필요시에는 그곳에 숨어있는 한국인들과 공조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방금 전 일본신문에서 한국에서 일본군인 사망에 대한 최초의 보도를 읽었습니다. 1907년 10월에서 1908년 8월까지 무장봉기자들과 관련한 업무로 일본인 83명이 사망하였고 187명이 부상당했으며, 이들 중 사망한 8명과 부상당한 15명은 헌병이며, 나머지는 병사들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간에 한국인들은 12,0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각하께 깊은 존경과 진정한 충성심으로 영광을 표합니다.

각하의 충복
А. 플란손
 

주 001
1908.9.13.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 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임
주 002
지금의 연해주 바라바쉬 지역임
주 003
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병사를 잘못 표현한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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