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武德, 貞觀年間의 劍南의 諸獠
무릇 검남(劍南)의 여러 요(獠) 가운데, 무덕(武德) 연간과 정관(貞觀) 연간 사이에 여러 차례 노략질하여 주현(州縣)을 범한 것이 하나가 아니다. 파주(巴州)
주 001의 산료(山獠) 왕다형(王多馨)이 배반하자, 양주도독(梁州주 002
각주 002)
都督) 방옥(龐玉)은 그를 효수하고, 또 여당(餘黨)인 부양(符陽)
주 003과 백석(白石)
주 004두 현의 요(獠)들을 격파하였다. 그 후 미주료(眉州주 005梁州: 三國 魏 元帝 景元 4年(263)에 益州를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沔陽縣(陝西省 勉縣 동쪽 舊州鋪)에 두었다. 西晉 武帝 太康 3年(282)에 치소를 南鄭縣(陝西省 漢中市 東)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陝西省의 秦嶺 以南과 大巴山 以西, 四川省의 靑川·江油·中江·遂寧·璧山·綦江 等의 縣과 市 以東 및 貴州省의 桐梓·正安 等의 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그 뒤 治所를 여러 번 옮겼는데, 西城縣(陝西省 安康市 西北)·苞中縣(漢中市 西北의 大鍾寺)·城固縣(陝西省 城固縣 東) 等의 縣을 거쳤다. 南朝 宋 文帝 元嘉 11年(434)에 치소를 南鄭縣으로 되돌렸다. 隋 煬帝 大業 3年(607)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관할구역은 오늘날 陝西省의 漢中·城固·南鄭·勉縣 等의 市縣과 寧強縣 北部 지역이 포함되었다. 唐 玄宗 天寶 1年(742)에 고쳐서 漢中郡이라 하였다가, 肅宗 乾元 1年(758) 다시 梁州로 하였다. 德宗 興元 1年(784)에 격을 올려 興元府로 삼았다.
각주 005)
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익주행대(益州行臺)주 006
곽행방(郭行方)이 크게 깨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홍주(洪州)
주 007와 아주(雅州) 두 주의 요(獠)를 깨뜨리고, 남녀를 사로잡은 것이 5천 구(口)였다. 이 해에 익주료(益州獠) 역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독(都督) 두궤(竇軌)가주 008치기를 청하자, 태종(太宗)이 답보(答報)하여 말하기를, “요(獠)는 산의 험요지에 의지하니, 마땅히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져야 한다. 병위로 위협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부모가 되는 뜻에 합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관(貞觀) 7년(633)에 동과 서 옥동(玉洞)주 009의 요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장사귀(張士貴)
주 010眉州: 西魏 廢帝 3年(554)에 靑州를 고쳐서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齊通郡 齊通縣에 두었다. 오늘날 四川省 眉山縣에 해당한다.『太平禦覽』卷166에서 인용한『周地圖記』에서는 眉州에 대하여 峨眉山 때문에 眉州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적었다. 北周 시기의 관할구역은 지금의 四川省 眉山·丹棱·靑神 等의 縣에 상당한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2年(619)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通義縣(四川省 眉山縣)에 두어졌다. 天寶 元年(742)에 고쳐서 通義郡으로 하였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眉州로 돌렸다. 관할구역이 확대되어, 四川 眉山·彭山·丹棱·洪稚·靑神 等의 縣이 모두 포함되었다. 宋代 이후 축소되었다.
각주 010)
를 공주도행군총관(龔州주 011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평정하였다.주 012[정관] 12년(638)에 무주료(巫州주 013獠)가 배반하였는데,주 014기주도독(夔州주 015張士貴(586~657): 唐代의 名將이다.『舊唐書』와『新唐書』에 모두 입전되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다.『구당서』의 기록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張士貴는 虢州 盧氏人이다. 本名은 忽峍이며, 騎射에 능하다. 근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隋 煬帝] 大業 연간 末에 무리를 모아 盜가 되었다. 城邑을 공격하니, 遠近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며, ‘忽峍賊’이라 불렸다. [唐] 高祖가 글을 내려 招懷하니, 士貴가 무리를 거느리고 정성을 드려 복종을 약속하였다. 右光祿大夫에 배수되었다. 여러 차례 戰功이 있어, 新野縣公의 爵이 내려졌다. 東都 평정에 종군하여, 虢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高祖가 그에게 말하기를, ‘卿이 비단옷을 입고 낮에 돌아다니게 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얼마지 않아 경사에 들어가 右武候將軍이 되었다. [太宗] 貞觀 7年(633)에 이반한 獠를 격파하고 귀환하였을 때, 太宗이 노고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듣자하니, 公이 親히 화살과 돌에 맞서며 사졸들의 앞에 섰다고 하던데, 고대의 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겠는가. 朕은 일찍이 몸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는 데 性命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단지 그 말을 듣기만 하였을 뿐, 그 실체를 들은 적은 없다. 공에게서 그것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左領軍大將軍이었으며, 봉작 또한 虢國公으로 고쳐졌다. [高宗] 顯慶 연간 初에 죽었다. 荊州都督에 추증되었으며, 昭陵에 陪葬되었다.”(『舊唐書』卷83 「張士貴」: 2786).
각주 015)
都督) 제선행(齊善行)이 쳐서 격파하고, 남녀 3천여 구를 사로잡았다. 균주료(鈞州주 016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계주도독(桂州都督)주 017
장보덕(張寶德)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주 018
명주(明州)의 산료(山獠) 또한 반란을 일으켰는데, 교주도독(交州都督) 이도언(李道彦)이 쳐서 패주시켰다. 이 해에 파(巴)
양(洋)
주 019夔州: 唐 高祖 武德 2年(619)에 皇帝의 外祖 獨孤信을 피휘하여 信州를 고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人復縣(貞觀 연간에 奉節縣으로 고쳤으며, 四川省 奉節縣 東쪽 5km의 白帝城으로 비정)에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고쳐서 雲安郡이 되었다가, 乾元 1年(758)에 다시 夔州가 되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四川省 奉節·巫溪·巫山·雲陽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北宋 시기에는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眞宗 景德 3年(1006)에 치소를 지금의 奉節縣으로 옮겼다. 元 世祖 至元 15年(1278)에 고쳐서 夔州路로 삼았다. 明 太祖 洪武 4年(1371)에 夔州府로 바꾸었다가, 9年(1376)에 다시 고쳐서 夔州로 삼고, 重慶府에 소속시켰다. 13年(1380)에 다시 夔州府로 승격시켰다.
각주 019)
집(集)
주 020洋州: 西魏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豐寧縣(陝西省 西鄉縣 西南)에 두었다. 隋 煬帝 大業 3年(583)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西鄉縣(陝西省 西鄉縣)에 두었다.『元和郡縣志』卷22〈洋州〉에서는 洋水로 인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陝西省 洋縣·西鄉·鎮巴·佛坪 등의 縣에 상당하였다. 玄宗 天寶 1年(742)에 洋川郡으로 고쳤고, 15年(756)에 치소를 興道縣(陝西省 洋縣)으로 옮겼다. 乾元 1年(758)에 다시 洋州가 되었다. 五代 시기 後蜀에서 源州로 바꾸었으나, 北宋代에 다시 洋州라고 이름붙였다. 蒙古 世祖 至元 2年(1265)에 興道縣을 폐지하여 州에 편입시켰다. 明 太祖 洪武 3年(1370)에 洋縣으로 바꾸었다.
각주 020)
벽(壁)
주 021네 주의 산료가 배반하여 파주(巴州)를 공격하자,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상관회인(上官懷人)이 벽주(壁州)에서 격파하고 남녀 만여를 사로잡았다.주 022이듬해 마침내 평정되었다. 14년(640)에 나주(羅州)
주 023와 두주(竇州)
주 024의 제료(諸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광주도독(廣州都督)주 025
당인홍(党仁弘)을 두주도행군총관(竇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치게 하였다. 남녀 7천여인을 사로잡았다. 태종(太宗)이 재차 고려를 정벌할 때, 검남(黔南)에서 배를 만들었는데, 제료(諸獠) 모두에게 반인(半人) 분의 역(役)이 지워졌다. 아주와 공주(邛州)
주 026
미주 세 주의 료들이 그 소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이끌어 반란을 일으켰다.주 027조를 내려 농우(隴右)와 섬(峽)의 군대 2만을 징발하고 무주도독(茂州都督) 장사귀(張士貴)를 아주도행군총관(雅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우위장군(右衛將軍) 양건방(梁建方)과 더불어 평정하게 하였다.集州: 西魏 廢帝 3年(554)에 東巴州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오늘날 四川省 南江縣의 북쪽에 두었다.『太平禦覽』卷168에서 인용한『十道記』에서는 集州 東北쪽에 있는 集水로 인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北周 武帝 天和 5年(570)에 치소를 難江縣(四川省 南江縣)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四川省 南江·通江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隋 煬帝 大業 연간 初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하였다. 天寶 1年(742)에 符陽郡으로 고쳤다. 肅宗 乾元 1年(758)에 다시 集州로 하였다. 北宋 神宗 熙寧 5年(1072)에 폐지하였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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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梁州: 三國 魏 元帝 景元 4年(263)에 益州를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沔陽縣(陝西省 勉縣 동쪽 舊州鋪)에 두었다. 西晉 武帝 太康 3年(282)에 치소를 南鄭縣(陝西省 漢中市 東)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陝西省의 秦嶺 以南과 大巴山 以西, 四川省의 靑川·江油·中江·遂寧·璧山·綦江 等의 縣과 市 以東 및 貴州省의 桐梓·正安 等의 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그 뒤 治所를 여러 번 옮겼는데, 西城縣(陝西省 安康市 西北)·苞中縣(漢中市 西北의 大鍾寺)·城固縣(陝西省 城固縣 東) 等의 縣을 거쳤다. 南朝 宋 文帝 元嘉 11年(434)에 치소를 南鄭縣으로 되돌렸다. 隋 煬帝 大業 3年(607)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관할구역은 오늘날 陝西省의 漢中·城固·南鄭·勉縣 等의 市縣과 寧強縣 北部 지역이 포함되었다. 唐 玄宗 天寶 1年(742)에 고쳐서 漢中郡이라 하였다가, 肅宗 乾元 1年(758) 다시 梁州로 하였다. 德宗 興元 1年(784)에 격을 올려 興元府로 삼았다.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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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眉州: 西魏 廢帝 3年(554)에 靑州를 고쳐서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齊通郡 齊通縣에 두었다. 오늘날 四川省 眉山縣에 해당한다.『太平禦覽』卷166에서 인용한『周地圖記』에서는 眉州에 대하여 峨眉山 때문에 眉州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적었다. 北周 시기의 관할구역은 지금의 四川省 眉山·丹棱·靑神 等의 縣에 상당한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2年(619)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通義縣(四川省 眉山縣)에 두어졌다. 天寶 元年(742)에 고쳐서 通義郡으로 하였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眉州로 돌렸다. 관할구역이 확대되어, 四川 眉山·彭山·丹棱·洪稚·靑神 等의 縣이 모두 포함되었다. 宋代 이후 축소되었다.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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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張士貴(586~657): 唐代의 名將이다.『舊唐書』와『新唐書』에 모두 입전되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다.『구당서』의 기록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張士貴는 虢州 盧氏人이다. 本名은 忽峍이며, 騎射에 능하다. 근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隋 煬帝] 大業 연간 末에 무리를 모아 盜가 되었다. 城邑을 공격하니, 遠近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며, ‘忽峍賊’이라 불렸다. [唐] 高祖가 글을 내려 招懷하니, 士貴가 무리를 거느리고 정성을 드려 복종을 약속하였다. 右光祿大夫에 배수되었다. 여러 차례 戰功이 있어, 新野縣公의 爵이 내려졌다. 東都 평정에 종군하여, 虢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高祖가 그에게 말하기를, ‘卿이 비단옷을 입고 낮에 돌아다니게 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얼마지 않아 경사에 들어가 右武候將軍이 되었다. [太宗] 貞觀 7年(633)에 이반한 獠를 격파하고 귀환하였을 때, 太宗이 노고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듣자하니, 公이 親히 화살과 돌에 맞서며 사졸들의 앞에 섰다고 하던데, 고대의 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겠는가. 朕은 일찍이 몸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는 데 性命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단지 그 말을 듣기만 하였을 뿐, 그 실체를 들은 적은 없다. 공에게서 그것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左領軍大將軍이었으며, 봉작 또한 虢國公으로 고쳐졌다. [高宗] 顯慶 연간 初에 죽었다. 荊州都督에 추증되었으며, 昭陵에 陪葬되었다.”(『舊唐書』卷83 「張士貴」: 2786).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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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夔州: 唐 高祖 武德 2年(619)에 皇帝의 外祖 獨孤信을 피휘하여 信州를 고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人復縣(貞觀 연간에 奉節縣으로 고쳤으며, 四川省 奉節縣 東쪽 5km의 白帝城으로 비정)에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고쳐서 雲安郡이 되었다가, 乾元 1年(758)에 다시 夔州가 되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四川省 奉節·巫溪·巫山·雲陽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北宋 시기에는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眞宗 景德 3年(1006)에 치소를 지금의 奉節縣으로 옮겼다. 元 世祖 至元 15年(1278)에 고쳐서 夔州路로 삼았다. 明 太祖 洪武 4年(1371)에 夔州府로 바꾸었다가, 9年(1376)에 다시 고쳐서 夔州로 삼고, 重慶府에 소속시켰다. 13年(1380)에 다시 夔州府로 승격시켰다.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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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9)
洋州: 西魏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豐寧縣(陝西省 西鄉縣 西南)에 두었다. 隋 煬帝 大業 3年(583)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西鄉縣(陝西省 西鄉縣)에 두었다.『元和郡縣志』卷22〈洋州〉에서는 洋水로 인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陝西省 洋縣·西鄉·鎮巴·佛坪 등의 縣에 상당하였다. 玄宗 天寶 1年(742)에 洋川郡으로 고쳤고, 15年(756)에 치소를 興道縣(陝西省 洋縣)으로 옮겼다. 乾元 1年(758)에 다시 洋州가 되었다. 五代 시기 後蜀에서 源州로 바꾸었으나, 北宋代에 다시 洋州라고 이름붙였다. 蒙古 世祖 至元 2年(1265)에 興道縣을 폐지하여 州에 편입시켰다. 明 太祖 洪武 3年(1370)에 洋縣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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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0)
集州: 西魏 廢帝 3年(554)에 東巴州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오늘날 四川省 南江縣의 북쪽에 두었다.『太平禦覽』卷168에서 인용한『十道記』에서는 集州 東北쪽에 있는 集水로 인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北周 武帝 天和 5年(570)에 치소를 難江縣(四川省 南江縣)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四川省 南江·通江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隋 煬帝 大業 연간 初에 폐지되었다. 唐 高祖 武德 1年(618)에 다시 설치하였다. 天寶 1年(742)에 符陽郡으로 고쳤다. 肅宗 乾元 1年(758)에 다시 集州로 하였다. 北宋 神宗 熙寧 5年(1072)에 폐지하였다.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색인어
- 이름
- 왕다형(王多馨), 방옥(龐玉), 곽행방(郭行方), 두궤(竇軌), 태종(太宗), 장사귀(張士貴), 제선행(齊善行), 장보덕(張寶德), 이도언(李道彦), 상관회인(上官懷人), 당인홍(党仁弘), 태종(太宗), 장사귀(張士貴), 양건방(梁建方)
- 지명
- 검남(劍南), 파주(巴州), 부양(符陽), 백석(白石), 홍주(洪州), 아주(雅州), 명주(明州), 파(巴), 양(洋), 집(集), 벽(壁), 파주(巴州), 벽주(壁州), 나주(羅州), 두주(竇州), 고려, 검남(黔南), 아주, 공주(邛州), 미주, 농우(隴右), 섬(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