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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К. 베베르가 М.Н. 무라비요프 백작에게 보낸 보고서

Донесение К. Вебера графу М.Н. Муравьеву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К.И. 베베르
  • 수신자
    М.Н. 무라비요프
  • 발송일
    1897년 5월 3일(1897년 5월 3일)
  • 수신일
    1897년 8월 29일(1897년 08월 29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7,лл.42-50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국방·군사/국제관계
  • 주제어
    조선군대 훈련, 러시아 교관단
  • 색인어
    심상훈, 가토, 모스크바의정서, 무라비요프, 베베르, 조선 군대, 푸탸타
  • 형태사항
    18  , 타이핑  , 러시아어 
1897년 8월 29일 수신
서울, 1897년 5월 3일. № 56주 001
번역주 001)
발신 장소, 발신 날짜 및 발신 번호를 적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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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9월 15일 №285를 부여함주 002
번역주 002)
문서담당자가 수신한 문서를 정리보관하기 위해 부여한 번호임. 수신날짜와 수신한 문서번호 부여는 원문서에 수기로 적혀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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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백작 각하,
 
올 해 3월 20일에 저는 같은 달 19일자 각하의 전보, 즉 원칙적으로 제국정부는 조선에 대해 그 군대 설립을 돕기로 결정했으며, 따라서 지금이라도 제가 조선국왕에게 우리는 이 일에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 문제에 관한 협약을 계속할 거라고 확언해도 좋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 훈령을 실행하려고 저는 조선국왕에게 우리가 협조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참모본부장 푸탸타와 함께 교관단에 관한 이곳 군부와의 협상을 가능한 빨리 마무리 짓고자 했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모스크바 의정서의 의미와 원본을 왜곡하면서 우리 교관단이 독점적으로 조선군대를 훈련시키는 권리를 문제 삼을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런 제 생각은 2월 4일자 저의 전보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무라비요프 백작 각하 제위
 
조선군대의 개조를 위한 기본 항목과, 여기에 필요한 러시아 교관단의 인원수에 관한 협정이 종착점에 이르면 이를수록 러시아가 이 나라 전체를 점령할 것이며 교관단 협정에 서명하면 일본이 조선에 해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서울에 더 강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민영환 공사가 출발한 후 군부대신 직책을 대리하고 있는 심상훈 탁지부대신, 그리고 외부대신 이완용과 몇 차례 만나 국왕수비대 1천 명을 포함한 6천 명의 잘 훈련받은 군대를 단계적으로 만드는 일이 조선에 필요하다는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군대는, 지금은 결코 전제적이지 못한 조선국왕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며, 또한 이 나라의 제도를 정력적으로 개혁하고 보수적인 구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선이 불가피하게 직면할 국내 소요의 진압을 위해 필요한 바, 현재 통치와 행정을 맡고 있는 모든 인사들이 개혁의 목적을 평민에 대한 자신들의 자의(恣意)와 수뢰, 강압, 전횡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불쌍한 주민들을 약탈, 살해하는 북쪽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도 조선정부는 군대가 필요하지만, 부산을 기점으로 조선 전체를 파고들면서 나약한 조선인들을 온갖 방식으로 모멸하는 남쪽의 일본인들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더 믿음직한 군대를 가지게 된다면 조선 정부로서도 1894년 7월과 1895년 9월에 일본인들이 일으킨 것과 같은 쿠데타주 003
번역주 003)
경복궁 점령과 민왕후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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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을 막는데 어느 정도 보장이 될 것입니다. 조선 군대를 최대 6천 명으로 만들려면 우선 기존의 수비병 1천 명에 1천 내지 1천 5백 명을 더해 단계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궁색한 재정을 고려하거나 국제적인 측면을 고려해 볼 때도 그와 같은 행동 방식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기술한 견해를 조선국왕에게도 밝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령 4월 14일 저녁이 그러했습니다. 그 날 조선국왕은 저를 개인적으로 궁궐에 초대를 했는데, 그 때는 조선국왕이 일본 공사 가토의 요청으로 면대를 한 지 1시간 후인데, 조선국왕의 말씀에 따르면, 면대 자리에서 가토 공사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지 못하도록 조선국왕에게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합니다.
심지어 군부대신이 저에게 러시아 장교와 하사관을 초빙해달라는 요청을 한 이후에도 가토와 다른 일본인들이 갖은 책략과 책동으로 조선인들을 겁주려고 거듭 애를 쓰는 목적은, 제가 보기에는, 그들에게서 경솔한 답변, 즉 그들이 우리에게 교관단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교관단을 강요했다는 답변을 얻어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답변을 얻게 된다면 일본인들은 당연히 우리가 모스크바 의정서를 위반했다고 서둘러 비난할 수 있겠지요.
4월 18일 의정부에서 군부가 제출한 계획안을 심의하였는데, 이 계획안은 군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초빙해야 할 장교와 하사관 명부와 이들에 주어야 할 봉급에 관한 것입니다. 의정부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몇몇 대신들이 분명하지 못한 애매한 대답을 하는가 하면, 다른 몇 사람은 훨씬 더 적은 수의 교관을 초빙하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가 몇 마디 간단한 말로 자기 견해를 얘기했으며 자유주의 당파 혹은 소위 친미파이자 반일파인 외부대신주 004
번역주 004)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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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별도의 의견을 내놨습니다(첨부문서 I에 제시됨). 전반적으로 보아 외부대신은 교관단을 더 많이 초빙하면 좋겠지만 재정 및 기타 이유로 아직은 장교 몇 명만을 초빙하도록 하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의 메모 기록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지만 그와 가까운 한성판윤을 통해 물어보니 하사관 숫자가 더 많아지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지만 메모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내게 대답했습니다.
의정부의 결론에 대해 군부대신이 이 문제를 심의하여 뺄 수 있는 교관 숫자를 정하라는 조선국왕의 결정이 나왔고 이에 뒤이어 저는 군부대신에게서 4월 23일에 공문을 받았습니다(첨부문서 II). 이 공문에서 군부대신은 러시아 교관단의 초빙에 관한 조선국왕의 지시를 바탕으로,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의정부의 심의를 바탕으로 조선 군대의 훈련을 위해 14명의 교관, 즉 장교 3명, 하사관 10명, 교관 1명과, 병기창 기술자 1명, 악단장 1명, 악사 3명, 준(準)의사 2명 등 총 21명의 초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숫자의 인원은 우리가 착수한 훈련 사업을 지속하는 데는 아주 충분한 것이라고 우리, 즉 군부대신, 참모본부대장 푸탸타 그리고 저는 이전에 있었던 회담들에서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불안한 정세와 일본 사람들의 조선 사람에 대한 위협을 고려해 볼 때 더 많은 교관수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조선 군대의 훈련을 우리 수중에 남기도록 하는 게 우리의 중심과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자[조선 군대의 훈련을 러시아에 맡기는 문제]는 군부대신이 그의 공문서와 함께 군부대신의 인장을 찍어 직접 저에게 전해준 다른 두 개의 문서로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문서(첨부문서 III)는 특히 우리 장교들의 임무를 논하고 있는데 주요 항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조선 군대의 수는 6천명까지 끌어 올린다.
2) 조선 군대의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설립을 위해 러시아 교관들을 3년간 초빙하며, 이 기간은 추후 연장될 수 있다(우리가 맺은 협정 가운데서 이 조항은 가장 중요하며 이 문제에 다른 나라들이 간섭하는 것을 배제시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3) 조선국왕 휘하의 러시아 군사 고문관이 교관단장이 된다.
4) 교관의 임무는 군대의 교육과 통솔, 육군유소년학교와 사관학교의 건설이다.
5) 병기공장 사업을 확대하고 병기작업장 및 군병원을 설립한다.
6) 국가 방위와 수호의 조건들을 확정하기 위해 즉시 필요한 탐사를 행한다(이 목적을 위해 크지 않은 규모의 탐사단을 파견할 수 있다. 이는 북쪽 지방에서 마적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7) 군사고문관의 자문에 따라 작성되는 군비예산은 국고 수입 전체의 1/4 이상으로 책정한다.
군부대신이 저에게 전한 두 번째 문서(첨부문서 IV)에는 교관들의 봉급 등에 대한 근무 조건과 그 일람표,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기한 문서를 받음과 함께 이곳 정부와 우리의 교섭은 완결되었고 그 결과는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4월 24일 아침 저의 전보에서 보고 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것을 [전문] 암호화하고 있을 때 각하의 22일자 전보, 즉 새로운 훈령을 받을 때까지는 조선 군대를 조직하는 일에 관한 어떠한 교섭도 중단하라고 저에게 지시하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각하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전보를 하루 일찍 받았더라면 우리 공사관은 아주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우리의 영향력과 권위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우리가 그 충격에서 회복하는 데에는 빠른 시일 내에는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일본인들과 그 일당인 반러파 인사들의 아주 은밀한 선동과 책략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 교관단의 문제는 향후 조선에서 정치적 우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양보적인 태도는 [러시아가] 약한 것으로 오해되어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을 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의 강력한 보호를 언제나 기대하고 이 나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데 호의적인 조선국왕의 위상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것입니다.
심심한 존경심과 충심으로.
 
각하의 충복
К. 베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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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 베베르가 М.Н. 무라비요프 백작에게 보낸 보고서 자료번호 : kifr.d_0004_010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