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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宣德) 원년으로부터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자 채폐 등으로 보답하였는데, 성화(成化) 원년 조공을 제한하니 이후로 거의 행해지지 않게 됨

  • 국가
    별실팔리(別失八里)
선덕 원년(1426)에, 선덕제는 그들이 조정을 공경하게 섬기는 것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보초(寶鈔)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이듬해(1427)에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니, 그 정사와 부사에게 지휘와 천호(千戶)주 001
각주 001)
千戶: 明代 각 지역에 주둔하는 衛所制下 世襲職의 하나인 千戶所의 長으로서 軍戶 1,120명을 거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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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각각] 제수하고 고명(誥命)주 002
각주 002)
誥命: 誥勅이라고도 한다. 황제가 관원을 임명하거나 追贈하는 데 사용하는 문서이다. 명대에 公·侯·伯을 追封할 경우에는 모두 1등급을 승진시켰고, 3품 이상으로 정치의 업적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死諫·死節·陣亡者는 모두 贈官하였다. 現任에 있는 자가 처음으로 散階를 제수 받거나, 京官으로 一考(즉, 3년간의 평가)가 끝난 자 및 外官으로 一考가 끝난 자 중에서 성적이 으뜸인 자에게는 모두 본인에게 誥敕을 지급하였다. 7품 이상인 자는 모두 그 선조를 推恩할 수 있었으며, 5품 이상은 誥命을, 6품 이하는 敕命을 내려 제수하였다. 살아있는 자에게 제수하는 것을 封이라 하고, 죽은 자에게 제수하는 것을 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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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관대(冠帶)주 003
각주 003)
冠帶: 帽子와 腰帶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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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하니, 이로부터 사신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선덕] 3년(1428)에 낙타와 말을 바치니, 지휘 창영(昌英) 등에게 명하여 새서·채폐를 가지고 가서 보답토록 하였다. 당시 왜사가 연년 공물을 바쳤고, 그 모친 쇄노단(鎖魯檀) 합돈(哈敦) 주 004
각주 004)
鎖魯檀哈敦: 술탄 카툰(Sultan Khatun)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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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또한 3년 연속으로 와서 공물을 바쳤다. 왜사가 죽자 아들 야선불화(也先不花) 주 005
각주 005)
也先不花: 에센부카(Esen Buqa)의 音譯으로서, 차가타이의 칸 篤哇의 아들이다.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의 제13대 大汗으로서 어렸을 때에는 大都에 머물렀는데, 1308년 혹은 1309년에 제1차 연회에서 篤哇의 幼子 怯別이 차가타이의 칸 塔里忽을 암살했다. 1310년에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새로운 可汗으로 추대되었는데, 에센부카는 처음에는 元朝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후에는 邊界 문제로 인하여 元朝, 伊利 칸국과 충돌했으며, 元 仁宗과 이리 칸국 完者都의 挾擊을 받았다. 1320년 에센부카 死後에 동생 怯別이 復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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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뒤를 이었다. 정통 원년(1436)에 사신을 파견하여 내조해서 방물을 바쳤는데, 후에도 빈번히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작고한 국왕인 왜사의 사위 복새인(卜賽因) 주 006
각주 006)
卜賽因: 張文德은 卜賽因을 撒馬兒罕傳의 卜撒因, 母撒과 함께 黑婁王 母賽를 가리키는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다(張文德, 2001: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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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정통] 10년(1445)에 야선불화가 사망하자 야밀력호자(也密力虎者) 주 007
각주 007)
也密力虎者: 에밀호자(Emil Khwaja)의 音譯인데, 자료에 따라 也密力火者, 亦迷力火者 혹은 也乜力火者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明史』 卷332 「西域」4 別失八里에 “正統十年, 也先不花卒, 也密力虎者嗣”라 기록되어 있는 바, 그는 也先不花를 뒤이은 別失八里의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亦力把里地面也先不花並妃虎都速旦·頭目舍剌, 土魯番地面密力虎者王並妃古瓦兒速檀等·頭目馬麻光兒咱等, 察力失地面也密力虎者王·姐打賴悶等·頭目打剌兒……等一百二十一處地面頭目俱遣使來貢馬(『英宗實錄』 卷224 景泰 3년 12월 己丑朔條)”라는 내용에서 그는 土魯番과 察力失(焉耆)의 왕으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 무렵 그는 別失八里(亦力把里), 土魯番, 察力失 세 나라의 왕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의 實錄 기사에 亦力把里의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의연히 재위하여 명에 조공을 하고 있는데, 에밀호자(也密力火者)가 곧 東차가타이의 에센부카汗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劉國防,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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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듬해(1446) 말·낙타·방물을 바치니, 채폐를 왕과 왕의 모친에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경태 3년(1452)에 옥석 3,800근을 공물로 바쳤는데, 예부의 관원이 그것은 쓸 수 없는 것이라 말하였으나, 조서를 내려 모두 거두도록 하고, 2근당 비단 1필씩 하사하였다. 천순 원년(1457)에 천호 우지경(于志敬) 등에게 명하여 복벽(復辟)주 008
각주 008)
復辟: 일찍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將軍 石亨·廷臣 徐有貞·宦官 曹吉祥 등이 景泰 8년(1457)에 景泰帝의 병세가 악화되어 재기가 어렵게 되자, 奪門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쿠데타를 일으켜 南宮에 유폐 중이던 英宗을 다시 帝位에 앉힌 사건을 말한다. 재차 帝位에 오른 영종은 연호를 天順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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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그 왕에게 알리고, 아울러 채폐를 하사하였다. 성화 원년(1465)에 예부의 관원 요기(姚夔) 주 009
각주 009)
姚夔(1414~1473): 字는 大章이고 號는 損庵이며, 桐廬坊郭(지금의 桐廬鎭) 사람이다. 正統 7년(1442)의 進士로 吏科給事中에 제수되었으며, 景泰 원년(1450)에 南京 刑部右侍郞에 발탁되고 景泰 4년(1453)에 禮部侍郞이 되었으며, 天順 7년(1463)에는 禮部尙書가 되어 知貢舉를 맡았다. 成化 5년(1469)에 兵部尙書로 전임하였고, 太子少保에 보임되었다. 成化 9년(1473)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諡號는 文敏이며, 『姚文敏集』 8권을 남겼다. 본문에는 禮官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成化 원년(1465) 당시 姚夔의 관직은 禮部尙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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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서역의 조공 기한을 정하여, 역력파리(亦力把里)는 3년 혹은 5년에 한 번 조공하도록 하고, 사절은 10명을 넘지 않도록 하니, 이로부터 조공이 드디어 거의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 각주 001)
    千戶: 明代 각 지역에 주둔하는 衛所制下 世襲職의 하나인 千戶所의 長으로서 軍戶 1,120명을 거느린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誥命: 誥勅이라고도 한다. 황제가 관원을 임명하거나 追贈하는 데 사용하는 문서이다. 명대에 公·侯·伯을 追封할 경우에는 모두 1등급을 승진시켰고, 3품 이상으로 정치의 업적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死諫·死節·陣亡者는 모두 贈官하였다. 現任에 있는 자가 처음으로 散階를 제수 받거나, 京官으로 一考(즉, 3년간의 평가)가 끝난 자 및 外官으로 一考가 끝난 자 중에서 성적이 으뜸인 자에게는 모두 본인에게 誥敕을 지급하였다. 7품 이상인 자는 모두 그 선조를 推恩할 수 있었으며, 5품 이상은 誥命을, 6품 이하는 敕命을 내려 제수하였다. 살아있는 자에게 제수하는 것을 封이라 하고, 죽은 자에게 제수하는 것을 贈이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冠帶: 帽子와 腰帶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鎖魯檀哈敦: 술탄 카툰(Sultan Khatun)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也先不花: 에센부카(Esen Buqa)의 音譯으로서, 차가타이의 칸 篤哇의 아들이다.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의 제13대 大汗으로서 어렸을 때에는 大都에 머물렀는데, 1308년 혹은 1309년에 제1차 연회에서 篤哇의 幼子 怯別이 차가타이의 칸 塔里忽을 암살했다. 1310년에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새로운 可汗으로 추대되었는데, 에센부카는 처음에는 元朝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후에는 邊界 문제로 인하여 元朝, 伊利 칸국과 충돌했으며, 元 仁宗과 이리 칸국 完者都의 挾擊을 받았다. 1320년 에센부카 死後에 동생 怯別이 復位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卜賽因: 張文德은 卜賽因을 撒馬兒罕傳의 卜撒因, 母撒과 함께 黑婁王 母賽를 가리키는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다(張文德, 2001: 27~28). 바로가기
  • 각주 007)
    也密力虎者: 에밀호자(Emil Khwaja)의 音譯인데, 자료에 따라 也密力火者, 亦迷力火者 혹은 也乜力火者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明史』 卷332 「西域」4 別失八里에 “正統十年, 也先不花卒, 也密力虎者嗣”라 기록되어 있는 바, 그는 也先不花를 뒤이은 別失八里의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亦力把里地面也先不花並妃虎都速旦·頭目舍剌, 土魯番地面密力虎者王並妃古瓦兒速檀等·頭目馬麻光兒咱等, 察力失地面也密力虎者王·姐打賴悶等·頭目打剌兒……等一百二十一處地面頭目俱遣使來貢馬(『英宗實錄』 卷224 景泰 3년 12월 己丑朔條)”라는 내용에서 그는 土魯番과 察力失(焉耆)의 왕으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 무렵 그는 別失八里(亦力把里), 土魯番, 察力失 세 나라의 왕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의 實錄 기사에 亦力把里의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의연히 재위하여 명에 조공을 하고 있는데, 에밀호자(也密力火者)가 곧 東차가타이의 에센부카汗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劉國防, 1997). 바로가기
  • 각주 008)
    復辟: 일찍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將軍 石亨·廷臣 徐有貞·宦官 曹吉祥 등이 景泰 8년(1457)에 景泰帝의 병세가 악화되어 재기가 어렵게 되자, 奪門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쿠데타를 일으켜 南宮에 유폐 중이던 英宗을 다시 帝位에 앉힌 사건을 말한다. 재차 帝位에 오른 영종은 연호를 天順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姚夔(1414~1473): 字는 大章이고 號는 損庵이며, 桐廬坊郭(지금의 桐廬鎭) 사람이다. 正統 7년(1442)의 進士로 吏科給事中에 제수되었으며, 景泰 원년(1450)에 南京 刑部右侍郞에 발탁되고 景泰 4년(1453)에 禮部侍郞이 되었으며, 天順 7년(1463)에는 禮部尙書가 되어 知貢舉를 맡았다. 成化 5년(1469)에 兵部尙書로 전임하였고, 太子少保에 보임되었다. 成化 9년(1473)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諡號는 文敏이며, 『姚文敏集』 8권을 남겼다. 본문에는 禮官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成化 원년(1465) 당시 姚夔의 관직은 禮部尙書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선덕제, 창영(昌英), 왜사, 합돈(哈敦), 왜사, 야선불화(也先不花), 왜사, 복새인(卜賽因), 야선불화, 야밀력호자(也密力虎者), 우지경(于志敬), 요기(姚夔)
지명
서역, 역력파리(亦力把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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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宣德) 원년으로부터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자 채폐 등으로 보답하였는데, 성화(成化) 원년 조공을 제한하니 이후로 거의 행해지지 않게 됨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9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