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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爨蠻과 중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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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찬만(兩爨蠻)
양찬만(兩爨蠻). 곡주(曲州) 주 001
각주 001)
曲州: 唐 武德 8年(625)에 恭州를 고쳐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朱提縣이었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운남성의 昭通市와 魯甸縣에 해당한다. 天寶 연간 이후 南詔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四川省의 宜賓縣의 安邊 西南쪽 30km 떨어진 곳으로 옮겨 설치되었으나, 唐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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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靖州) 주 002
각주 002)
靖州: 唐 武德 연간 초에 協州를 쪼개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靖川縣에 두었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昭通市 北部 靖安 壩子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지금의 昭通市 北部 및 大關縣 西部 지역에 해당한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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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서남쪽 곤천(昆川) 주 003
각주 003)
昆川:『雲南志補注』의 向達 原校에서는 본디『蠻書』에서는 ‘昆州’로 적었는데(『雲南志補注』卷4: 47), 昆川으로 고쳤다고 적어놓았을 뿐, 정확한 위치 비정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方國瑜는 昆川을 昆州로 보았다(方國瑜, 1987: 292).『蠻書』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볼 때, 방국유의 설이 옳다고 판단된다. 우선 卷4 「名類」에서 서찬을 설명하면서, “在石城, 昆川, 曲軛, 晉甯, 喩獻, 安甯至龍和城”(『雲南志補注』卷4: 47)의 순서로 늘어놓아, 본문에서와 같이 昆川이 曲軛보다 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같은 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사는 이 순서가 방위와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南詔軍이 昆川과 信宿에 이르자, 曲軛川이 潰散하고, 崇道는 남쪽으로 黎州로 달아났다.”(『雲南志補注』卷4: 48). 이 경우에는 남조군의 진격 방향으로 보아 곤천이 곡액천보다 서쪽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음의 두 기사를 비교해 보면 昆州와 昆川이 비슷한 지역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磨蠻 또한 烏蠻의 種類이다. 鐵橋 위 아래 및 大婆, 小婆, 三探覽, 昆池 等의 川이 모두 이들의 거주지이다. …… 南詔가 鐵橋 및 昆池 等의 諸城을 습격 격파하여, 무릇 萬戶를 虜獲하여 모두 昆川 左右 및 西爨故地에 나누어 예속 시켰다(『雲南志補注』卷4: 57).” 다음은 卷6 「雲南城鎭」의 기사이다. “柘東城은 廣德 2年(764)에 鳳伽異가 설치한 것이다. 그 땅은 漢의 옛 昆川이며, 때문에 昆池라 불렀다. 東北쪽에 井邑과 城隍이 있다. 城의 西쪽에는 漢城이 있는데, 土俗에 서로 전하기를 莊蹻의 故城이라 한다. ……貞元 10年(794)에 南詔가 西戎을 깨뜨리고, 施·順·磨些 諸種 數萬戶로 그 땅을 채웠다(『雲南志補注』卷6: 80).” 卷4의 기사에서 남조가 철교 및 곤지 등의 제성을 격파한 시점은 바로 卷6의 794년이다. 같은 사건을 지칭하고 있으며, 卷4의 昆川은 결국 卷6의 柘東城이자 昆川(혹은 昆州)인 셈이다. 그리고 권4에는 또 “閣羅鳳이 昆川城使 楊牟利를 보내 군대로 西爨을 포위하고 위협하여, 20餘萬戶를 永昌城으로 옮겼다”(『雲南志補注』卷4: 48)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의 곤천성사는 764년 자동성이 만들어지기 전에 滇池 지역을 관리하던 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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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액(曲軛) 주 004
각주 004)
曲軛: 오늘날 雲南省 嵩明縣 南쪽 13km의 楊林鎭에 해당한다. 唐朝가 이곳에 威州를 설치하였으나,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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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녕(晉寧) 주 005
각주 005)
晉寧: 오늘날 雲南省 晉寧縣 東北 16km에 위치한 晉城鎭에 해당한다. 唐 武德 元年(618)에 縣을 설치하였으며, 昆州에 속하였다. 나중에 南詔가 晉寧州를 두어 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고, 大理가 廢하여 陽城堡部로 삼았다. 元 至元 12年(1275)에 점령하여 晉寧州로 삼고, 中慶路에 속하게 하였다. 明·淸대에는 雲南府에 속하였다. 1913年에 廢하여 晉寧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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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喩獻) 주 006
각주 006)
喩獻: 譚其驤은『中國歷史地圖集』第5冊에서 雲南省 澄江縣에 비정하였다. 이곳은 漢代에 兪元縣이 설치되어 魏晉南北朝 시기까지 이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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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용화성(龍和城) 주 007
각주 007)
龍和城: 雲南省 祿豐縣城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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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서찬백만(西爨白蠻)주 008
각주 008)
西爨白蠻과 東爨烏蠻: 方國瑜의 규정에 따르면, 爨은 蜀漢代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雲南 지역의 土着漢人 大姓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 爨氏는 建寧과 興古 및 南中 여러 郡의 部族들을 통솔하여 할거하였다. 이들 대성 찬씨가 통치한 지역이 ‘爨地’이고, 찬지의 거민은 叟族을 위주로 하였는데, 칭하여 爨人이라 하였다. 찬의 부족을 爨部라 한다. 그런데 찬부 내의 거민이 모두 爨族도 아니고, 찬부의 통치자가 모두 爨氏도 아니어서, 그 경계를 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대체로 東과 西 두 爨으로 구분하는데, 建寧과 興古郡의 찬은 西爨, 朱提의 찬은 東爨으로 나누는 것이 대략이다. 그리고『雲南志補注』나 본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西爨은 白蠻, 東爨은 烏蠻이다. 이상이 方國瑜가 말하는 대략이다(方國瑜, 1987: 347~348). 물론 찬부의 주요 거민의 族源을 비롯하여 여러 문제에 관해 이설이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굳이 소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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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일컫는다. 미록(彌鹿) 주 009
각주 009)
彌鹿: 雲南省 瀘西縣에 해당한다. 南詔에서 彌鹿部를 설치하여, 屬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다. 大理에서는 石城郡에 속하게 하였고, 元代에 廣西路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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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升麻) 주 010
각주 010)
升麻: 雲南省 尋甸回族彝族自治縣에 해당한다. 唐 武德 元年(618)에 縣을 설치하여, 南寧州에 속하게 하였다. 常璩의『華陽國志』「南中志」에서는 “山에서 좋은 升麻가 난다.”라고 하였다. 貞觀 8年(634)에 郎州에 속하게 하였다가, 開元 5年(717)에 다시 南寧州에 속하게 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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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천(川)으로부터 남쪽으로 보두(步頭) 주 011
각주 011)
步頭: 雲南省 建水縣 남쪽 46km 지점에 위치하는 紅河 北岸의 阿土에 해당한다. 步頭는 곧 부두 선창의 뜻이다. 唐代 雲南 南部 교통로상의 水陸 轉運 부두였으며, 安南都護府로부터 南詔로 통하는 문호였다. 현재 위치를 雲南 元江哈尼族彝族傣族自治縣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蠻書』卷6에서는 “通海城 남쪽으로 14日 가면 步頭에 이르며, 步頭로부터 배를 타고 강을 따라 35일을 가면 南蠻으로 나간다.”(『雲南志補注』卷6: 83)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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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를 동찬오만(東爨烏蠻)이라고 일컫는다. 서찬(西爨)은 스스로 본디 안읍(安邑)주 012
각주 012)
安邑: 漢代 河東郡의 安邑縣을 말한다. 縣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그 치소는 山西省 夏縣 西北으로 7.5km 떨어진 禹王城에 두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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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었고, 7대조가 진(晉)의 남녕태수(南寧太守)가 되었는데,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마침내 만(蠻) 가운데서 왕(王)이 되었다고 말한다.주 013
각주 013)
‘遂王蠻中’의 時點에 관하여, 方國瑜는 東晉 穆帝 永和 3年(347) 이후 大姓 爨氏의 ‘南中稱覇’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方國瑜, 1954: 464). 이 해에 東晉 정부는 蜀에 할거하던 成漢을 멸하였으나, 寧州에 대하여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하지 못하였다. 347년 이후 임명된 寧州刺史는 대부분 益州나 荊州에 교거하면서 遙領하였을 뿐이었다. 또 방국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운남사 연구자들은 남중 내부에서 찬씨가 타 대성들에 비하여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 시점을 東晉 成帝 咸康 5년(339) 이후로 추정한다. 339년 여름 成漢의 建寧太守 孟彦이 州人을 이끌고 寧州刺史 霍彪를 사로잡아 晉에 투항하였는데(『晉書』卷7 「顯宗成帝衍」: 181 ;『華陽國志』卷9 「李特雄期壽勢志」: 501), 이 사건을 대성 爨氏와 대성 霍氏가 남중에서 힐항하던 중 大姓 霍氏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계기로 해석한 것이다. 한 사람을 제거했다고 해서 그 씨족 전체가 제거된 것처럼 보는 것은 비약의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이 사건 이후 남중 내부의 사정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爨寶子碑」와 「爨龍顔碑」가 등장하는 바,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중국 正史에 등장하는 寧州刺史들은 그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찬용안비에 등장하는 영주자사들은 정사에 드러나지 않는 현상은 南朝 시기 내내 남조 왕조의 지배력이 영주에 제대로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찬씨들의 寧州刺史職 또한 ‘自領’ 혹은 ‘遙授’에 의한 것임을 추측케 한다. 물론 이들의 독자적 자치는 周仲孫이나 徐文盛 등 무장력을 거느린 刺史들에 의해 침해되기도 하였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宋朝와 齊朝의 단속적이지만 빈번한 영주자사 임명에도 불구하고, 寧州는 중국과 구분된 공간으로 남아있었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07: 364~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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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 무제(元帝) 시기에 남영주(南寧州)주 014
각주 014)
南寧州: 본문에서는 南寧州 刺史라고 하였지만, 梁朝의 입장에서는 寧州이므로, 徐文盛은 寧州刺史라고 해야 옳다. 南寧州는 西魏시기에 寧州를 고쳐서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그 治所는 建寧郡에 두어졌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陸良縣 南쪽 1.5km 떨어진 舊城에 해당한다. 관할 지역은 오늘날의 雲南省과 貴州省에 상당한다. 保定 2年(562)에 남영주를 나누어 恭州를 설치하면서, 오늘날의 滇東北 지역은 南寧州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味縣에 두어졌는데, 그 치소는 오늘날 雲南省 曲靖市 북쪽 7km 떨어진 위치의 삼거리에 해당한다. 唐初 南寧州의 관할구역은 겨우 지금의 雲南省 宣威市 以南에, 尋甸과 宜良 및 玉溪 以東, 彌勒縣의 以北 지역에 해당되었다. 武德 7年(624)에는 남영주의 西南部를 나누어 西寧州를 설치하여, 관할구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貞觀 8年(634)에 이름을 郎州로 바꾸었다. 開元 5年(717)에 다시 이름을 회복하여 南寧州라고 하였으며, 그 관할구역은 雲南省 曲靖市 및 陸良·宜良·師宗·彌勒·瀘西·尋甸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元代 至元 13年(1276)에 복치되어 曲靖路의 치소가 두어졌다. 治所는 곧 雲南省의 曲靖市였다. 21年(1284)에 강등되어 縣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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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刺史) 서문성(徐文盛) 주 015
각주 015)
徐文盛: 字는 道茂이고, 彭城人이다. 집안 대대로 北魏에 출사하여 장수를 지냈으나, 그 父 慶之가 梁武帝 天監 연간(502~519) 初에 무리 千餘人을 이끌고 梁으로 망명하였다. 그 부 경지는 망명 도중에 죽었고, 서문성이 그 무리를 이끌었다. 세운 공이 많아 무제가 총애 하였다. 大同 연간(535~545) 末에 ‘持節·督寧州刺史’에 제수되어 영주에 부임하였다. 이 때의 일에 대하여,『梁書』「徐文盛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문성이 부임하기 전에는 州가 僻遠한 곳에 위치한 데다, 관할 하의 羣蠻이 教와 義를 알지 못하고 財賄에 탐욕스러워, 劫篡이 서로 이어져도[相尋] 前後 刺史가 제어하지 못하였다. 文盛이 마음으로부터 어루만지고 위로하면서 威德을 보이자, 夷獠가 감동하여 風俗이 마침내 바뀌었다. …… 太淸 2年(548), (文盛이) 國難을 듣고, 召募를 통해 數萬人을 얻어 달려갔다.”(『梁書』卷46: 640~641; 鄭勉, 2009: 183). 이후 梁元帝에 의해 持節·散騎常侍·左衛將軍·督梁·南秦·沙·東益·巴·北巴六州諸軍事·仁威將軍·秦州刺史에 제수되어 侯景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결국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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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징소되어 형주(荊州)에 이르자,주 016
각주 016)
앞의 주에 밝힌 바대로, 侯景의 난으로 인하여 당시 荊州刺史였던 梁 元帝가 소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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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찬(爨瓚)이라는 자(者)가 그 땅에 할거하여, [그 세력이] 남북으로 2천여 리에 미쳤다.주 017
각주 017)
『隋書』「梁睿傳」에 실린 梁睿의 상주문에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다. 梁睿는 580년 益州總管으로서 전임 익주총관 王謙의 난을 진압하고, 西川 지역 夷와 獠를 초무하였다. 그런데 당시 南寧州 지역에 할거한 爨震이 빈복하지 않자,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그 중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南寧州는 漢代의 䍧柯郡이 있던 곳인데, 近代 이래 나누어 興古·雲南·建寧·朱提 4郡을 두었습니다. …… 晉 太始 7年(271)에 益州가 너무 멀다 하여 나누어 寧州를 설치하였습니다(太淸 2年; 548). 괴뢰 僞梁의 南寧州刺史 徐文盛이 湘東王 繹(梁 元帝)의 徵召에 荊州로 달려감에 이르러, (남영주가) 東夏(동중국 즉 南朝)와의 사이가 더욱 멀어졌으나 멀리 경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土民 爨瓚이 마침내 一方에 할거하니, 國家는 刺史職을 ‘遙授’하였습니다. 그 子 震이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爨震은 臣禮에 결하는 것이 많고, 貢賦도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奉獻하는 것이 말 수십 필에 불과합니다. 그가 거처하는 곳은 益州와의 거리가 千里에 지나지 않으며, 朱提의 北境은 戎州와 接界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저들이 그의 가혹한 정치를 괴로워하여, 皇風이 미치기를 고대한다 합니다. …… 請하건대, 南寧을 略定하고자 합니다. 盧州·戎州로부터 군량을 공급하게 하고, 이곳을 지나면 바로 蠻夷에게 징세하여 兵馬를 공급하게 할 것입니다. 저 寧州와 朱提·雲南·西爨에는 모두 總管과 州·鎭을 설치할 것입니다. 저들 熟蠻의 租와 調를 헤아리면, 城防과 倉儲에 이바지하는 데 족합니다. …….”(『隋書』: 1126~1127). 찬찬과 찬진 부자의 할거는 西爨國의 성립을 의미하였다(鄭勉, 2009: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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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준마(駿馬)와 무소 코끼리 명주(明珠)가 많이 난다. 찬찬이 죽자, 아들 진(震)완(翫)이 그 무리를 나누어 다스렸다. 수(隋) 개황(開皇) 연간(581~600) 초에 사자를 보내 조공(朝貢)하니, [수 문제가] 위세충(韋世沖) 주 018
각주 018)
韋世沖: 세충은 字이고, 본명은 沖이다.『隋書』「韋世康傳」에 附하여 입전되어 있다. 韋世康은 위충의 부친으로 京兆 杜陵 사람이었다. 위충의 열전을 참조하여 본문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隋文帝는 본문이 시기보다 앞서 王長述을 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남녕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장술은 南寧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였다(『隋書』卷54: 1361~1362). 이 정벌을 끝까지 수행한 인물이 바로 韋沖이었다. 南寧州總管에 임명된 위충은 ‘持節撫慰’의 임무를 가지고 익주에 寄置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隋文帝의 요청에 의하여 행군총관 왕장술의 남녕 진격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력시위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별다른 전투 없이 爨震과 爨翫을 비롯한 西爨 首領들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韋沖傳에서는 찬진 및 西爨 수령들이 “詣府參謁”하였다고 했다. 본문에서 開皇初에 저들이 ‘遣使朝貢’하고, 남영주총관 위충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수하여 恭州·協州·昆州의 세 주를 설치했다고 한 것은 이의 후속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韋沖의 南寧 경략과 西爨의 “詣府參謁”로 시작된 隋王朝의 南中 경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시 南寧州에서 이른바 ‘邊人’이 실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韋沖의 兄子로 그 숙부를 수행 중이던 伯仁이 남의 처를 빼앗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그 사졸들 또한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隋文帝는 대노하였고, 이 사건을 당시 益州總管이자 西南道行臺 尙書令이었던 蜀王 秀에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 성정이 方正하였던 益州總管府 長史 元巖은 위충의 案을 조금의 너그러움도 없이 처리하였고, 위충은 끝내 그 일에 연좌되어 免官되었다(『隋書』卷47: 1270). 이 일이 정확히 언제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늦어도 開皇 12年(592) 이전에 완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개황 12년 蜀王 秀가 內史令·右領軍大將軍이 되어 잠시 還朝하였고, 위충의 사건을 담당하였던 元巖은 개황 13년 순직하였기 때문이다(『隋書』卷62: 1476). 위충이 면관된 이후 南寧州總管府가 어떻게 경영되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며, 사서의 기록은 개황 17년(597) 사만세의 ‘남중’ 정벌로 이어졌다. 그리고『新唐書』「地理志」는 恭州·協州·昆州가 隋代에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韋世沖이 南中에 둔수한 정확한 시점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韋世沖傳」이나 「王長述傳」의 기사들을 보건대 陳을 평정하는 開皇 9년(589)으로부터 1~3년 전의 일로 보인다. 楊武通 열전의 기록으로 보건대, 위세충의 屯戍 이후 사만세의 정벌까지 약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南寧州에 대한 隋王朝의 통제는 매우 불안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鄭勉, 2009: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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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군대를 주둔케 하고, 공주(恭州) 주 019
각주 019)
恭州: 北周 保定 2年(562)에 南寧州를 쪼개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朱提縣에 두어졌는데, 주제현은 오늘날 雲南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지금의 滇東北 지역 대부분에 상당하였다. 隋 大業 연간 初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다. 치소는 安上縣에 두어졌는데, 오늘날 雲南省의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昭通市와 魯甸縣에 상당하였다. 7年(624)에는 치소를 朱提縣에 두었다. 8年(625)에는 이름을 曲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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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주(協州) 주 020
각주 020)
協州: 隋 開皇 4年(584)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東安縣에 두어졌는데, 곧 雲南省 彝良縣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雲南省 彝良과 大關 두 縣에 상당하였다. 大業 연간 초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관할구역은 彝良縣과 大關縣 東部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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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주(昆州) 주 021
각주 021)
昆州: 隋 開皇 4年(584)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益寧縣에 두어졌다. 익녕현은 오늘날 雲南省 昆明市 西쪽 교외의 馬街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滇池 주위의 西 北 東 3面에 상당한다. 唐 玄宗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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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하니,주 022
각주 022)
이때 반란의 주체는 爨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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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세(史萬歲) 주 023
각주 023)
史萬歲(549~600): 京兆 杜陵 사람이었다. 두릉현은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東南部에 상당한다. 隋朝의 名將이다. 史萬歲의 父親은 史靜으로, 北周에서 滄州刺史를 지냈다. 史萬歲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騎射에 능하였고, 날래기가 나는 듯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兵書 읽기를 좋아하였다. 北周 保定 4年(564)에 洛陽城 北쪽의 北邙山에서 北周와 北齊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15歲의 史萬歲가 부친을 따라 從軍하였는데, 그가 戰場의 形勢를 관찰한 뒤, 周軍이 패할 것을 예상하고 좌우를 정리하여 현장을 떠나 조금 퇴각하였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과연 周軍이 大敗하였다. 이에 그 부친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北周 建德 6年(577), 周武帝 宇文邕이 군대를 이끌고 북제 평정에 나섰는데, 이때 사만세의 부친 史靜이 戰死하였다. 史萬歲는 忠臣의 子로서 開府儀同三司에 배수되었으며, 襲爵하여 太平縣公이 되었다. 본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南寧州의 昆州刺史 爨翫이 반란을 일으키자, 隋 開皇 17年(597) 2月에 隋文帝는 史萬歲를 行軍總管으로 삼아 爨翫을 치게 하였다. 사만세는 찬완을 사로잡았으나, 뇌물을 받고 찬완을 놓아 둔 채 귀환하였다. 史萬歲는 南方의 각 部落을 평정한 공으로 上柱國으로 승진하였고, 晉王 楊廣(수 양제)과의 친분으로 인해 督晉王府軍事의 직임을 겸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爨翫이 다시 이반하였고, 蜀王 楊秀가 史萬歲의 受賄건을 다시 들추어내어 탄핵하였다. 이 일로 사만세는 삭탈관직되어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1年 뒤 官爵을 회복하여, 河州(甘肅省 臨夏 東北)刺史에 제수되어, 行軍總管을 겸령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돌궐의 침입을 격퇴한 공을 세워 경사로 돌아갔으나, 尙書右僕射 楊素의 참소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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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들을 쳐서 서이하(西洱河) 주 024
각주 024)
西洱河: 지금 雲南省 大理白族自治州의 洱海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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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滇池) 주 025
각주 025)
滇池: 현재 雲南省 昆明市의 滇池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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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주 026
각주 026)
『隋書』「史萬歲傳」에서는 이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南寧夷 爨翫이 來降하여 昆州刺史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離叛하였다. 마침내 史萬歲를 行軍總管으로 삼아 무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蜻蛉川으로부터 들어가 弄凍을 거쳐서, 차례로 小勃弄·大勃弄을 거친 뒤에 南中에 이르렀다. 賊이 앞뒤 요해지에 屯據하였으나, 萬歲가 모두 쳐서 깨뜨렸다. 數百里를 행군하자, ‘諸葛亮紀功碑’가 나타났는데,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萬歲 後에 나보다 뛰어난 자가 이곳을 지날 것이다.” 萬歲가 左右로 하여금 그 碑를 거꾸러뜨리고 (계속) 나아가게 하였다. 西二河를 건너 渠濫川으로 들어가 千餘里를 행군하며, 그 三十餘部를 격파하였으며, 虜獲한 男女가 二萬餘口나 되었다. 諸夷가 크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降服을 청하며, 지름이 1寸이나 되는 明珠를 바쳤다. 이에 돌에 새겨 隋의 德을 頌美하였다. 萬歲가 遣使馳奏하여 翫을 데리고 入朝할 것을 청하니, 詔를 내려 허락하였다. 爨翫이 몰래 두 마음을 품고 궐에 가지 않으려고 만세에게 뇌물로 金寶를 주니, 萬歲가 이에 찬완을 버려두고 귀환하였다. 蜀王이 당시 益州에 있었는데, 그 受賂 사실을 인지하고 사자를 보내 수색하고자 하였다. 萬歲가 소식을 듣고 얻은 金寶를 모두 강에 던져버려서, 수색해도 얻은 것이 없었다. 사만세는 (남중 정벌의) 공으로 位가 柱國에 올랐다. …… 다음 해 爨翫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蜀王 秀가 상주하여 萬歲가 受賂하고 적을 놓아주어 邊患이 발생하는 데 이르렀으니, 大臣의 節度가 없다 하였다. 上이 그 일을 끝까지 조사하도록 하였더니, 모두 사실로 드러났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上이 질책하여 말했다. “金品을 받고 적을 놓아주는 것은 士馬를 거듭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朕은 將士들의 暴露를 생각하면, 누워도 편히 쉴 수 없고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卿을 어찌 社稷의 臣이라 하겠는가?” 萬歲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臣이 爨翫을 남겨 둔 것은 그 州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남겨서 鎭撫하도록 한 것입니다. 臣이 돌아오는 도중 瀘水에 이르렀을 때 詔書가 막 당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데리고 입조하지 못한 것이지, 진실로 受賂하지 않았습니다.” 上이 萬歲의 마음에 속이고 숨기는 바가 있다고 여기고 大怒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朕은 卿을 好人으로 여겼다. 어찌 높은 관직에 무거운 祿을 주었는데도 도리어 國賊이 되었는가?” 有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일 斬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萬歲는 두려워 죄를 자복하고, 머리를 조아려 목숨을 구걸하였다. …… 上의 意가 조금 풀려서, 이에 除名하여 民으로 삼았다. 한 해 남짓 후에 官爵을 회복하였다. ……”(『隋書』卷53: 1354~1354; 鄭勉, 2009: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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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진찬완이 두려워 입조(入朝)하였는데,주 027
각주 027)
爨震과 爨翫: 爨震은 爨瓚의 맏아들로 찬찬의 남영주자사직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고, 찬완은 찬찬의 아들로서 현재의 昆明市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가, 韋世沖의 초무 이후 隋朝로부터 昆州刺史職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서에서는 이를 ‘分統’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찬진과 찬완이 함께 입조한 것으로 적고 있지만, 찬완도 찬진과 함께 죽임을 당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찬진은 찬완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위세충의 초무 이후 西爨國 내부의 주도권은 찬완 쪽으로 옮겨갔던 것으로 보인다(鄭勉,『歷史學報』, 2009: 19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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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文帝)가 그를 죽이고 그의 자식들은 몰입(沒入)하여 노예로 삼았다.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찬완의 아들 홍달(弘達)을 곤주자사(昆州刺史)로 삼고, 부친(父親)의 관을 받들어 돌아가게 하였다. 익주자사(益州刺史) 단륜(段綸) 주 028
각주 028)
段綸: 北海 期原(지금의 山東省 靑州市) 사람이다. 段文振의 아들로서 李淵의 사위가 되었으며, 高密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관직이 蜀郡太守·劍南道招慰大使에 이르렀으며, 南寧의 西爨蠻을 초유한 뒤에 晉昌郡王에 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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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시(兪大施)를 보내, 남녕(南寧) 주 029
각주 029)
南寧: 南寧州를 지칭하며, 특히 爨震의 割據 이후, 西魏로부터 南寧州刺史직을 요수 받은 뒤, 그 지역에 대한 범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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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게 하였다. [유대시는] 공범천(共範川) 주 030
각주 030)
共範川: 方國瑜는 共範川은 곧 曲軛川이며 지금의 馬龍縣이라고 하였는데,(方國瑜, 1987: 353) 이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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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치소를 두고, 제부(諸部)의 만(蠻)을 초유(招誘)하여 모두 정성을 바쳐 복종을 표시하게 하고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태종(太宗)이 장수를 보내 서찬(西爨)을 공격하여, 청령(靑蛉) 주 031
각주 031)
靑蛉: 雲南省 大姚縣에 해당한다. 前漢 元鼎 6年(前111)에 縣이 설치되었으며, 越嶲郡에 속하였다.『水經注』〈若水〉조에 따르면, 靑蛉水는 “靑蛉縣 西쪽에서 나와, 東쪽으로 其 縣 아래를 지나는데, 縣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水經注疏』, 1989: 2950~2951). 三國 蜀 建興 3年(225)에는 雲南郡에 속하였다. 東晉 成帝 時에는 興寧郡에 속하였다. 南齊 시에는 興寧郡의 치소가 되었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4年(621)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西濮州에 속하였다가, 貞觀 11年(637)에 髳州에 속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南詔에 속하였다. 鹽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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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동(弄棟) 주 032
각주 032)
弄棟: 梇棟縣이라 적기도 한다. 前漢 元封 2年(前109)에 설치되었으며, 益州郡에 속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雲南省 姚安縣 西北 8.5km 위치의 舊城에 해당한다. 三國 蜀 建興 3年(225)에 雲南郡의 치소가 되었다. 西晉대에도 雲南郡에 속하였다. 東晉 成帝 時에는 興寧郡의 치소가 되었다. 南齊 시기에는 興寧郡에 속하였다. 梁朝 末에 폐지되었다. 南詔 시기에는 雲南節度에 속하였다. 南詔 後期에 弄棟節度의 주둔지가 되었다. 大理 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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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열고 현(縣)으로 삼았다.

  • 각주 001)
    曲州: 唐 武德 8年(625)에 恭州를 고쳐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朱提縣이었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운남성의 昭通市와 魯甸縣에 해당한다. 天寶 연간 이후 南詔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四川省의 宜賓縣의 安邊 西南쪽 30km 떨어진 곳으로 옮겨 설치되었으나, 唐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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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靖州: 唐 武德 연간 초에 協州를 쪼개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靖川縣에 두었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昭通市 北部 靖安 壩子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지금의 昭通市 北部 및 大關縣 西部 지역에 해당한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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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昆川:『雲南志補注』의 向達 原校에서는 본디『蠻書』에서는 ‘昆州’로 적었는데(『雲南志補注』卷4: 47), 昆川으로 고쳤다고 적어놓았을 뿐, 정확한 위치 비정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方國瑜는 昆川을 昆州로 보았다(方國瑜, 1987: 292).『蠻書』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볼 때, 방국유의 설이 옳다고 판단된다. 우선 卷4 「名類」에서 서찬을 설명하면서, “在石城, 昆川, 曲軛, 晉甯, 喩獻, 安甯至龍和城”(『雲南志補注』卷4: 47)의 순서로 늘어놓아, 본문에서와 같이 昆川이 曲軛보다 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같은 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사는 이 순서가 방위와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南詔軍이 昆川과 信宿에 이르자, 曲軛川이 潰散하고, 崇道는 남쪽으로 黎州로 달아났다.”(『雲南志補注』卷4: 48). 이 경우에는 남조군의 진격 방향으로 보아 곤천이 곡액천보다 서쪽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음의 두 기사를 비교해 보면 昆州와 昆川이 비슷한 지역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磨蠻 또한 烏蠻의 種類이다. 鐵橋 위 아래 및 大婆, 小婆, 三探覽, 昆池 等의 川이 모두 이들의 거주지이다. …… 南詔가 鐵橋 및 昆池 等의 諸城을 습격 격파하여, 무릇 萬戶를 虜獲하여 모두 昆川 左右 및 西爨故地에 나누어 예속 시켰다(『雲南志補注』卷4: 57).” 다음은 卷6 「雲南城鎭」의 기사이다. “柘東城은 廣德 2年(764)에 鳳伽異가 설치한 것이다. 그 땅은 漢의 옛 昆川이며, 때문에 昆池라 불렀다. 東北쪽에 井邑과 城隍이 있다. 城의 西쪽에는 漢城이 있는데, 土俗에 서로 전하기를 莊蹻의 故城이라 한다. ……貞元 10年(794)에 南詔가 西戎을 깨뜨리고, 施·順·磨些 諸種 數萬戶로 그 땅을 채웠다(『雲南志補注』卷6: 80).” 卷4의 기사에서 남조가 철교 및 곤지 등의 제성을 격파한 시점은 바로 卷6의 794년이다. 같은 사건을 지칭하고 있으며, 卷4의 昆川은 결국 卷6의 柘東城이자 昆川(혹은 昆州)인 셈이다. 그리고 권4에는 또 “閣羅鳳이 昆川城使 楊牟利를 보내 군대로 西爨을 포위하고 위협하여, 20餘萬戶를 永昌城으로 옮겼다”(『雲南志補注』卷4: 48)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의 곤천성사는 764년 자동성이 만들어지기 전에 滇池 지역을 관리하던 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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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曲軛: 오늘날 雲南省 嵩明縣 南쪽 13km의 楊林鎭에 해당한다. 唐朝가 이곳에 威州를 설치하였으나,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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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晉寧: 오늘날 雲南省 晉寧縣 東北 16km에 위치한 晉城鎭에 해당한다. 唐 武德 元年(618)에 縣을 설치하였으며, 昆州에 속하였다. 나중에 南詔가 晉寧州를 두어 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고, 大理가 廢하여 陽城堡部로 삼았다. 元 至元 12年(1275)에 점령하여 晉寧州로 삼고, 中慶路에 속하게 하였다. 明·淸대에는 雲南府에 속하였다. 1913年에 廢하여 晉寧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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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喩獻: 譚其驤은『中國歷史地圖集』第5冊에서 雲南省 澄江縣에 비정하였다. 이곳은 漢代에 兪元縣이 설치되어 魏晉南北朝 시기까지 이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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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龍和城: 雲南省 祿豐縣城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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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西爨白蠻과 東爨烏蠻: 方國瑜의 규정에 따르면, 爨은 蜀漢代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雲南 지역의 土着漢人 大姓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 爨氏는 建寧과 興古 및 南中 여러 郡의 部族들을 통솔하여 할거하였다. 이들 대성 찬씨가 통치한 지역이 ‘爨地’이고, 찬지의 거민은 叟族을 위주로 하였는데, 칭하여 爨人이라 하였다. 찬의 부족을 爨部라 한다. 그런데 찬부 내의 거민이 모두 爨族도 아니고, 찬부의 통치자가 모두 爨氏도 아니어서, 그 경계를 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대체로 東과 西 두 爨으로 구분하는데, 建寧과 興古郡의 찬은 西爨, 朱提의 찬은 東爨으로 나누는 것이 대략이다. 그리고『雲南志補注』나 본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西爨은 白蠻, 東爨은 烏蠻이다. 이상이 方國瑜가 말하는 대략이다(方國瑜, 1987: 347~348). 물론 찬부의 주요 거민의 族源을 비롯하여 여러 문제에 관해 이설이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굳이 소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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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彌鹿: 雲南省 瀘西縣에 해당한다. 南詔에서 彌鹿部를 설치하여, 屬拓東節度에 속하게 하였다. 大理에서는 石城郡에 속하게 하였고, 元代에 廣西路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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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升麻: 雲南省 尋甸回族彝族自治縣에 해당한다. 唐 武德 元年(618)에 縣을 설치하여, 南寧州에 속하게 하였다. 常璩의『華陽國志』「南中志」에서는 “山에서 좋은 升麻가 난다.”라고 하였다. 貞觀 8年(634)에 郎州에 속하게 하였다가, 開元 5年(717)에 다시 南寧州에 속하게 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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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步頭: 雲南省 建水縣 남쪽 46km 지점에 위치하는 紅河 北岸의 阿土에 해당한다. 步頭는 곧 부두 선창의 뜻이다. 唐代 雲南 南部 교통로상의 水陸 轉運 부두였으며, 安南都護府로부터 南詔로 통하는 문호였다. 현재 위치를 雲南 元江哈尼族彝族傣族自治縣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蠻書』卷6에서는 “通海城 남쪽으로 14日 가면 步頭에 이르며, 步頭로부터 배를 타고 강을 따라 35일을 가면 南蠻으로 나간다.”(『雲南志補注』卷6: 83)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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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安邑: 漢代 河東郡의 安邑縣을 말한다. 縣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그 치소는 山西省 夏縣 西北으로 7.5km 떨어진 禹王城에 두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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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遂王蠻中’의 時點에 관하여, 方國瑜는 東晉 穆帝 永和 3年(347) 이후 大姓 爨氏의 ‘南中稱覇’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方國瑜, 1954: 464). 이 해에 東晉 정부는 蜀에 할거하던 成漢을 멸하였으나, 寧州에 대하여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하지 못하였다. 347년 이후 임명된 寧州刺史는 대부분 益州나 荊州에 교거하면서 遙領하였을 뿐이었다. 또 방국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운남사 연구자들은 남중 내부에서 찬씨가 타 대성들에 비하여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 시점을 東晉 成帝 咸康 5년(339) 이후로 추정한다. 339년 여름 成漢의 建寧太守 孟彦이 州人을 이끌고 寧州刺史 霍彪를 사로잡아 晉에 투항하였는데(『晉書』卷7 「顯宗成帝衍」: 181 ;『華陽國志』卷9 「李特雄期壽勢志」: 501), 이 사건을 대성 爨氏와 대성 霍氏가 남중에서 힐항하던 중 大姓 霍氏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계기로 해석한 것이다. 한 사람을 제거했다고 해서 그 씨족 전체가 제거된 것처럼 보는 것은 비약의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이 사건 이후 남중 내부의 사정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爨寶子碑」와 「爨龍顔碑」가 등장하는 바,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중국 正史에 등장하는 寧州刺史들은 그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찬용안비에 등장하는 영주자사들은 정사에 드러나지 않는 현상은 南朝 시기 내내 남조 왕조의 지배력이 영주에 제대로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찬씨들의 寧州刺史職 또한 ‘自領’ 혹은 ‘遙授’에 의한 것임을 추측케 한다. 물론 이들의 독자적 자치는 周仲孫이나 徐文盛 등 무장력을 거느린 刺史들에 의해 침해되기도 하였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宋朝와 齊朝의 단속적이지만 빈번한 영주자사 임명에도 불구하고, 寧州는 중국과 구분된 공간으로 남아있었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07: 364~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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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南寧州: 본문에서는 南寧州 刺史라고 하였지만, 梁朝의 입장에서는 寧州이므로, 徐文盛은 寧州刺史라고 해야 옳다. 南寧州는 西魏시기에 寧州를 고쳐서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그 治所는 建寧郡에 두어졌는데, 오늘날의 雲南省 陸良縣 南쪽 1.5km 떨어진 舊城에 해당한다. 관할 지역은 오늘날의 雲南省과 貴州省에 상당한다. 保定 2年(562)에 남영주를 나누어 恭州를 설치하면서, 오늘날의 滇東北 지역은 南寧州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味縣에 두어졌는데, 그 치소는 오늘날 雲南省 曲靖市 북쪽 7km 떨어진 위치의 삼거리에 해당한다. 唐初 南寧州의 관할구역은 겨우 지금의 雲南省 宣威市 以南에, 尋甸과 宜良 및 玉溪 以東, 彌勒縣의 以北 지역에 해당되었다. 武德 7年(624)에는 남영주의 西南部를 나누어 西寧州를 설치하여, 관할구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貞觀 8年(634)에 이름을 郎州로 바꾸었다. 開元 5年(717)에 다시 이름을 회복하여 南寧州라고 하였으며, 그 관할구역은 雲南省 曲靖市 및 陸良·宜良·師宗·彌勒·瀘西·尋甸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元代 至元 13年(1276)에 복치되어 曲靖路의 치소가 두어졌다. 治所는 곧 雲南省의 曲靖市였다. 21年(1284)에 강등되어 縣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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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徐文盛: 字는 道茂이고, 彭城人이다. 집안 대대로 北魏에 출사하여 장수를 지냈으나, 그 父 慶之가 梁武帝 天監 연간(502~519) 初에 무리 千餘人을 이끌고 梁으로 망명하였다. 그 부 경지는 망명 도중에 죽었고, 서문성이 그 무리를 이끌었다. 세운 공이 많아 무제가 총애 하였다. 大同 연간(535~545) 末에 ‘持節·督寧州刺史’에 제수되어 영주에 부임하였다. 이 때의 일에 대하여,『梁書』「徐文盛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문성이 부임하기 전에는 州가 僻遠한 곳에 위치한 데다, 관할 하의 羣蠻이 教와 義를 알지 못하고 財賄에 탐욕스러워, 劫篡이 서로 이어져도[相尋] 前後 刺史가 제어하지 못하였다. 文盛이 마음으로부터 어루만지고 위로하면서 威德을 보이자, 夷獠가 감동하여 風俗이 마침내 바뀌었다. …… 太淸 2年(548), (文盛이) 國難을 듣고, 召募를 통해 數萬人을 얻어 달려갔다.”(『梁書』卷46: 640~641; 鄭勉, 2009: 183). 이후 梁元帝에 의해 持節·散騎常侍·左衛將軍·督梁·南秦·沙·東益·巴·北巴六州諸軍事·仁威將軍·秦州刺史에 제수되어 侯景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결국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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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앞의 주에 밝힌 바대로, 侯景의 난으로 인하여 당시 荊州刺史였던 梁 元帝가 소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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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隋書』「梁睿傳」에 실린 梁睿의 상주문에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다. 梁睿는 580년 益州總管으로서 전임 익주총관 王謙의 난을 진압하고, 西川 지역 夷와 獠를 초무하였다. 그런데 당시 南寧州 지역에 할거한 爨震이 빈복하지 않자,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그 중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南寧州는 漢代의 䍧柯郡이 있던 곳인데, 近代 이래 나누어 興古·雲南·建寧·朱提 4郡을 두었습니다. …… 晉 太始 7年(271)에 益州가 너무 멀다 하여 나누어 寧州를 설치하였습니다(太淸 2年; 548). 괴뢰 僞梁의 南寧州刺史 徐文盛이 湘東王 繹(梁 元帝)의 徵召에 荊州로 달려감에 이르러, (남영주가) 東夏(동중국 즉 南朝)와의 사이가 더욱 멀어졌으나 멀리 경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土民 爨瓚이 마침내 一方에 할거하니, 國家는 刺史職을 ‘遙授’하였습니다. 그 子 震이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爨震은 臣禮에 결하는 것이 많고, 貢賦도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奉獻하는 것이 말 수십 필에 불과합니다. 그가 거처하는 곳은 益州와의 거리가 千里에 지나지 않으며, 朱提의 北境은 戎州와 接界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저들이 그의 가혹한 정치를 괴로워하여, 皇風이 미치기를 고대한다 합니다. …… 請하건대, 南寧을 略定하고자 합니다. 盧州·戎州로부터 군량을 공급하게 하고, 이곳을 지나면 바로 蠻夷에게 징세하여 兵馬를 공급하게 할 것입니다. 저 寧州와 朱提·雲南·西爨에는 모두 總管과 州·鎭을 설치할 것입니다. 저들 熟蠻의 租와 調를 헤아리면, 城防과 倉儲에 이바지하는 데 족합니다. …….”(『隋書』: 1126~1127). 찬찬과 찬진 부자의 할거는 西爨國의 성립을 의미하였다(鄭勉, 2009: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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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韋世沖: 세충은 字이고, 본명은 沖이다.『隋書』「韋世康傳」에 附하여 입전되어 있다. 韋世康은 위충의 부친으로 京兆 杜陵 사람이었다. 위충의 열전을 참조하여 본문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隋文帝는 본문이 시기보다 앞서 王長述을 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남녕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장술은 南寧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였다(『隋書』卷54: 1361~1362). 이 정벌을 끝까지 수행한 인물이 바로 韋沖이었다. 南寧州總管에 임명된 위충은 ‘持節撫慰’의 임무를 가지고 익주에 寄置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隋文帝의 요청에 의하여 행군총관 왕장술의 남녕 진격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력시위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별다른 전투 없이 爨震과 爨翫을 비롯한 西爨 首領들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韋沖傳에서는 찬진 및 西爨 수령들이 “詣府參謁”하였다고 했다. 본문에서 開皇初에 저들이 ‘遣使朝貢’하고, 남영주총관 위충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수하여 恭州·協州·昆州의 세 주를 설치했다고 한 것은 이의 후속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韋沖의 南寧 경략과 西爨의 “詣府參謁”로 시작된 隋王朝의 南中 경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시 南寧州에서 이른바 ‘邊人’이 실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韋沖의 兄子로 그 숙부를 수행 중이던 伯仁이 남의 처를 빼앗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그 사졸들 또한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隋文帝는 대노하였고, 이 사건을 당시 益州總管이자 西南道行臺 尙書令이었던 蜀王 秀에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 성정이 方正하였던 益州總管府 長史 元巖은 위충의 案을 조금의 너그러움도 없이 처리하였고, 위충은 끝내 그 일에 연좌되어 免官되었다(『隋書』卷47: 1270). 이 일이 정확히 언제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늦어도 開皇 12年(592) 이전에 완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개황 12년 蜀王 秀가 內史令·右領軍大將軍이 되어 잠시 還朝하였고, 위충의 사건을 담당하였던 元巖은 개황 13년 순직하였기 때문이다(『隋書』卷62: 1476). 위충이 면관된 이후 南寧州總管府가 어떻게 경영되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며, 사서의 기록은 개황 17년(597) 사만세의 ‘남중’ 정벌로 이어졌다. 그리고『新唐書』「地理志」는 恭州·協州·昆州가 隋代에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韋世沖이 南中에 둔수한 정확한 시점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韋世沖傳」이나 「王長述傳」의 기사들을 보건대 陳을 평정하는 開皇 9년(589)으로부터 1~3년 전의 일로 보인다. 楊武通 열전의 기록으로 보건대, 위세충의 屯戍 이후 사만세의 정벌까지 약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南寧州에 대한 隋王朝의 통제는 매우 불안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鄭勉, 2009: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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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恭州: 北周 保定 2年(562)에 南寧州를 쪼개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朱提縣에 두어졌는데, 주제현은 오늘날 雲南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지금의 滇東北 지역 대부분에 상당하였다. 隋 大業 연간 初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다. 치소는 安上縣에 두어졌는데, 오늘날 雲南省의 昭通市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昭通市와 魯甸縣에 상당하였다. 7年(624)에는 치소를 朱提縣에 두었다. 8年(625)에는 이름을 曲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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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協州: 隋 開皇 4年(584)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東安縣에 두어졌는데, 곧 雲南省 彝良縣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雲南省 彝良과 大關 두 縣에 상당하였다. 大業 연간 초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관할구역은 彝良縣과 大關縣 東部에 상당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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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昆州: 隋 開皇 4年(584)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益寧縣에 두어졌다. 익녕현은 오늘날 雲南省 昆明市 西쪽 교외의 馬街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滇池 주위의 西 北 東 3面에 상당한다. 唐 玄宗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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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이때 반란의 주체는 爨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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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史萬歲(549~600): 京兆 杜陵 사람이었다. 두릉현은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東南部에 상당한다. 隋朝의 名將이다. 史萬歲의 父親은 史靜으로, 北周에서 滄州刺史를 지냈다. 史萬歲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騎射에 능하였고, 날래기가 나는 듯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兵書 읽기를 좋아하였다. 北周 保定 4年(564)에 洛陽城 北쪽의 北邙山에서 北周와 北齊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15歲의 史萬歲가 부친을 따라 從軍하였는데, 그가 戰場의 形勢를 관찰한 뒤, 周軍이 패할 것을 예상하고 좌우를 정리하여 현장을 떠나 조금 퇴각하였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과연 周軍이 大敗하였다. 이에 그 부친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北周 建德 6年(577), 周武帝 宇文邕이 군대를 이끌고 북제 평정에 나섰는데, 이때 사만세의 부친 史靜이 戰死하였다. 史萬歲는 忠臣의 子로서 開府儀同三司에 배수되었으며, 襲爵하여 太平縣公이 되었다. 본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南寧州의 昆州刺史 爨翫이 반란을 일으키자, 隋 開皇 17年(597) 2月에 隋文帝는 史萬歲를 行軍總管으로 삼아 爨翫을 치게 하였다. 사만세는 찬완을 사로잡았으나, 뇌물을 받고 찬완을 놓아 둔 채 귀환하였다. 史萬歲는 南方의 각 部落을 평정한 공으로 上柱國으로 승진하였고, 晉王 楊廣(수 양제)과의 친분으로 인해 督晉王府軍事의 직임을 겸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爨翫이 다시 이반하였고, 蜀王 楊秀가 史萬歲의 受賄건을 다시 들추어내어 탄핵하였다. 이 일로 사만세는 삭탈관직되어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1年 뒤 官爵을 회복하여, 河州(甘肅省 臨夏 東北)刺史에 제수되어, 行軍總管을 겸령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돌궐의 침입을 격퇴한 공을 세워 경사로 돌아갔으나, 尙書右僕射 楊素의 참소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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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西洱河: 지금 雲南省 大理白族自治州의 洱海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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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滇池: 현재 雲南省 昆明市의 滇池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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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隋書』「史萬歲傳」에서는 이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南寧夷 爨翫이 來降하여 昆州刺史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離叛하였다. 마침내 史萬歲를 行軍總管으로 삼아 무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蜻蛉川으로부터 들어가 弄凍을 거쳐서, 차례로 小勃弄·大勃弄을 거친 뒤에 南中에 이르렀다. 賊이 앞뒤 요해지에 屯據하였으나, 萬歲가 모두 쳐서 깨뜨렸다. 數百里를 행군하자, ‘諸葛亮紀功碑’가 나타났는데,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萬歲 後에 나보다 뛰어난 자가 이곳을 지날 것이다.” 萬歲가 左右로 하여금 그 碑를 거꾸러뜨리고 (계속) 나아가게 하였다. 西二河를 건너 渠濫川으로 들어가 千餘里를 행군하며, 그 三十餘部를 격파하였으며, 虜獲한 男女가 二萬餘口나 되었다. 諸夷가 크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降服을 청하며, 지름이 1寸이나 되는 明珠를 바쳤다. 이에 돌에 새겨 隋의 德을 頌美하였다. 萬歲가 遣使馳奏하여 翫을 데리고 入朝할 것을 청하니, 詔를 내려 허락하였다. 爨翫이 몰래 두 마음을 품고 궐에 가지 않으려고 만세에게 뇌물로 金寶를 주니, 萬歲가 이에 찬완을 버려두고 귀환하였다. 蜀王이 당시 益州에 있었는데, 그 受賂 사실을 인지하고 사자를 보내 수색하고자 하였다. 萬歲가 소식을 듣고 얻은 金寶를 모두 강에 던져버려서, 수색해도 얻은 것이 없었다. 사만세는 (남중 정벌의) 공으로 位가 柱國에 올랐다. …… 다음 해 爨翫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蜀王 秀가 상주하여 萬歲가 受賂하고 적을 놓아주어 邊患이 발생하는 데 이르렀으니, 大臣의 節度가 없다 하였다. 上이 그 일을 끝까지 조사하도록 하였더니, 모두 사실로 드러났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上이 질책하여 말했다. “金品을 받고 적을 놓아주는 것은 士馬를 거듭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朕은 將士들의 暴露를 생각하면, 누워도 편히 쉴 수 없고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卿을 어찌 社稷의 臣이라 하겠는가?” 萬歲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臣이 爨翫을 남겨 둔 것은 그 州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남겨서 鎭撫하도록 한 것입니다. 臣이 돌아오는 도중 瀘水에 이르렀을 때 詔書가 막 당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데리고 입조하지 못한 것이지, 진실로 受賂하지 않았습니다.” 上이 萬歲의 마음에 속이고 숨기는 바가 있다고 여기고 大怒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朕은 卿을 好人으로 여겼다. 어찌 높은 관직에 무거운 祿을 주었는데도 도리어 國賊이 되었는가?” 有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일 斬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萬歲는 두려워 죄를 자복하고, 머리를 조아려 목숨을 구걸하였다. …… 上의 意가 조금 풀려서, 이에 除名하여 民으로 삼았다. 한 해 남짓 후에 官爵을 회복하였다. ……”(『隋書』卷53: 1354~1354; 鄭勉, 2009: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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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爨震과 爨翫: 爨震은 爨瓚의 맏아들로 찬찬의 남영주자사직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고, 찬완은 찬찬의 아들로서 현재의 昆明市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가, 韋世沖의 초무 이후 隋朝로부터 昆州刺史職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서에서는 이를 ‘分統’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찬진과 찬완이 함께 입조한 것으로 적고 있지만, 찬완도 찬진과 함께 죽임을 당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찬진은 찬완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위세충의 초무 이후 西爨國 내부의 주도권은 찬완 쪽으로 옮겨갔던 것으로 보인다(鄭勉,『歷史學報』, 2009: 19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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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段綸: 北海 期原(지금의 山東省 靑州市) 사람이다. 段文振의 아들로서 李淵의 사위가 되었으며, 高密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관직이 蜀郡太守·劍南道招慰大使에 이르렀으며, 南寧의 西爨蠻을 초유한 뒤에 晉昌郡王에 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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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南寧: 南寧州를 지칭하며, 특히 爨震의 割據 이후, 西魏로부터 南寧州刺史직을 요수 받은 뒤, 그 지역에 대한 범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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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共範川: 方國瑜는 共範川은 곧 曲軛川이며 지금의 馬龍縣이라고 하였는데,(方國瑜, 1987: 353) 이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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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靑蛉: 雲南省 大姚縣에 해당한다. 前漢 元鼎 6年(前111)에 縣이 설치되었으며, 越嶲郡에 속하였다.『水經注』〈若水〉조에 따르면, 靑蛉水는 “靑蛉縣 西쪽에서 나와, 東쪽으로 其 縣 아래를 지나는데, 縣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水經注疏』, 1989: 2950~2951). 三國 蜀 建興 3年(225)에는 雲南郡에 속하였다. 東晉 成帝 時에는 興寧郡에 속하였다. 南齊 시에는 興寧郡의 치소가 되었다. 隋代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4年(621)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西濮州에 속하였다가, 貞觀 11年(637)에 髳州에 속하였다. 天寶 연간 이후 南詔에 속하였다. 鹽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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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弄棟: 梇棟縣이라 적기도 한다. 前漢 元封 2年(前109)에 설치되었으며, 益州郡에 속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雲南省 姚安縣 西北 8.5km 위치의 舊城에 해당한다. 三國 蜀 建興 3年(225)에 雲南郡의 치소가 되었다. 西晉대에도 雲南郡에 속하였다. 東晉 成帝 時에는 興寧郡의 치소가 되었다. 南齊 시기에는 興寧郡에 속하였다. 梁朝 末에 폐지되었다. 南詔 시기에는 雲南節度에 속하였다. 南詔 後期에 弄棟節度의 주둔지가 되었다. 大理 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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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제(元帝), 서문성(徐文盛), 찬찬(爨瓚), 찬찬, 진(震), 완(翫), 수 문제, 위세충(韋世沖), 사만세(史萬歲), 찬진, 찬완, 문제(文帝), 고조(高祖), 찬완, 홍달(弘達), 단륜(段綸), 유대시(兪大施), 유대시, 태종(太宗)
지명
곡주(曲州), 정주(靖州), 곤천(昆川), 곡액(曲軛), 진녕(晉寧), 유헌(喩獻), 용화성(龍和城), 미록(彌鹿), 승마(升麻), 보두(步頭), 진(晉), 양(梁), 형주(荊州), 공주(恭州), 협주(協州), 곤주(昆州), 서이하(西洱河), 전지(滇池), 남녕(南寧), 공범천(共範川), 청령(靑蛉), 농동(弄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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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爨蠻과 중국의 관계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