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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만주 문제의 발전에 관한 1902년 3월 26일 조약의 의미

Значение договора 26 марта 1902 года в развитии вопроса о Маньчжурии
  • 구분
    보고서
  • 발송일
    1903년 4월 25일(1903년 4월 25일)
  • 문서번호
    ГАРФ,ф.543,оп.1,д.183,лл.67-72об.
  • 원소장처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국방·군사/국제관계/전쟁
  • 주제어
    만주철병조약
  • 색인어
    러시아, 청국, 일본, 만주,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평화 회담, 시베리아철도 부설권
  • 형태사항
    12  , 타이핑  , 러시아어 
최근 10년간 극동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 중에 가장 큰 사건은 1894-1895년 청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태평양 연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열강들을 부추기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총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은 두 나라에 알려진 결과물 외에도 다음 세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1. 청국 군사력은 유럽을 침입할 만큼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주 취약한 상태임이 드러났습니다.
2. 일본은 극동 문제에 동등한 권리로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밖의 다른 논거들을 가지고 열강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3. 조선이 청국의 종속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광대 무원한 지역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는 청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꾼 이 결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인접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결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시모노세키 평화 회담주 001
번역주 001)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이 18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한 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개최한 회담으로 이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청·일 조약, 마관조약, 하관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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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청국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면서 아주 신속하게 청국에 대한 입장을 결정했습니다.
러시아는 청국으로부터 감사의 표현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이런 행동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후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아주 분명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러시아는 한 편으로는 무력한 청국의 사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강력한 일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계획은 러시아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1896년 러시아는 청국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권을 획득했고, 1898년에는 관동 지역에 대한 임차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우리 청국 정책의 표어인, 우리와 청국의 두 세기의 우호관계 유지라는 다른 해석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활동은 그 동기와 가끔은 모순되었습니다.
두 번째 계획은 거의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본의 군사적 성공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또 미카도 왕조는 극동 문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상호 관계는 몇몇 적대적인 분위로 인해 애매해졌으며 우리가 마련한 방안은 현실 정세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일본을 적으로 몰아세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을 우호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영국과 연합했고 일본은 우리 적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와 일본의 협상 근거는 충분했으며 협상은 실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시모노세키 평화 회담은 알려진 바대로 첫 번째 사안으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했습니다. 만일 우리는 적합한 방법으로 제공받은, 조선의 정세에 대한 정보에 근거해 조선이 청국의 지배를 벗어나 완전한 자주국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또 조선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열강들, 특히 이웃 러시아나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을 청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일본의 공적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으며 이 나라에 대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이해관계를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이웃 나라의 반도에 대한 입장을 조정할 수 있는 방안을 즉각 마련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가장 좋은 시기는 평화 회담 시기와, 전쟁 직후의 시기, 즉 약해진 일본이 고분고분해졌을 때였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1896년에도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을 피했는데 그 당시 대관식주 002
번역주 002)
1896년 5월 26일 거행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Ⅱ세의 대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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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참석했던 야마가타주 003
번역주 003)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 일본 제국 육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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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조선에 관한 일정한 협상을 하려는 진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간략한 협정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그 해 조선으로 재정고문과 교관들을 파견하고 은행을 개설하면서 조선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는 아직 일본에 대한 입장을 확정하지 않았고 복잡한 상황에 대비한 충분한 방안을 마련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곧 이런 시도들은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판명되면서 포기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많은 부분을 양보했고 일본은 조선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극동에서 일본과의 관계 조율이 필요하다는,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판단은 태평양의 군사력, 즉 해군과 육군을 강화시키도록 러시아를 부추겼습니다. 이것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만주에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러시아의 계획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탓으로 돌려졌던 공격적인 구상은 처음에는 큰 혼란을 불러왔으나 곧 잠잠해졌습니다. 대(大)시베리아 철도 공사로 많은 희생을 치른 러시아가 바다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또 만주에 철도를 부설하고 관동을 점령하면서 만주에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려는 열망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1900년 분규주 004
번역주 004)
의화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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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시작되자 러시아는 만주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청국과 다른 열강들은 러시아가 세 지역을 사실상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영토의 일부가 청국인의 침략을 받았던 러시아만은 청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으며 이후 그로 인한 모든 결과물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청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며 러시아가 만주로 군대를 이동시킨 것은 반란군과의 투쟁에서 청국 정부를 돕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반란군을 조직하고 지휘한 것은 청국정부였습니다. 1900년의 분규를 통해 러시아에 대한 청국의 적대적 분위기와 과거사에 대한 청국의 불만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우호의 원칙’이 승리했습니다.
영토를 점령할 의도가 없다는 러시아 정부의 통보는 그와 같은 문제 설정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였으며 이 통보는 청국과 열강들에게 러시아의 만주 정복 계획이 동요하고 있다는 첫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03년 3월 26일 조약주 005
번역주 005)
러시아와 청국 간의 만주철병 조약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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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결되었는데도 그들은 우리의 계획에 맞서는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청국은 러시아가 행한 양보의 의미를 정확하게 평가하지 않았고 다른 열강들도 그것을 청국에 대한 우호로 보지 않았으며 아무도 우호에 대해 진지하게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양보를 한 것은 단지 러시아가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만 해석되었습니다. 즉 제국의 혼란한 내정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쇠약해진 러시아가 극동에서 군사력을 충분히 준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설명은 3월 26일 조약이 일본이 항의를 한 이후에 조인되었다는 사실로 더욱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일본의 항의를 중요한 외교적 승리라고 특징지었습니다.
청국과 열강들은 이것을 참고와 지침으로 삼으면서 만주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선회했는데, 즉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이용하여 만주에서 러시아를 축출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청국 정부는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이전의 계획으로 즉각 선회하면서 그들은 이것이야 말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은 만주의 모든 일들을 열정적인 란시카오에게 맡기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는 자신의 가장 강한 군대의 일부를 러시아에 맞서 ‘왕조의 요람’을 지키는 데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복단주 006
번역주 006)
몽골어 보그도한 즉 거룩한 황제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16-17세기 러시아 문서와 다른 문학 작품에서는 청국의 황제를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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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만주에서 러시아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조약 체결을 완강히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너무 완강하다는 사실은 북경 주재 우리의 현재 대표단들도 이미 확실히 느끼고 있는데 우리 군의 퇴각으로 더 확연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부 열강들도 만주 진입을 위해 우리 군대가 철수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런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만주 점령권을 이용해 저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군대를 철수하게 되면 이 권리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군대를 철수한 이후부터 우리는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 밖에서는 다른 열강들과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며 물론 우리는 이를 최대한 이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혜국의 권리’에 따라 청국이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특권을 만주에서도 요구하면서 여러 지역에 우리 전권위원들을 남겨두면 아마 다른 국가들도 이 지역에 자신의 대표부를 파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청국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주에서 퇴각할 경우 가장 많은 정치적 이익을 얻게 될 나라는 일본인데 일본은 한편으로는 조선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린 청국 북부 지역을 근거지로 연안무역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면서 단계적으로, 하지만 끈질기게 이 지역에 깊이 침투해 들어갈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이미 만주에 훨씬 더 많은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자신들과 우호 관계를 원하는 청국정부의 협력을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과제를 경감시켜주면서, 또 아주 신속하게 우리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들의 만주 침투는 정치적 의미만이 아니라 커다란 상업적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환영하는 ‘문호 개방 원칙’을 이용하여 모두 이곳에서 러시아인들과 동등하게 노동과 자본의 투자처를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영리적 기업의식은 발전 정도가 미미하고 조직이 느슨하여 우리 상인들과 기업인들은 외국인들의 경쟁 상대가 안 될 것이며 외국인들은 만주에서 시작된 러시아의 무역과 공업의 맹아를 없애버리려 할 것입니다. 이 철도[동청철도]와 러청 은행은 외국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고 이 철도와 은행의 사업은 이미 영국인의 수중에 있는 산해관주 007
번역주 007)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이다. 명대 이후 북경이 수도가 되면서 인근한 산해관의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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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주 008
번역주 008)
영구(營口). 동북(東北) 요녕성(遼寧) 남부의 요하강(遼河江) 하류 동안에 위치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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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진주 009
번역주 009)
신민진(新民鎭). 현 요녕성 신민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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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그리고 아마 영구와 극동에 개설될 외국 은행들의 지부와의 경쟁으로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만주에서 철군하는 것은 외국인이 만주에 들어오는 오는 것을 허용하면서, 우리의 특별한 영향을 없던 일로 한 후, 정치, 상업적 관계에서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향을 복원하려면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그런 노력과 희생은 결국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결과에 상응하지 못할 것이며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만주 철군의 결과는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만주에서 철군하면서, 러시아는 러시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 주민들을 그냥 남겨두게 되는 것인데, 만주가 우리의 국경과 인접해 있고,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철도가 통과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 이런 상황의 중요성은 폭동 이후 의화단원들과 도망쳐 온 군인들만 남겨진 그 지역 주민의 대부분은 땅과 집이 없다는 사실로 배가될 것입니다. 즉 그 지역의 거의 모든 지역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터지면 우리의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전장(戰場)이란 의미로 볼 때 전혀 준비가 안 된 지역으로 진입해야만 하는데, 더구나, 이 전장의 주변에는 십중팔구 우리의 예상 적군인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무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한편으로는 한국에서의 입지를 이용하여 압록강을 선점하고 압록강 우안으로 침입해 올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일본과 청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청국과 동맹을 맺고서 자국 병력이 아닌 청국 병력을 가지고 산해관 쪽에서 공격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쪽 방면으로 가는 도정은 요하강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구에 이르는 철도와 신민진 지선에 의해 수월할 것입니다. 이 두 방면은 의심할 바 없이 전략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 여순항의 후방으로 작전을 펼 수 있으며 우리 군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우리가 철군하게 되면 적은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불리한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에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즉 우리 군대가 만주에서 철군하면 여순항은 완전히 고립될 것이고, 전쟁이 터지면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해 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도를 통한 유일한 연결로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지역을 따라 나있으므로 증원군이 그곳으로 제때 도착하는 것을 보장할 수 없으며, 조선과 만주에 상륙한 적에게 포위당한 여순항 요새를 구하는 데 필요한 우리 병력을 여순항에 충분히 가까이 집결시키는 것조차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여순항을 잃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극동에서 러시아가 누리던 위상에 가혹하고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줄 것입니다. 만일 여순항을 지키게 되더라도, 현재 주둔군의 능력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예비부대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점의 영향을 받아, 결정적인 행동을 개시할 때까지 전쟁을 지연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적들은 대규모 군사를 상륙시키면서, 후방을 조직하고 첫 해전에서 파손된 전함들을 수리하면서 동시에 청국과 연합하여 만주 지역으로 청군을 이동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군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을 테지만, 연락로에서는 여전히 아주 불편을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다른 열강들도 다양한 형태의 국제적 연계를 조직할 것인데 이것은 완전히 개연성이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일본과 분점을 한다면 러시아가 극동의 주인이 될 것이란 점이 모두에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켜야만 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과도 전쟁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러시아는 대규모의 자금과 인적 자원, 시간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우리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은 유럽 방면 러시아에 지극히 어려운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우리가 극동에 쏟고 있는 관심 정도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이 모든 것을 1902년 3월 26일 체결한 협정과 관련하여 고려해야만 합니다. 물론 상술한 것들을 정리하면, 대규모 자금과 피의 희생을 치른 지금, 러시아는 만주 문제에서 1900년 전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그 문제에 대한 청국 자체와 다른 열강들의 입장 선회인데 러시아가 반드시 만주를 점령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러시아의 배타적 영향력으로부터 이 지역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열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관심이 있는 열강들은 정치, 경제적 개입과, 어쩌면 전쟁의 위협까지 불사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시킬 것입니다.
이상에서 기술한 극동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상황으로 볼 때 우리는 계속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외국인들의 경제적 침투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만주를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오랜 동안 잃어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위상도, 극동에서 자신의 위상 확립을 위해 러시아가 치른 커다란 희생도 이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더 이상 양보하지 않고 정규적으로 강화시킨 군사력으로 적에게 반격을 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첨예한 긴장 없이, 유럽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전쟁은 그 결과가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양보를 하게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양보를 하게 되어 소소한 성공만 거두고 노력한 만큼의 결과물이 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극동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입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양보 정책을 중단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기에 전쟁이 발발 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는 1902년 3월 26일 조약 체결로 만주에서 철군하면서, 그 어떤 국가에게도 만주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양보할 계획이 없으며,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런 결의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청국과 열강들에게 납득시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각오를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 국가는 즉시 거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치른 불가피한 희생은 그 결과로써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보상 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원치 않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전쟁을 치를 준비가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명확하게 인지한다면 감히 누구도 이 전쟁을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903년 4월 25일.

  • 번역주 001)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이 18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한 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개최한 회담으로 이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청·일 조약, 마관조약, 하관조약)을 체결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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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어 보그도한 즉 거룩한 황제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16-17세기 러시아 문서와 다른 문학 작품에서는 청국의 황제를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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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이다. 명대 이후 북경이 수도가 되면서 인근한 산해관의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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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구(營口). 동북(東北) 요녕성(遼寧) 남부의 요하강(遼河江) 하류 동안에 위치한 도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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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진(新民鎭). 현 요녕성 신민시 지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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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문제의 발전에 관한 1902년 3월 26일 조약의 의미 자료번호 : kifr.d_0002_004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