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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제 2 장

주무부서[외무부]의 정책

{일본에 대해 여순 항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경향}

만주에서 우리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한국에 있는 우리 관영 기업을 폐쇄한다는 외무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잘못된 평가에서 나온 것이다. 1) 한국에서 사업적 관계를 상실하면서 우리가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고 그것을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 기업들의 의미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2) 일본에 대해 여순 항이 지니는 군사-정치적 의미에 대한 잘못된 평가.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여순 항을 포함한 요동 반도에 대한 양보와 한국 독립에 대한 인정을 얻었다고 밝혔다. (한국의 독립에 대해 일본은 1895년뿐 아니라 그 후에도 비상한 주의를 기울였다). 1898년 조선 국왕이 황제를 선포하게끔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며, 더구나 1903년에는 러시아에게 ‘한국의 독립과 영토 불가침’을 인정하라고 강변하면서도 별도의 단서를 달아, 일본은 한국에서 자기 이익의 ‘우월적’ 특권을 누릴 것이며, 더불어 한국에 통치 기관 정비를 위한 자문과 도움을 줄 권리와,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일본군의 한국 파견 권리 등을 갖는다고 하였다.
의도가 담긴 이 은폐된 표현들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통치의 지향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의 단독 협정으로 한국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통치를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이 러시아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한국의 종주국이었던 1895년의 조약에서는 이것이 가능했었다. 일본이 당시 이것을 공식화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오직 러시아와 다른 열강의 항의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국 보다 훨씬 작은, 여순 항을 포함한 요동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빼앗으려는 시도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런 우려는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일본이 여순 항을 획득하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일본에게 이 해양 요새는 잉여의 항구이자 특히 진입구가 좁고 만이 얕은 등의 자연적 결함이 있는 상황에서는 중요성이 없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은 여순 항을 전략적 위치로서 평가했으며 이런 면에서 이 항구의 거대한 의미는 다툴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치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한국과의 연관해서만 그러한 것이다.
일본이 여순 항을 점령한 상태에서는, 일본 영토로 양면에서 포위되고 국제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약체 국가인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
한국을 방어하려 할 때, 여순 항은 공격하는 군대, 즉 중국군이나 러시아군의 상당 부분을 자기 쪽으로 분산시킬 것이다.
한국이나 남만주에서 그 북쪽으로 러시아나 중국을 공격하려 할 때, 여순 항이 일본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여순 항은] 일본군의 거점이 될 것이다. 반면 그 적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일본 공격군을 묶어두게 된다.
한국이 (일본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독립’된 상태에서 [러시아가] 여순 항을 점령하고 있으면 일본군이 공격을 해올 경우 남만주의 편리한 교통(요하강)과 더불어 풍부한 식량 자원을 이용하기가 극히 쉬울 것이다.
달리 말해서 여순 항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한국과 남만주를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공격 기지로 이용하는 데서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열쇠이다.
요컨대 러시아가 여순 항을 장악하고 있고 이를 통해-특히 철도 연결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두만강을 맞대어 한국과 이웃한 상황에서-남만주에서 배타적인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더라도 한국에서의 양보, 더구나 관념적인 양보로써 일본에게 어떤 보상도 해줄 수는 없었다.
일본에 유리하도록 우리가 여순 항을 양보하고 남만주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만이 초기에 일본을 만족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럴 경우 우리는 일본의 군사적 지위를 극히 강화시켜주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상황[일본의 군사적 지위 강화]은 곧이어 북만주에서도 우리가 철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블라디보스토크와 우리의 연락로를 위험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순 항을 점령한 이상 우리에게는, 전쟁을 경고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승리할 기회를 잡기 위해 극동에서 군사적 노력을 강화하는 것 말고 다른 논리적 출구가 없었다. 이런 필요성을 우리 정부 부처들은 정당히 평가하지 않았다. 이런 오류가 생기게 된 것은 오직, 일본에게는 여순 항이 지니는, 우리에게는 한국, 특히 한국 북부가 지니는 거대한 군사-정치적 의미를 잘못 평가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일본의 정치 계획의 폭 및 로바노프의 방침에 담긴 깊은 의미를 완전하게 숙지하지 못했던 때문이다.
한국에서 우리 모든 기업을 폐쇄하고 한국에 자기 운명을 맡기면서 우리 부처들은 만족했던 것 같다. 중국만을 계산하고 일본은 무시한 채 이런 상황에서라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별 어려움 없이 확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상황 전체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만주에서 우리 정책의 새로운 방침}

외무부는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면서, 이런 양보가 태평양의 따뜻한 물에 우리가 사실상 진입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그리고 만주에서의 우리의 영향력 확대에 대해 일본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한 관념적인 양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만주 문제에 관한 러-중 관계에 ‘제3의’ 강국, 즉 일본이 개입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원칙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라 간주했으며, 외무부는 외국 외교관들과의 구두 해명에서뿐 아니라 각서 및 ‘정부 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일 교섭을 통해 이 원칙을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심지어는 외교관계가 이미 단절된 후 로젠 남작이 도쿄에서 받은 마지막 각서에는 ‘만주와 그 연안지대가 일본의 이해관계 밖에 있다는 것을 일본이 인정’하도록 단호히 요구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일본은 우리의 관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최소한 중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우리 외무부는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될 근거는 매우 희박했다. 중국은 1895년에 우리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그 덕택에 1896년 5월 22일과 1898년 3월 15일 러시아 정부와 개별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1896년 8월 27일에는 러-청은행과, 1898년 6월 24일에는 동청철도회사와 협정을 맺었다.
물론 이런 모든 자료만으로도 중국은 형식상으로는 우리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 진실하다는 근거는 아직 아니었다. 1895년 중국은 러시아를 필요로 했지만 얼마 안 돼서 이제는 우리가 중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은 하루 빨리 우리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겉으로 볼 때 이홍장은 러시아와의 협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무엇보다 국가 고위 관료였고 애국자였다. 열강들이 장기 조차의 형태로 중국 연안지역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어떤 나라는 25년, 다른 나라는 99년, 또 다른 나라는 아직 다른 나라의 조차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조건을 얘기하는 식의-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할지도 모를 명백한 위험에 이홍장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 외교가 설정한, 정말로 불가능하기까지 한 난제는 바로 이런 우려를 예방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신뢰’로 귀결되었는데, 이것[신뢰]은 중국의 거대한 한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가 중국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화려하게 약속을 하긴 했으나 언제나 단서나 조건을 달았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 정부가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우호적인 협력을 제안한 쪽의 자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사실상 중국은 우리를, 우리는 중국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본질상 그럴 수도 없었다.
 

{재무부의 사업}

중국 정치의 확고함에 대한 실질적인 어떠한 보장도 없고, 그리하여 결국은 만주에서 우리의 지위 전체가 없으면서도, 재무부는 타국에 러시아의 물질적 이해관계라는 거대한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동치는 상황에서라면 어떤 민간인도 자기 저금을 투자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적인 자금과 노동이 만주에서 러시아 상공업 건설과 국가적 건설에 과감하게 투여되었다. 몇 백만 루블이 아니라 몇 천만, 몇 억만 루블이 거기로 흘러들어갔다.
철도가 건설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해안 지대에 대련시가 생겨났다. 이 도시는 잘 짜인 계획 아래 이루어졌으며 유럽식의 석조 건물과 항구 시설, 강변도로, 제방, 전기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서 주민들이 스스로 입주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만주에는 거대한 공업 기업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업들은 재무부 요원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이 방면의 문제는 이미 1895년에 러-청은행의 설립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 은행은 곧 이어 동청철도회사를 분리시켰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재무부는 법률상으로는 민간 회사이지만 실제로는 국영인 러시아 광공업 회사(Русское Горнопромышленное товарищество), 동아시아 기선 회사(Общество Восточно-азиатского пароходства), 금광회사의 단초 기관 등을 설립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그 후 다른 상황도 생겨났으며, 군사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관세, 행정, 위생, 이주(철도통과지역에 거주시키기 위한), 교회, 보통 교육, 영사 문제들도 발생했다. 그 다음에는 철도역을 위해 작은 규모의 요새를 구축하고, 철도수비대를 위해 적합한 군대를 창설해야 했다.
이와 같이 만주를 우리 영토로 병합하지 않고 그곳의 복단(Богдыхан)주 020
번역주 020)
몽골어의 ‘신성한 군주’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 황제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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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권력을 유지시키면서 만주와 우호관계를 형성하기를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고 또 아무리 우리가 평화 애호적이었더라도, 우리는 사실상으로는 아주 불가피하고도 철저하게 구래의 황인종 국가에 새로운 백인종 국가를 세우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토착민, 반(半)자치적인 만주 당국, 북경 정부, 복단의 통치 권력과 비타협적인 충돌을 빚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떤 영토의 경계에서, 어떤 실무적 범위에서 멈춰야하는지 지시하기는 불가능했다.
보기에 1천 2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만주는 러시아 정부에게서 봉급을 받는 인물만을 매개로 하여 러시아 국가라는 유기체로 점차 흡수될 예정이었다.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아무런 보장도 없고 전반적으로 불투명한 상태에서는 러시아 민간 자본의 유입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얼빈 시의 급성장은 얼핏 보기에 이런 견해를 뒤집는 것 같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하얼빈이 끌어들이는 것은 러시아 자본가가 아니라 러시아 정부 관리가 쓰는 나랏돈을 한 몫 챙기려는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다.
주요 정치 방침이 잘못됨으로 인해 재무부의 이색적인(экзотическое) 건설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는 조만간 사건들에 의해 드러났다.
 

{1900년 만주에서의 사건들}

만주에서 러시아의 거대한 건설 사업은 전 세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고 1900년 6월 27일까지는 아주 평온하게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날 묵덴주 021
번역주 021)
한 때 봉천(奉天)으로 부름. 현재의 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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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 치치하얼의 주지사들은 동청철도의 직원들에게 모든 철도 소유권을 중국 관리에게 넘기고 만주에서 떠나라는 돌발적인 제안을 하였다.
다음 날 하일라르(Хайлар)주 022
번역주 022)
해랍얼(海拉尔). 내몽골 자치주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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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중국총사령관 쥬엔(Тзюэн)의 대변인이 나타나 러시아인이 즉시 중국 영토를 떠나지 않으면 중국군은 러시아인에게 적대 행위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리겠다는 경고를 하였다.
7월 2일 중국군이 블라고베센스크 시에 대해 아무르 강 우안에서 폭격을 개시했다.
지역의 비적뿐 아니라 군인 같은 거대한 중국인 무리가 철도역을 포위하고 러시아인을 때리고 철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무르에서 해안지역까지 이 지역 전체를 사실상 정복했다.
중국 정부는 동양에서는 흔히 보는 이중적인 얼굴로, 그들이 우리에게 벌인 전쟁이 마치 중국 폭동자(의화단)들의 만행인 것처럼 해명했다.
러시아 사업의 장래를 위해서는 돌발적이고 어떤 이유도 없이 우리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 색칠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공격-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우려를 자아낼 것이었는데-은 우리가 세운 과업과, 그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현존 수단의 미미함 사이에는 정말로 거대한 불균형이 있다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당국 측이 적대감을 표출함으로써 우리는 이후 낯선 지역에 평화적으로 머물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정의 진실성이란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00년의 이른바 의화단 폭동은 중국 정부가 주로 러시아 철도와 러시아를 향해 일으킨 것으로서 ‘서양의 야만인’ 전반에 대한 적대감의 기반 위에서 벌어졌다. 중국인들은 백인종의 여러 민족들에 대해 어떤 구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 교회가 공격을 받았으며 그 뒤에는 북경에서 독일 공사 케틀레르 남작이 살해되었다. 그 후 각국의 모든 공사들이 성난 군중과 중국 군인을 피해 마찬가지로 포위당해 있던 영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모든 열강의 공동 군사 행동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도 포위당한 사람들을 구하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목적으로 7월 1일 천진(Тянцзин)을 점령하였고, 8월 2일에는 리노비치 장군이 북경을 점령했다. [중국]조정은 거기서 미리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본질적으로 말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국 내의 러시아의 지위는 그 당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 모든 열강이 오직 소규모의 상륙 부대만을 발해 만(Печелийский залив)에 상륙시켰지만, 러시아는 그것 말고도 만주에 대군을 끌어 들였으며, 그렇게 하여 전장(戰場)에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을 보유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2) 모든 열강은 그 외교 대표와 선교사, 신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만, 러시아는 그것을 넘어서서 아주 중요한 자기 교통로의 향후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국경을 수호하고 있었다.
상황은 우리에게 최고로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심지어 다른 열강들과 공동의 과제를 좇고 있던 직례성(Печжилийская провинция)에서 러시아 해군제독의 의미는 압도적이었다.
북경을 점령하고 공사관을 구함으로써 중국에서 열강의 공동 행동의 최우선 과제가 달성되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우리는 중국에 대한 다른 열강들과의 동맹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공동 행동에서 벗어나 중국 편에 설 것인가?
이 문제는 1900년 6월 11일자 정부 보도에서 이미 해결된 것처럼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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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자료번호 : kifr.d_0002_0040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