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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烏蠻種의 번성

각라봉(閤邏鳳)이 즉위하여, 수우(守隅)를 불러 처(妻)와 함께 하탐(河睒) 주 001
각주 001)
河睒: 方國瑜는 하탐에 대하여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서이하지역에 해당하며, 좀더 광의의 의미로는 白崖와 雲南賧 등도 포괄하는 10탐의 총칭이라고 주장하였다(方國瑜, 1987: 443~444).『蠻書』의 용례로 보건대, 南詔의 핵심지역과 그 사람들에 대한 지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河賧에 귀의하였다는 것은 南詔國에 귀의하였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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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귀의하도록 하고, 중국(中國)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타는 스스로 그 부락의 주인이 되어, 해마다 입조(入朝)하였는데, 은총과 상(賞)이 많고 두터웠다. 각라봉이 곤천성사(昆川城使) 양모리(楊牟利)를 보내 군대로 서찬(西爨)을 협박하여 호(戶) 20만을 영창성(永昌城) 주 002
각주 002)
永昌城: 拓俞城이라고도 부른다. 南詔에서 설치하였으며, 永昌節度의 주둔지였다. 오늘날 雲南省 保山市로 비정된다. 大理 시기에는 永昌府의 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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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겼다.주 003
각주 003)
이 西爨白蠻 20만 徙民說에 관하여는 異說이 많다. 즉 20여만 호나 되는 인구를 옮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영창성에 과연 약 100만이나 되는 인구를 수용할 땅이나 시설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 이렇게 대규모의 사민 사건이 왜 「남조덕화비」에는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도 그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었다(段鼎周, 1994: 54). 이 ‘20餘 萬戶’ 사민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각기 ‘20여 戶’(段鼎周, 1994: 54) 혹은 ‘2,000여 호’설(尤中, 1980: 95~96)을 제기하고 있다. 사민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20여만 호 사민은 확실히 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숫자를 확정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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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찬(東爨)은 말이 통하지 않고, 대부분 수풀과 골짜기를 의지하여 흩어져 살았으므로, 옮기지 않을 수 있었다.주 004
각주 004)
烏蠻의 언어와 관련하여,『蠻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言語의 音은 白蠻이 가장 바르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며, 諸部落은 이들만 못했다(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간혹 漢과 같지 않았는데, 四聲에 미치면 그 그릇된 것이 심하였다(訛重). 大事는 대부분 함께 얼굴을 맞대어 말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보내 가서 그 詞意를 깨닫게 한 뒤 이를 통해 결정하였다. 이를 일러 行諾이라 한다.”(『雲南志補注』卷8: 119). 이 기사는 音의 정확도를 가지고 만이들을 평가하고 있다. 白蠻이 가장 정확하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고 여타의 부락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音은 漢語의 音이다. 즉 중국어를 기준으로 남중 지역의 諸 蠻夷를 한 줄로 세운 것이다. 백만이 그 음이 가장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부르는 명칭이 漢과 다르고 四聲은 전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白蠻이 漢字 文化에 상당히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口語와 文語의 불일치로 인한 한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도 백만은 南中의 거주민 중 漢文化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내내 스스로 漢人의 자손임을 自矜하고, 5세기에 한자로 새겨진 뛰어난 비석을 남긴 爨氏 宗族의 경우 백만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10: 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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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정주(曲靖州) 석성(石城) 승마(升麻) 곤천(昆川) 남북으로부터 용화(龍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대에 의해 피폐해졌다. 일진(日進) 등의 자손은 영창성에 거주하였다. 오만종(烏蠻種)이 다시 번성하여 서찬 고지로 옮겨 살게 되었고, 봉주(峯州) 주 005
각주 005)
峯州: 隋 開皇 18年(598)에 興州를 고쳐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嘉寧縣(越南 永富省 Vĩnh Phúc 白鶴縣 南쪽의 風州)에 두어졌다. 大業 연간 초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4年(621)에 다시 설치되었다. 天寶 元年(742)에 고쳐서 承化郡이 되었으나, 乾元元年(758)에 다시 峰州로 되돌렸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越南 永富省 및 河江省(Hà Giang)과 宣光省(Tuyên Quang) 南部의 땅을 포함하였다. 五代의 晉代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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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웃하게 되었다. [당 덕종] 정원(貞元) 연간(785~804)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어 기미주(羈縻州) 열여덟 곳을 통령하게 하였다.

  • 각주 001)
    河睒: 方國瑜는 하탐에 대하여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서이하지역에 해당하며, 좀더 광의의 의미로는 白崖와 雲南賧 등도 포괄하는 10탐의 총칭이라고 주장하였다(方國瑜, 1987: 443~444).『蠻書』의 용례로 보건대, 南詔의 핵심지역과 그 사람들에 대한 지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河賧에 귀의하였다는 것은 南詔國에 귀의하였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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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永昌城: 拓俞城이라고도 부른다. 南詔에서 설치하였으며, 永昌節度의 주둔지였다. 오늘날 雲南省 保山市로 비정된다. 大理 시기에는 永昌府의 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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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이 西爨白蠻 20만 徙民說에 관하여는 異說이 많다. 즉 20여만 호나 되는 인구를 옮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영창성에 과연 약 100만이나 되는 인구를 수용할 땅이나 시설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 이렇게 대규모의 사민 사건이 왜 「남조덕화비」에는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도 그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었다(段鼎周, 1994: 54). 이 ‘20餘 萬戶’ 사민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각기 ‘20여 戶’(段鼎周, 1994: 54) 혹은 ‘2,000여 호’설(尤中, 1980: 95~96)을 제기하고 있다. 사민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20여만 호 사민은 확실히 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숫자를 확정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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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烏蠻의 언어와 관련하여,『蠻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言語의 音은 白蠻이 가장 바르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며, 諸部落은 이들만 못했다(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간혹 漢과 같지 않았는데, 四聲에 미치면 그 그릇된 것이 심하였다(訛重). 大事는 대부분 함께 얼굴을 맞대어 말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보내 가서 그 詞意를 깨닫게 한 뒤 이를 통해 결정하였다. 이를 일러 行諾이라 한다.”(『雲南志補注』卷8: 119). 이 기사는 音의 정확도를 가지고 만이들을 평가하고 있다. 白蠻이 가장 정확하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고 여타의 부락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音은 漢語의 音이다. 즉 중국어를 기준으로 남중 지역의 諸 蠻夷를 한 줄로 세운 것이다. 백만이 그 음이 가장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부르는 명칭이 漢과 다르고 四聲은 전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白蠻이 漢字 文化에 상당히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口語와 文語의 불일치로 인한 한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도 백만은 南中의 거주민 중 漢文化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내내 스스로 漢人의 자손임을 自矜하고, 5세기에 한자로 새겨진 뛰어난 비석을 남긴 爨氏 宗族의 경우 백만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10: 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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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峯州: 隋 開皇 18年(598)에 興州를 고쳐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嘉寧縣(越南 永富省 Vĩnh Phúc 白鶴縣 南쪽의 風州)에 두어졌다. 大業 연간 초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4年(621)에 다시 설치되었다. 天寶 元年(742)에 고쳐서 承化郡이 되었으나, 乾元元年(758)에 다시 峰州로 되돌렸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越南 永富省 및 河江省(Hà Giang)과 宣光省(Tuyên Quang) 南部의 땅을 포함하였다. 五代의 晉代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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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각라봉(閤邏鳳), 수우(守隅), 하탐(河睒), 아타, 각라봉, 양모리(楊牟利), 일진(日進), 당 덕종
지명
영창성(永昌城), 곡정주(曲靖州), 석성(石城), 승마(升麻), 곤천(昆川), 용화(龍和), 영창성, 봉주(峯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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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蠻種의 번성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