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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선덕 5년 정화(鄭和)가 호리(呼里)사람과 같이 천방에 갔는데 돌아갈 때 배신(陪臣)을 딸려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등의 내용

  • 국가
    천방(天方)
선덕 5년(1430)에 정화(鄭和) 주 001
각주 001)
鄭和(1371~1434?): 雲南 昆陽縣의 가난한 무슬림 집안 출신으로 본래 성은 馬氏였으며, 永樂 연간(1403~1424)에 여섯 차례, 宣德 연간(1426~1435)에 한 차례 등 총 일곱 차례에 걸쳐 30여 개 나라를 항해한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 모두 메카를 순례할 정도로 독실한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외 정황을 잘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明軍의 雲南 정복전쟁 와중에서 포로가 된 그는 거세되어 火者가 되었다가 燕王 朱棣 밑으로 들어가 환관으로 복역하였다. 후에 燕王 측이 일으킨 봉기 즉 ‘靖難의 役’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면서 승진을 거듭하여 內官監 太監에 임명되었던 한편, 영락 2년(1404)에 ‘鄭’이라는 姓을 하사받았다. 永樂 3년(1405)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부사 王景弘 등을 데리고 해외 원정에 처음 나섰으며, 이후 1405년 말, 1409년 가을, 1413년 겨울, 1417년 겨울, 1421년에 각각 동남아와 이슬람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다다랐다. 마지막 원정은 약 10년 후인 宣德 6년(1431) 12월에 출항하여 점성과 말라카, 인도 남안에 이르렀다. 그의 원정에는 대개 각각 3만 내외의 인원과 수십 척의 선박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으로 동남아 일대 여러 나라들과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이는 세계 항해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일설에는 황위를 찬탈당한 建文帝가 죽지 않고 해상으로 도망갔다는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영락제가 이처럼 여러 번에 걸친 해외 원정을 단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원정을 수행한 馬歡, 費信, 鞏珍 등에 의해 각기 『瀛涯勝覽』, 『星槎勝覽』, 『西洋番國志』 등의 저작이 나오게 됨으로써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은 동남아시아는 물론 인도, 아프리카 방면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로 많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각지로 진출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정화는 그 후 神으로 받들어졌으며, 그를 제사하는 三寶廟는 현재에도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 한편 鄭和의 사망 시기는 대개 마지막 원정 도중으로 보지만, 宣德 10년(1435)에 南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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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西洋)으로 출사할 때, 나누어 파견한 한 무리가 고리(古里)에 이르렀다. 고리에서 파견한 사람이 천방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이에 사람을 보내 화물(貨物)을 가지고 그 배에 태워 함께 가도록 하였다. 오고가는 데 1년이 걸렸는데, 기이하고 진귀한 보물 및 기린·사자·낙타·닭을 매입하여 돌아왔다. 그 국왕도 배신(陪臣)주 002
각주 002)
陪臣: 중국 고대 諸侯의 大夫들이 천자에 대해 자신들을 배신이라 불렀다. 즉 제후는 천자에 대해, 대부의 가신들은 제후에 대해 각각 누층적인 신하관계에 있는 중신이기 때문에 배신이라 했다. 여기서 ‘陪’의 의미는 ‘傭’ 혹은 신하의 뜻이다. 여기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하러 온 이웃나라의 사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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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공사신에 딸려 보내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선종(宣宗)은 기뻐하며, 등급을 올려 하사품을 주었다. 정통 원년(1436)에 비로소 조와(爪哇) 주 003
각주 003)
爪哇: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일대를 가리킨다.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최초의 국가인 葉調가 출현하였다. 기원후 3~7세기 사이에는 수많은 小國과 部落이 혼재하였다. 7~10세기 사이에는 大國인 室利佛逝(Srivijaya) 왕국과 중국 측 使者와 상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7~14세기 사이에는 佛敎가 전파되었고, 13세기 말~14세기 초에는 爪哇에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마자파힛(滿者伯夷)이 건립되었다. 계보 상으로는 싱오사리의 부흥 왕조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싱오사리-마자파힛’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자파힛은 싱오사리의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자바와 수마트라는 물론 보르네오 섬이나 순다 지역 등 주변 여러 섬 및 서부 해안 지대까지 장악하였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치적 단일 공동체의 원형을 마련한 데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자파힛 왕국은 힌두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합된 형태를 가지는 최후의 국가이기도 하였다. 마자파힛이 14세기 후반부터 급속도로 쇠퇴하는데, 이후 힌두-불교 왕국이 사라지면서 인도네시아 전 지역이 빠른 속도로 이슬람화되었다. 농업과 교역의 발달을 배경으로 번성을 누리던 마자파힛 왕국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국가인 말라카 왕국이 수립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爪哇 각지에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자파힛은 결국 이들 이슬람 왕국 중 爪哇 동북부 해안 지대의 데막(Demak)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鄭和가 西洋으로 出使할 때 인도네시아를 지나갔는데, 말라카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인이 진출하여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네덜란드가 가장 많은 영토를 점령하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세워 이곳에 대하여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1799년에 동인도회사가 해산된 뒤에는 네덜란드 정부가 식민지를 직접 관할하였는데, 이를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현지인들은 자치를 쟁취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투항 소식이 전해진 뒤에 인도네시아는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다. 네덜란드는 1949년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할통치권 포기를 선포하여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최병욱, 2006: 317~338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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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공선(進貢船)에 태워 돌아가도록 명하고, 채폐 및 칙서를 하사하여 그 국왕을 표창했다. [정통] 6년(1441)에 왕이 아들 새역득아력(賽亦得阿力) 주 004
각주 004)
賽亦得阿力: 사이드 알리(Sayyid Ali)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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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사신 새역득합삼(賽亦得哈三) 주 005
각주 005)
賽亦得哈三: 사이드 하산(Sayyid Hasan)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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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어 진귀한 보화를 가지고 내조하여 공물로 바쳤다. 육로로 합날에 이르러서 도적을 만났는데, [도적이] 사신을 죽였으며, 왕의 아들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히고 공물을 다 빼앗아 달아나니, 수신에게 명하여 조사하여 치죄(治罪)토록 하였다.주 006
각주 006)
이에 관한 내용은 『英宗實錄』 卷84 正統 6년 10월 甲子條 참조. 한편 守臣은 實錄에는 禮部와 兵部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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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鄭和(1371~1434?): 雲南 昆陽縣의 가난한 무슬림 집안 출신으로 본래 성은 馬氏였으며, 永樂 연간(1403~1424)에 여섯 차례, 宣德 연간(1426~1435)에 한 차례 등 총 일곱 차례에 걸쳐 30여 개 나라를 항해한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 모두 메카를 순례할 정도로 독실한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외 정황을 잘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明軍의 雲南 정복전쟁 와중에서 포로가 된 그는 거세되어 火者가 되었다가 燕王 朱棣 밑으로 들어가 환관으로 복역하였다. 후에 燕王 측이 일으킨 봉기 즉 ‘靖難의 役’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면서 승진을 거듭하여 內官監 太監에 임명되었던 한편, 영락 2년(1404)에 ‘鄭’이라는 姓을 하사받았다. 永樂 3년(1405)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부사 王景弘 등을 데리고 해외 원정에 처음 나섰으며, 이후 1405년 말, 1409년 가을, 1413년 겨울, 1417년 겨울, 1421년에 각각 동남아와 이슬람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다다랐다. 마지막 원정은 약 10년 후인 宣德 6년(1431) 12월에 출항하여 점성과 말라카, 인도 남안에 이르렀다. 그의 원정에는 대개 각각 3만 내외의 인원과 수십 척의 선박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으로 동남아 일대 여러 나라들과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이는 세계 항해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일설에는 황위를 찬탈당한 建文帝가 죽지 않고 해상으로 도망갔다는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영락제가 이처럼 여러 번에 걸친 해외 원정을 단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원정을 수행한 馬歡, 費信, 鞏珍 등에 의해 각기 『瀛涯勝覽』, 『星槎勝覽』, 『西洋番國志』 등의 저작이 나오게 됨으로써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은 동남아시아는 물론 인도, 아프리카 방면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로 많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각지로 진출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정화는 그 후 神으로 받들어졌으며, 그를 제사하는 三寶廟는 현재에도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 한편 鄭和의 사망 시기는 대개 마지막 원정 도중으로 보지만, 宣德 10년(1435)에 南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陪臣: 중국 고대 諸侯의 大夫들이 천자에 대해 자신들을 배신이라 불렀다. 즉 제후는 천자에 대해, 대부의 가신들은 제후에 대해 각각 누층적인 신하관계에 있는 중신이기 때문에 배신이라 했다. 여기서 ‘陪’의 의미는 ‘傭’ 혹은 신하의 뜻이다. 여기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하러 온 이웃나라의 사신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爪哇: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일대를 가리킨다.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최초의 국가인 葉調가 출현하였다. 기원후 3~7세기 사이에는 수많은 小國과 部落이 혼재하였다. 7~10세기 사이에는 大國인 室利佛逝(Srivijaya) 왕국과 중국 측 使者와 상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7~14세기 사이에는 佛敎가 전파되었고, 13세기 말~14세기 초에는 爪哇에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마자파힛(滿者伯夷)이 건립되었다. 계보 상으로는 싱오사리의 부흥 왕조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싱오사리-마자파힛’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자파힛은 싱오사리의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자바와 수마트라는 물론 보르네오 섬이나 순다 지역 등 주변 여러 섬 및 서부 해안 지대까지 장악하였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치적 단일 공동체의 원형을 마련한 데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자파힛 왕국은 힌두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합된 형태를 가지는 최후의 국가이기도 하였다. 마자파힛이 14세기 후반부터 급속도로 쇠퇴하는데, 이후 힌두-불교 왕국이 사라지면서 인도네시아 전 지역이 빠른 속도로 이슬람화되었다. 농업과 교역의 발달을 배경으로 번성을 누리던 마자파힛 왕국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국가인 말라카 왕국이 수립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爪哇 각지에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자파힛은 결국 이들 이슬람 왕국 중 爪哇 동북부 해안 지대의 데막(Demak)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鄭和가 西洋으로 出使할 때 인도네시아를 지나갔는데, 말라카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인이 진출하여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네덜란드가 가장 많은 영토를 점령하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세워 이곳에 대하여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1799년에 동인도회사가 해산된 뒤에는 네덜란드 정부가 식민지를 직접 관할하였는데, 이를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현지인들은 자치를 쟁취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투항 소식이 전해진 뒤에 인도네시아는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다. 네덜란드는 1949년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할통치권 포기를 선포하여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최병욱, 2006: 317~338 등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賽亦得阿力: 사이드 알리(Sayyid Ali)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賽亦得哈三: 사이드 하산(Sayyid Hasan)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에 관한 내용은 『英宗實錄』 卷84 正統 6년 10월 甲子條 참조. 한편 守臣은 實錄에는 禮部와 兵部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정화(鄭和), 선종(宣宗), 새역득아력(賽亦得阿力), 새역득합삼(賽亦得哈三)
지명
서양(西洋), 고리(古里), 고리, 천방, 조와(爪哇), 합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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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 5년 정화(鄭和)가 호리(呼里)사람과 같이 천방에 갔는데 돌아갈 때 배신(陪臣)을 딸려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등의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3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