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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원이 일본을 다시 정벌하려 함

  • 국가
    일본(日本)
[지원] 20년(1283), 아탑해를 일본성(日本省)주 001
각주 001)
日本省: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기구인 日本行省을 가리킨다. 그러나 『高麗史』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 9년 6월〉조에 몽골에서 충렬왕을 征東中書省의 左丞相으로 삼고 阿塔海(아탑해)와 함께 행성업무를 보게 하였다고 하여 그때 설치된 행성 명칭이 일본행성이 아니라 정동행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동익은 아탑해·유국걸에 관한 열전·묘지명 등 여러 자료에서 그 시기 그들이 정동행성 관원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위 기사의 日本省이 征東行省의 오기가 분명하고, 그 치소가 고려가 아닌 강남에 있었다고 보았다(장동익, 199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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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으로, 철리첩목아(徹里帖木兒) 주 002
각주 002)
徹里帖木兒( ? ∼ ? ): 몽골의 무관. 徹里鐵木兒·闊里帖木兒·闍里帖木兒·闍里鐵木兒라고도 표기된다. 몽골 別速台氏 출신. 至元 16년(1279) 군대를 이끌고 杭州에 가서 주둔하였다. 至元 19년(1282) 고려의 요청을 받아 휘하의 몽골군 500을 金州로 보내 지키게 하였다. 다음 해(1283) 日本行省 右丞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至元 24년(1287) 遼陽行省 平章 政事에 임명되었고, 至元 27년(1290) 군대를 이끌고 合丹(카단)의 군대를 패주시켰다. 大德 8년(1304) 고려로 출진하여 그곳을 진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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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우승으로, 유이발도아(劉二拔都兒) 주 003
각주 003)
劉二拔都兒(1234∼1305): 몽골의 무관. 여진족 출신 몽골 장수 劉國傑을 가리킨다. 자는 國寶, 성은 烏古倫으로 후에 劉氏로 改姓하였다. 山東 益都 출신이다. 남송과의 전쟁 시기 千戶의 신분으로 荊南· 淮南의 여러 지역에서 남송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至元 10년(1273) 襄陽·樊城을 점령할 때 공을 세워 武德將軍 管軍總管을 제수받았다. 至元 12년(1275) 몽골군이 焦山에서 남송군과 전투를 벌일 때 董文 炳·劉琛과 함께 남송 장군 張世杰의 군대를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쿠빌라이로부터 懷遠大將 軍을 제수받고 覇都(拔都兒, 바아투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두 번째 공이 큰 覇都라는 의미로 劉二覇都(劉二拔都兒)라고 불렸다. 남송 멸망 후 鎭國上將軍 漢軍都元帥가 되어 북방 변경지역을 진수하고, 伯顔(바얀)과 함께 시리기의 난을 진압하여 輔國上將軍이 되었다. 至元 20년(1283) 日本行省 左丞에 임명되어 일본을 정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廣陵(현재 江蘇省 揚州)에 주둔하면서 일본 해적을 방어하고 반몽골 저항운동을 진압하였다. 至元 23년(1286) 湖廣行省 左丞에 임명되고, 右丞으로 승진하였으며, 至元 28년(1291) 湖廣行樞密院副使가 되고, 元貞 원년(1295) 湖廣 行省 平章政事에 임명되었다. 그 기간 중 廣東·廣西·湖南·江西 지역 漢人들의 저항운동과 四川·雲 南·貴州 지역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을 토벌하였다(『元史』 卷162 「劉國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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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좌승으로 삼도록 명령하고, 군사를 모집하고 배를 만들어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 하였다. 회서선위사(淮西宣慰使)주 004
각주 004)
淮西宣慰使: 淮西道宣慰使의 준말. 淮西는 淮河의 상류 즉 오늘날 安徽·湖北省 북부, 河南省 남부를 포괄하는 지역 명칭이다. 唐代 지방행정 체계에서 淮南西道로 구획된 후 淮西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至元 12년(1275) 廬州(오늘날 安徽省 合肥)에 淮西道宣撫司가 설치되고, 다음 해(1276) 宣慰司로 개칭되었다. 宣慰司는 몽골 시대 각 지역에 설치되어 軍事와 民政을 총괄하는 관청이고, 宣慰使는 宣慰司의 장관으로 3명을 두고 품계는 종2품이다(『元史』 卷91 「百官志」 7 〈行中書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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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길아(昂吉兒) 주 005
각주 005)
昻吉兒( ? ∼1295): 몽골의 무관. 姓은 野蒲氏이고 張掖(오늘날 감숙성 張掖) 출신이다. 西夏의 무관 집안 출신으로 칭기즈칸 시기 부친 甘卜이 몽골에 귀부하여 千戶에 임명된 후 몽골의 군사 활동에 협력하였다. 감복이 木華黎(무칼리)를 따라 출정하였다가 군중에서 사망한 후 그 자리를 이어 여러 지역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至元 6년(1269) 本軍千戶에 임명되어 淮西지역에서 남송군을 공략하였다. 至元 9년(1272) 信陽軍萬戶로써 河西兵을 이끌고 淮南西道를 공략하여 남송 장수 夏貴의 군대를 크게 격퇴하였다. 至元 11년(1274) 남송의 降將 洪福이 阿塔赤(아타치)을 살해하자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남송 정복 후 至元 14년(1277) 淮西宣慰使에 임명되었고, 이후 淮西宣慰司 都元帥, 河南行省 右丞 등을 역임하였다(『元史』 卷132 「昻吉兒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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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백성들을 수고롭게 한다고 상언하고 전쟁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 각주 001)
    日本省: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기구인 日本行省을 가리킨다. 그러나 『高麗史』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 9년 6월〉조에 몽골에서 충렬왕을 征東中書省의 左丞相으로 삼고 阿塔海(아탑해)와 함께 행성업무를 보게 하였다고 하여 그때 설치된 행성 명칭이 일본행성이 아니라 정동행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동익은 아탑해·유국걸에 관한 열전·묘지명 등 여러 자료에서 그 시기 그들이 정동행성 관원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위 기사의 日本省이 征東行省의 오기가 분명하고, 그 치소가 고려가 아닌 강남에 있었다고 보았다(장동익, 1994: 23∼27). 바로가기
  • 각주 002)
    徹里帖木兒( ? ∼ ? ): 몽골의 무관. 徹里鐵木兒·闊里帖木兒·闍里帖木兒·闍里鐵木兒라고도 표기된다. 몽골 別速台氏 출신. 至元 16년(1279) 군대를 이끌고 杭州에 가서 주둔하였다. 至元 19년(1282) 고려의 요청을 받아 휘하의 몽골군 500을 金州로 보내 지키게 하였다. 다음 해(1283) 日本行省 右丞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至元 24년(1287) 遼陽行省 平章 政事에 임명되었고, 至元 27년(1290) 군대를 이끌고 合丹(카단)의 군대를 패주시켰다. 大德 8년(1304) 고려로 출진하여 그곳을 진무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劉二拔都兒(1234∼1305): 몽골의 무관. 여진족 출신 몽골 장수 劉國傑을 가리킨다. 자는 國寶, 성은 烏古倫으로 후에 劉氏로 改姓하였다. 山東 益都 출신이다. 남송과의 전쟁 시기 千戶의 신분으로 荊南· 淮南의 여러 지역에서 남송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至元 10년(1273) 襄陽·樊城을 점령할 때 공을 세워 武德將軍 管軍總管을 제수받았다. 至元 12년(1275) 몽골군이 焦山에서 남송군과 전투를 벌일 때 董文 炳·劉琛과 함께 남송 장군 張世杰의 군대를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쿠빌라이로부터 懷遠大將 軍을 제수받고 覇都(拔都兒, 바아투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두 번째 공이 큰 覇都라는 의미로 劉二覇都(劉二拔都兒)라고 불렸다. 남송 멸망 후 鎭國上將軍 漢軍都元帥가 되어 북방 변경지역을 진수하고, 伯顔(바얀)과 함께 시리기의 난을 진압하여 輔國上將軍이 되었다. 至元 20년(1283) 日本行省 左丞에 임명되어 일본을 정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廣陵(현재 江蘇省 揚州)에 주둔하면서 일본 해적을 방어하고 반몽골 저항운동을 진압하였다. 至元 23년(1286) 湖廣行省 左丞에 임명되고, 右丞으로 승진하였으며, 至元 28년(1291) 湖廣行樞密院副使가 되고, 元貞 원년(1295) 湖廣 行省 平章政事에 임명되었다. 그 기간 중 廣東·廣西·湖南·江西 지역 漢人들의 저항운동과 四川·雲 南·貴州 지역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을 토벌하였다(『元史』 卷162 「劉國傑傳」). 바로가기
  • 각주 004)
    淮西宣慰使: 淮西道宣慰使의 준말. 淮西는 淮河의 상류 즉 오늘날 安徽·湖北省 북부, 河南省 남부를 포괄하는 지역 명칭이다. 唐代 지방행정 체계에서 淮南西道로 구획된 후 淮西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至元 12년(1275) 廬州(오늘날 安徽省 合肥)에 淮西道宣撫司가 설치되고, 다음 해(1276) 宣慰司로 개칭되었다. 宣慰司는 몽골 시대 각 지역에 설치되어 軍事와 民政을 총괄하는 관청이고, 宣慰使는 宣慰司의 장관으로 3명을 두고 품계는 종2품이다(『元史』 卷91 「百官志」 7 〈行中書省〉). 바로가기
  • 각주 005)
    昻吉兒( ? ∼1295): 몽골의 무관. 姓은 野蒲氏이고 張掖(오늘날 감숙성 張掖) 출신이다. 西夏의 무관 집안 출신으로 칭기즈칸 시기 부친 甘卜이 몽골에 귀부하여 千戶에 임명된 후 몽골의 군사 활동에 협력하였다. 감복이 木華黎(무칼리)를 따라 출정하였다가 군중에서 사망한 후 그 자리를 이어 여러 지역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至元 6년(1269) 本軍千戶에 임명되어 淮西지역에서 남송군을 공략하였다. 至元 9년(1272) 信陽軍萬戶로써 河西兵을 이끌고 淮南西道를 공략하여 남송 장수 夏貴의 군대를 크게 격퇴하였다. 至元 11년(1274) 남송의 降將 洪福이 阿塔赤(아타치)을 살해하자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남송 정복 후 至元 14년(1277) 淮西宣慰使에 임명되었고, 이후 淮西宣慰司 都元帥, 河南行省 右丞 등을 역임하였다(『元史』 卷132 「昻吉兒傳」).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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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탑해, 철리첩목아(徹里帖木兒), 유이발도아(劉二拔都兒), 앙길아(昂吉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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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일본을 다시 정벌하려 함 자료번호 : jo.k_0023_0208_0010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