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爨歸王·爨崇道을 치게 하니 사죄함

  • 국가
    양찬만(兩爨蠻)
양찬(兩爨)의 대귀주(大鬼主) 숭도(崇道) 주 001
각주 001)
爨崇道: 爨崇道는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爨榮宗의 손자이자 爨摩湴의 장자이다. 따라서 남영주도독 찬귀왕과는 숙질지간이 된다.『찬수충묘지』등의 기사와 이 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찬귀왕이 南寧郡王을 ‘紹封’하였다는 것과 그가 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소봉’이라는 것은 襲封者의 잘못으로 廢封된 爵에 대하여 원봉자의 공을 기려 다른 자손을 찾아 원봉자의 뒤를 잇게 하는 冊封 형태이다. 찬귀왕이 소봉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그가 그 아버지의 작위에 대한 합법적 계승자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녕군왕’이라는 작위가 그 부 찬인홍 아니면 이를 습봉한 찬귀왕 형제의 잘못으로 취소되었다는 것이다.『蠻書』에 따르면, 찬귀왕에게는 爨摩湴이라는 형이 있었다. 바로 찬숭도 형제의 父이다. 그에 관한 다른 정보는 없지만, 그 아들 찬숭도의 활약을 보건대, 찬마밤이 남녕군왕이자 남영주자사였던 찬인홍의 承嗣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爨崇道는 ‘勅安南首領爨仁哲書’에서부터 爨歸王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 칙서에 드러난 당시 그의 직위는 ‘南寧州司馬·威州刺史·都大鬼主’였다. 「南詔德化碑」에서는 742년 당시 그가 ‘南寧州 大鬼主’였다고 적고 있고, 앞서『蠻書』기사에서는 “曲軛川을 다스리면서 兩爨의 大鬼主가 되었다”고 하였다. 曲軛川은 곧 威州이다. 그리고 본문 또한 찬숭도가 ‘兩爨의 大鬼主’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찬숭도의 직책들과 찬귀왕의 직책 ‘右監門衞大將軍·南寧州刺史’, ‘南寧州都督’을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이 권력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찬귀왕은 ‘남녕군왕’·‘남영주자사(도독)’의 직을 승계한 데 비하여, 찬영종의 ‘種落의 侯王’ 직에 해당하는 남영주(양찬) (도)대귀주직은 찬숭도가 계승하고 있다. 찬귀왕은 중국 왕조에 의해 수여된 작위와 관직을 승계한 것이고, 찬숭도는 토착 질서에 의한 권력을 승계한 셈이다. 武散階 從三品에 해당하는 右監門衞大將軍의 품계는 찬귀왕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 ‘위주자사직’은 곡액천을 실제로 다스리는 주인인 찬숭도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며, ‘남영주사마’직은 남영주를 중심으로 승계된 가계의 권력 서열에서 찬숭도가 제2인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은 742년 찬숭도의 동생 爨日進이 西爨의 重鎭인 昆州의 刺史로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찬진과 찬완의 分統에서처럼 찬인홍의 아들들 또한 분통하여 남영주 지역을 통치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鄭勉,『東洋史學硏究』2010: 92, 112~133).
닫기
라는 자가 있었는데, 제(弟) 일진(日進) 일용(日用)과 더불어 안녕성(安寧城) 주 002
각주 002)
安寧城: 현재의 雲南省 安寧市에 비정된다. 南詔가 지배한 뒤에는 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다.
닫기
동편에 살았다. 장구겸경(章仇兼瓊) 주 003
각주 003)
章仇兼瓊: 生卒 연도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대략 唐 則天武后 말기에 태어나고 天寶 연간 말기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唐玄宗 時期에 劍南節度使의 자리에 있었으며, 8년간 재임하였다. 치적이 비교적 좋았다.
닫기
보두로(步頭路) 주 004
각주 004)
步頭路: 唐代 安南에서 天竺으로 통하는 도로의 일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樊綽의『蠻書』卷6 참조.
닫기
를 열고 안녕성(安寧城)을 쌓는다는 소문이 들리자, 여러 만(蠻)이 놀라서 소동을 일으켜 함께 [당(唐)의] 축성사자(築城使者)를 죽였다. 현종(玄宗)이 조를 내려 [남조(南詔)의] 몽귀의(蒙歸義) 주 005
각주 005)
蒙歸義: 南詔王 閤羅鳳을 지칭한다. 자세한 내용은『新唐書』「南蠻傳」上 참조.
닫기
에게 그들을 치게 하였다. 군대가 파주(波州) 주 006
각주 006)
波州: 唐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雲南의 祥雲縣에 해당하였다. 관할구역은 雲南의 祥雲縣 대부분 지역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닫기
에 이르러, 찬귀왕찬숭도 형제 등 천여인이 머리가 진흙에 닿도록 절하며 사죄하니, 용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숭도일진귀왕을 죽였다. 귀왕의 처 아타(阿奼)는 오만(烏蠻)의 딸이었는데, 아버지의 부(部)로 달아나 군대를 빌어 복수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제찬(諸爨)이 혼란에 빠졌다. 아타가 사자를 보내 몽귀의(蒙歸義)에게 이르러 남편을 죽인 자를 얻기 바란다고 하였다. 상서(上書)하여 [조정에] 알리자, 조(詔)를 내려 귀왕의 아들 수우(守隅)를 남영주도독(南寧州都督)으로 삼았다. 몽귀의는 딸을 수우에게 처로 주었고, 또 다른 딸 하나를 숭도의 아들 보조(輔朝)에게 주었다. 그러나 숭도수우는 서로 공격하여 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아타귀의에게 호소하니, 이 때문에 군대를 일으켜 곤천(昆川)에 군영을 두었고, 숭도여주(黎州) 주 007
각주 007)
黎州: 唐 貞觀 8年(634)에 西寧州를 고쳐서 설치하였고, 治所는 梁水縣에 두어졌는데, 오늘날 雲南 江川縣東南쪽 大街镇 舊州村에 비정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의 華寧·江川·通海 等의 縣 및 玉溪市 지역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닫기
로 달아났다. 마침내 그 종족(宗族)을 사로잡았다. [그 아들] 보조는 죽이고 자신의 딸은 거두었다. 숭도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피살되니, 제찬(諸爨)이 점차 흩어지고 약해졌다.주 008
각주 008)
같은 사건에 대하여,『蠻書』는 조금 다르게 적었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처음에 爨歸王이 南甯州都督이 되어 石城을 치리하면서, 孟聘(孟躭?)·孟啓父子를 습격하여 죽이고 마침내 升麻川을 차지하였다. 歸王의 兄으로 摩湴이라는 자가 있었다. 湴이 崇道를 낳았는데, 曲軛川을 다스리면서 兩爨의 大鬼主가 되었다. 崇道의 동생 日進과 日用은 安甯城에 있었다. 章仇兼瓊이 步頭路를 개척함에 미쳐서 막 安甯에 築城하려 하자, 羣蠻이 騷動하여 築城使者를 죽였다. 唐 玄宗은 사자를 파견하여 雲南王 蒙歸義에게 칙령을 내려 討伐하게 하였다. 歸義의 군대가 波州(雲南: 지금의 祥雲)에 이르자, 歸王 및 崇道 兄弟 그리고 爨彥璋 等 千餘人이 軍門에 이르러 엎드려 謝罪하여, 前事를 씻어주도록 주청할 것을 請하였다. 歸義가 공개적으로 상주하여 보고하였다. 가고 오는데 25日이 지나고 詔書가 내려왔는데 모두 용서한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崇道가 日進을 죽이고, 또 歸王을 陰害하였다. 歸王의 妻 阿姹는 烏蠻의 딸인데, 父母에게로 달아나 投託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서로 대치하니, 諸爨의 豪帥가 혼란에 빠졌다. 阿姹가 몰래 蒙舍川에 사자를 보내어 投託을 求하니, 歸義가 卽日로 (아차를) 두둔하는 奏疏를 올려 보고하였다. 阿姹의 아들 守偶가 마침내 歸王을 대신하여 南甯州都督이 되었고, 이에 歸義는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귀의는) 또 다른 딸 하나를 崇道의 아들 輔朝에게 妻로 주었다. 崇道는 안으로 忿惋을 품고 밖으로는 和平을 내어 보이면서, 오히려 守偶 母子와 날마다 서로 攻伐하였다. 阿姹가 다시 歸義에게 呼訴하기를 군대를 일으켜 問罪해달라고 하였다. 군대의 행렬이 昆川의 信宿에 이르자, 曲軛川의 무리가 무너지고 흩어졌으며, 崇道는 南쪽 黎州로 달아났다. 歸義는 그 家族·羽黨을 모두 사로잡았고, 아울러 輔朝를 죽이고 자신의 딸을 취하였다. 崇道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被殺되었다. 諸爨은 이로부터 이산하여 약해졌다. 歸義가 죽고 아들 閣羅鳳이 서자, 守偶는 妻와 함께 河賧에 歸依하였고, 이로부터 皇化와 隔絕하였다. 阿姹는 스스로 烏蠻部落의 王이 되었으며, 京師에 나아가 朝參하여 크게 恩賞을 입었다. 閣羅鳳은 昆川城使 楊牟利를 보내 西爨을 군대로 포위하고 협박하여 20餘 萬 戶를 永昌城으로 옮겼다. 烏蠻은 言語가 不通하고, 대부분 林谷에 흩어져 있던 까닭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 뒤로 曲州·靖州·石城·升麻川·昆川으로부터 남으로 龍和에 이르기까지 텅 빈 것이 兵火를 입어 초토화된 것 같았다. 日用의 子孫들은 지금도 모두 永昌城 境界 안에 있다. 烏蠻 種類가 점차 다시 떨쳐 일어나, 나중에는 西爨故地로 徙居하였다. 지금은 南詔와 婚姻之家를 이루었다.”(『雲南志補注』卷4 「名類」: 47~48).
닫기

〈『蠻書』·『新唐書』南蠻傳·『資治通鑑』·「爨守忠墓誌」에 따른 서찬백만 수령 가계표〉

  • 각주 001)
    爨崇道: 爨崇道는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爨榮宗의 손자이자 爨摩湴의 장자이다. 따라서 남영주도독 찬귀왕과는 숙질지간이 된다.『찬수충묘지』등의 기사와 이 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찬귀왕이 南寧郡王을 ‘紹封’하였다는 것과 그가 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소봉’이라는 것은 襲封者의 잘못으로 廢封된 爵에 대하여 원봉자의 공을 기려 다른 자손을 찾아 원봉자의 뒤를 잇게 하는 冊封 형태이다. 찬귀왕이 소봉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그가 그 아버지의 작위에 대한 합법적 계승자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녕군왕’이라는 작위가 그 부 찬인홍 아니면 이를 습봉한 찬귀왕 형제의 잘못으로 취소되었다는 것이다.『蠻書』에 따르면, 찬귀왕에게는 爨摩湴이라는 형이 있었다. 바로 찬숭도 형제의 父이다. 그에 관한 다른 정보는 없지만, 그 아들 찬숭도의 활약을 보건대, 찬마밤이 남녕군왕이자 남영주자사였던 찬인홍의 承嗣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爨崇道는 ‘勅安南首領爨仁哲書’에서부터 爨歸王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 칙서에 드러난 당시 그의 직위는 ‘南寧州司馬·威州刺史·都大鬼主’였다. 「南詔德化碑」에서는 742년 당시 그가 ‘南寧州 大鬼主’였다고 적고 있고, 앞서『蠻書』기사에서는 “曲軛川을 다스리면서 兩爨의 大鬼主가 되었다”고 하였다. 曲軛川은 곧 威州이다. 그리고 본문 또한 찬숭도가 ‘兩爨의 大鬼主’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찬숭도의 직책들과 찬귀왕의 직책 ‘右監門衞大將軍·南寧州刺史’, ‘南寧州都督’을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이 권력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찬귀왕은 ‘남녕군왕’·‘남영주자사(도독)’의 직을 승계한 데 비하여, 찬영종의 ‘種落의 侯王’ 직에 해당하는 남영주(양찬) (도)대귀주직은 찬숭도가 계승하고 있다. 찬귀왕은 중국 왕조에 의해 수여된 작위와 관직을 승계한 것이고, 찬숭도는 토착 질서에 의한 권력을 승계한 셈이다. 武散階 從三品에 해당하는 右監門衞大將軍의 품계는 찬귀왕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 ‘위주자사직’은 곡액천을 실제로 다스리는 주인인 찬숭도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며, ‘남영주사마’직은 남영주를 중심으로 승계된 가계의 권력 서열에서 찬숭도가 제2인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은 742년 찬숭도의 동생 爨日進이 西爨의 重鎭인 昆州의 刺史로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찬진과 찬완의 分統에서처럼 찬인홍의 아들들 또한 분통하여 남영주 지역을 통치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鄭勉,『東洋史學硏究』2010: 92, 112~133).
     바로가기
  • 각주 002)
    安寧城: 현재의 雲南省 安寧市에 비정된다. 南詔가 지배한 뒤에는 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章仇兼瓊: 生卒 연도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대략 唐 則天武后 말기에 태어나고 天寶 연간 말기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唐玄宗 時期에 劍南節度使의 자리에 있었으며, 8년간 재임하였다. 치적이 비교적 좋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步頭路: 唐代 安南에서 天竺으로 통하는 도로의 일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樊綽의『蠻書』卷6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蒙歸義: 南詔王 閤羅鳳을 지칭한다. 자세한 내용은『新唐書』「南蠻傳」上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6)
    波州: 唐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雲南의 祥雲縣에 해당하였다. 관할구역은 雲南의 祥雲縣 대부분 지역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黎州: 唐 貞觀 8年(634)에 西寧州를 고쳐서 설치하였고, 治所는 梁水縣에 두어졌는데, 오늘날 雲南 江川縣東南쪽 大街镇 舊州村에 비정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의 華寧·江川·通海 等의 縣 및 玉溪市 지역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같은 사건에 대하여,『蠻書』는 조금 다르게 적었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처음에 爨歸王이 南甯州都督이 되어 石城을 치리하면서, 孟聘(孟躭?)·孟啓父子를 습격하여 죽이고 마침내 升麻川을 차지하였다. 歸王의 兄으로 摩湴이라는 자가 있었다. 湴이 崇道를 낳았는데, 曲軛川을 다스리면서 兩爨의 大鬼主가 되었다. 崇道의 동생 日進과 日用은 安甯城에 있었다. 章仇兼瓊이 步頭路를 개척함에 미쳐서 막 安甯에 築城하려 하자, 羣蠻이 騷動하여 築城使者를 죽였다. 唐 玄宗은 사자를 파견하여 雲南王 蒙歸義에게 칙령을 내려 討伐하게 하였다. 歸義의 군대가 波州(雲南: 지금의 祥雲)에 이르자, 歸王 및 崇道 兄弟 그리고 爨彥璋 等 千餘人이 軍門에 이르러 엎드려 謝罪하여, 前事를 씻어주도록 주청할 것을 請하였다. 歸義가 공개적으로 상주하여 보고하였다. 가고 오는데 25日이 지나고 詔書가 내려왔는데 모두 용서한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崇道가 日進을 죽이고, 또 歸王을 陰害하였다. 歸王의 妻 阿姹는 烏蠻의 딸인데, 父母에게로 달아나 投託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서로 대치하니, 諸爨의 豪帥가 혼란에 빠졌다. 阿姹가 몰래 蒙舍川에 사자를 보내어 投託을 求하니, 歸義가 卽日로 (아차를) 두둔하는 奏疏를 올려 보고하였다. 阿姹의 아들 守偶가 마침내 歸王을 대신하여 南甯州都督이 되었고, 이에 歸義는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귀의는) 또 다른 딸 하나를 崇道의 아들 輔朝에게 妻로 주었다. 崇道는 안으로 忿惋을 품고 밖으로는 和平을 내어 보이면서, 오히려 守偶 母子와 날마다 서로 攻伐하였다. 阿姹가 다시 歸義에게 呼訴하기를 군대를 일으켜 問罪해달라고 하였다. 군대의 행렬이 昆川의 信宿에 이르자, 曲軛川의 무리가 무너지고 흩어졌으며, 崇道는 南쪽 黎州로 달아났다. 歸義는 그 家族·羽黨을 모두 사로잡았고, 아울러 輔朝를 죽이고 자신의 딸을 취하였다. 崇道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被殺되었다. 諸爨은 이로부터 이산하여 약해졌다. 歸義가 죽고 아들 閣羅鳳이 서자, 守偶는 妻와 함께 河賧에 歸依하였고, 이로부터 皇化와 隔絕하였다. 阿姹는 스스로 烏蠻部落의 王이 되었으며, 京師에 나아가 朝參하여 크게 恩賞을 입었다. 閣羅鳳은 昆川城使 楊牟利를 보내 西爨을 군대로 포위하고 협박하여 20餘 萬 戶를 永昌城으로 옮겼다. 烏蠻은 言語가 不通하고, 대부분 林谷에 흩어져 있던 까닭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 뒤로 曲州·靖州·石城·升麻川·昆川으로부터 남으로 龍和에 이르기까지 텅 빈 것이 兵火를 입어 초토화된 것 같았다. 日用의 子孫들은 지금도 모두 永昌城 境界 안에 있다. 烏蠻 種類가 점차 다시 떨쳐 일어나, 나중에는 西爨故地로 徙居하였다. 지금은 南詔와 婚姻之家를 이루었다.”(『雲南志補注』卷4 「名類」: 47~48).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숭도(崇道), 일진(日進), 일용(日用), 장구겸경(章仇兼瓊), 현종(玄宗), 몽귀의(蒙歸義), 찬귀왕, 찬숭도, 숭도, 일진, 귀왕, 귀왕, 아타(阿奼), 아타, 몽귀의(蒙歸義), 수우(守隅), 몽귀의, 수우, 숭도, 보조(輔朝), 숭도, 수우, 아타, 귀의, 숭도, 보조, 숭도
지명
안녕성(安寧城), 보두로(步頭路), 안녕성(安寧城), 당(唐), 남조(南詔), 파주(波州), 곤천(昆川), 여주(黎州)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爨歸王·爨崇道을 치게 하니 사죄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