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驛馬) 구입을 청하는 점성국(占城國)의 사신
[신종(神宗)] 희녕(熙寧, 1068~1077) 원년(1068)주 001 국왕 양복시리률타반마제파(楊卜尸利律陀般摩提婆)
주 002
각주 002)
가 사신주 003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역마(驛馬)를 구입하겠다고 청했다. 조서를 내려 백마 1필을주 004 하사하고, 명하여 광주에서 노새를 사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했다. [희녕] 5년(1072)에는주 005 유리와 산호로 만든 술잔, 용뇌, 유향, 정향, 필징가(蓽澄茄),주 006 자광(紫礦)주 007을 바쳤다. [희녕] 7년(1074), 교주(交州) [왕] 이건덕(李乾德)
주 008楊卜尸利律陀般摩提婆: Maspero에 의하면 이 역시 施里律茶盤麻常楊溥와 마찬가지로 루드라바르만(Rudravarman) 3세(베트남 이름은 制矩)이다. 그는 즉위 후 베트남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갖추어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1069년 聖宗 치세의 베트남은 참파의 불손함을 응징한다는 이유 말고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사전 대비책으로 참파 원정에 나섰다. 聖宗은 장군 李常傑을 원수로 임명하고 5만의 군대와 2백 척 함대를 직접 이끌고 참파를 침공해 수도 비자야를 함락시켰다. 루드라바르만 3세는 패주하다 생포되어 베트남에 끌려갔다가, 참파의 3개 주를 베트남에 할양해주는 조건으로 귀국을 허락받았다.
각주 008)
이 [송에] 보고하기를, 점성의 왕이 병사 3천 명과 처자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정월에 교주[本道]에 이르렀다고 했다.주 009
李乾德: 베트남 李왕조의 4대 왕으로, 1072년에서 1127년까지 재위한 仁宗이다. 7세의 어린 나이에 聖宗을 이어 즉위하여 太師 李道成이 총리의 자격으로 국무를 처리하며 仁宗 치세의 기틀을 다졌고, 그의 치세에 베트남에서 최초로 과거제도가 실시되는 등 왕권도 안정되고 중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즉, 송 신종이 즉위하여 베트남에 대한 공격 준비를 시작하자, 李왕조에서 10만 대군을 보내 선제공격을 가했고, 이어진 송의 보복 공격을 저지하고 송군에 대타격을 가하여, 결국 양국의 화의를 이루어냈다(유인선, 2002: 129~133).
- 각주 001)
-
각주 002)
楊卜尸利律陀般摩提婆: Maspero에 의하면 이 역시 施里律茶盤麻常楊溥와 마찬가지로 루드라바르만(Rudravarman) 3세(베트남 이름은 制矩)이다. 그는 즉위 후 베트남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갖추어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1069년 聖宗 치세의 베트남은 참파의 불손함을 응징한다는 이유 말고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사전 대비책으로 참파 원정에 나섰다. 聖宗은 장군 李常傑을 원수로 임명하고 5만의 군대와 2백 척 함대를 직접 이끌고 참파를 침공해 수도 비자야를 함락시켰다. 루드라바르만 3세는 패주하다 생포되어 베트남에 끌려갔다가, 참파의 3개 주를 베트남에 할양해주는 조건으로 귀국을 허락받았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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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李乾德: 베트남 李왕조의 4대 왕으로, 1072년에서 1127년까지 재위한 仁宗이다. 7세의 어린 나이에 聖宗을 이어 즉위하여 太師 李道成이 총리의 자격으로 국무를 처리하며 仁宗 치세의 기틀을 다졌고, 그의 치세에 베트남에서 최초로 과거제도가 실시되는 등 왕권도 안정되고 중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즉, 송 신종이 즉위하여 베트남에 대한 공격 준비를 시작하자, 李왕조에서 10만 대군을 보내 선제공격을 가했고, 이어진 송의 보복 공격을 저지하고 송군에 대타격을 가하여, 결국 양국의 화의를 이루어냈다(유인선, 2002: 129~133).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신종(神宗)], 양복시리률타반마제파(楊卜尸利律陀般摩提婆), 이건덕(李乾德)
- 지명
- 광주, 송, 점성, 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