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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驃의 지리적 위치

  • 국가
    표(驃)
표(驃)는 옛날의 주파(朱波)이다. 스스로 돌라주(突羅朱)라고 불렀는데, 도파국(闍婆國)주 001
각주 001)
闍婆國: 앞서 訶陵國 조에서 訶陵은 闍婆라고도 한다 하였다. 흔히 인도네시아의 Java섬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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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도리졸(徒里拙)이라고 부른다. 영창(永昌) 주 002
각주 002)
永昌: 後漢代에 永昌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後漢 永平 12年(69) 哀牢夷의 內屬으로 그 땅과 益州郡 西部의 6縣을 합하여 설치하였다. 治所는 籬唐縣(雲南省 雲龍縣 西南 35km의 漕澗鎭)에 두어졌다. 대체로 지금의 滇西와 滇南의 상당히 넓은 지역이 관할구역으로 설정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 경계의 巴特開山, 東南쪽으로는 哀牢山, 남쪽으로는 십송판나(西雙版納) 등의 지역을 포함하였다. 建初 元年(76) 이후 치소를 不韋縣(雲南省 保山市 東北쪽 11km의 金雞村)으로 옮겼다. 蜀漢 시기에는 庲降都督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建興 3年(225) 이후 관할구역의 동부는 洱海地區를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西晉 泰始 7年(271)에 寧州에 속하였다. 元康 9年(299)에는 치소를 永壽縣(雲南省 耿馬傣族佤族自治縣)으로 옮겼다. 南齊시기에는 治所를 永安縣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梁末에 廢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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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2천 리에 있는데, 경사로부터의 거리는 1만 4천 리이다. 동쪽은 육진랍(陸眞臘)이고 서쪽은 동천축(東天竺) 주 003
각주 003)
東天竺: 지금의 인도 아삼(Assam)주 지역에 해당한다. 카마루파(Kamarupa)로 알려진 고대의 아삼(Assam) 지역은 강력한 왕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바르마나스(Varmanas, 350~650), 살스탐바스(Salstambhas; Xalostombho, 655~900) 그리고 카마루파-팔라스(Kamarupa-Palas, 900~1100)가 그들이다. 바르만(Varman)의 왕 바스카라바르만(Bhaskaravarman, 600~650)의 통치 시기에 중국의 구법승 玄奘法師가 이 지역을 방문하여, 그 여행기를 남겼다. 카마루파-팔라스의 약화와 분열 이후 카마루파의 전통은 루나(Lunar) 왕조에 의해서 다소나마 1255년 무렵까지는 이어졌다. 13세기에 雲南으로부터 이주한 타이족이 아홈왕조(Ahom, 1228~1826)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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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붙어있다. 서남쪽은 타화라(墮和羅)이고, 남쪽은 바다로 이어지며, 북쪽은 남조(南詔) 주 004
각주 004)
南詔: 기록상 7세기 정도에 중국과 교통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오며, 洱海地區에 분포하던 6詔의 하나로 최남단[巍山]에 위치한 관계로, 南詔라 칭하였으며, 본디의 이름은 蒙舍詔이다. 8세기에 들어서서, 唐朝의 후원을 입어 6詔와 이해지역을 통일하고, 급기야 西爨을 멸망시키고 雲南 지역을 장악하는 등,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당조와 토번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9세기 후반부터는 당나라와의 책봉조공관계를 청산하고, 稱帝하여 당과 적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내부 정변을 거쳐 大理王國으로 이어졌다.『新唐書』「南蠻傳」上·中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唐末 樊綽이 적은『蠻書』등의 자료도 남아 있다. 그리고 南詔의 族源에 관하여는 오래전부터 국제적 논쟁이 있어 왔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民國 시기부터 이 ‘南詔王國’과 그 族源 문제에 크게 집착하였는데, 그 이유는 19세기 말 이후 20세기 내내 서구 세계와 동남아시아에서 “大傣族說”·“南詔傣族王國說”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설을 가장 먼저 발표한 것은 영국인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E. H. Parker였다. 1893년 그의 논문이 발표된 뒤, 많은 학자들이 이를 답습하였다. 이 설의 요지는 ① 泰國의 주체 민족인 泰族, 미얀마 경내의 撣族, 중국 경내의 傣族은 본디 同族이다. ② 이 민족은 본래 중원 및 長江 유역에 거주하다가, 漢族의 압박을 받아 雲南으로 遷居하여 독립 왕국을 세웠는데, 그것이 南詔王國과 이를 이은 大理王國이다. ③ 13세기 몽고 쿠빌라이의 공격으로 大理國이 멸망하자, 이들은 다시 滇(운남)·緬(미얀마)·泰(태국)의 緣邊 지구로 이동하고, 또 대량으로 暹羅로 이동하여 暹羅國을 이루는 주체 민족이 되었다. 이 설은 별다른 검증 없이 1960·1970년대까지도 많은 태국인들 그리고 서구 세계와 동남아시아 역사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泰國에서는 13세기 이전의 泰國史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논설로서 확신되었다. 물론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해 분주하던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南詔傣族王國說”에 반박하는 연구들을 줄기차게 내어 놓았다. 그 결과 南詔 왕실은 傣族이 아니라 白族이나 彝族의 先民이었으며, 또 南詔 국가는 白族과 彝族의 선민이 연합하여 세운 국가라는 설이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3세기에 傣族의 대거 南遷 또한 존재하지 않았음을 논증함으로써 “大傣族說·南詔傣族王國說”의 가장 중요한 논리적 고리 중 하나를 끊어버렸다. 이러한 중국 학계의 연구 성과와 그 주장은 1980년대를 고비로 세계의 다른 나라 학계에서도 수용되기 시작하였다(鄭勉,『中國高中世史硏究』, 2010: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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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땅의 길이는 3천 리, 넓이는 5천 리인데, 동북쪽이 세로로 길고, 양저미성(羊苴咩城) 주 005
각주 005)
羊苴咩城: 南詔國의 수도로 현재의 大理 洱海의 서남쪽에 있었으며, 雲南 大理市 西北의 舊 大理에 해당한다. 陽苴咩城이라 하기도하며, 簡稱으로 苴咩城이라고도 한다. 779年에 南詔의 왕 異牟尋이 이곳에 성을 쌓고 천도 하였다. 이 뒤로 南詔國과 大理國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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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어진다.

  • 각주 001)
    闍婆國: 앞서 訶陵國 조에서 訶陵은 闍婆라고도 한다 하였다. 흔히 인도네시아의 Java섬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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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永昌: 後漢代에 永昌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後漢 永平 12年(69) 哀牢夷의 內屬으로 그 땅과 益州郡 西部의 6縣을 합하여 설치하였다. 治所는 籬唐縣(雲南省 雲龍縣 西南 35km의 漕澗鎭)에 두어졌다. 대체로 지금의 滇西와 滇南의 상당히 넓은 지역이 관할구역으로 설정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 경계의 巴特開山, 東南쪽으로는 哀牢山, 남쪽으로는 십송판나(西雙版納) 등의 지역을 포함하였다. 建初 元年(76) 이후 치소를 不韋縣(雲南省 保山市 東北쪽 11km의 金雞村)으로 옮겼다. 蜀漢 시기에는 庲降都督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建興 3年(225) 이후 관할구역의 동부는 洱海地區를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西晉 泰始 7年(271)에 寧州에 속하였다. 元康 9年(299)에는 치소를 永壽縣(雲南省 耿馬傣族佤族自治縣)으로 옮겼다. 南齊시기에는 治所를 永安縣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梁末에 廢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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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東天竺: 지금의 인도 아삼(Assam)주 지역에 해당한다. 카마루파(Kamarupa)로 알려진 고대의 아삼(Assam) 지역은 강력한 왕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바르마나스(Varmanas, 350~650), 살스탐바스(Salstambhas; Xalostombho, 655~900) 그리고 카마루파-팔라스(Kamarupa-Palas, 900~1100)가 그들이다. 바르만(Varman)의 왕 바스카라바르만(Bhaskaravarman, 600~650)의 통치 시기에 중국의 구법승 玄奘法師가 이 지역을 방문하여, 그 여행기를 남겼다. 카마루파-팔라스의 약화와 분열 이후 카마루파의 전통은 루나(Lunar) 왕조에 의해서 다소나마 1255년 무렵까지는 이어졌다. 13세기에 雲南으로부터 이주한 타이족이 아홈왕조(Ahom, 1228~1826)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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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南詔: 기록상 7세기 정도에 중국과 교통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오며, 洱海地區에 분포하던 6詔의 하나로 최남단[巍山]에 위치한 관계로, 南詔라 칭하였으며, 본디의 이름은 蒙舍詔이다. 8세기에 들어서서, 唐朝의 후원을 입어 6詔와 이해지역을 통일하고, 급기야 西爨을 멸망시키고 雲南 지역을 장악하는 등,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당조와 토번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9세기 후반부터는 당나라와의 책봉조공관계를 청산하고, 稱帝하여 당과 적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내부 정변을 거쳐 大理王國으로 이어졌다.『新唐書』「南蠻傳」上·中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唐末 樊綽이 적은『蠻書』등의 자료도 남아 있다. 그리고 南詔의 族源에 관하여는 오래전부터 국제적 논쟁이 있어 왔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民國 시기부터 이 ‘南詔王國’과 그 族源 문제에 크게 집착하였는데, 그 이유는 19세기 말 이후 20세기 내내 서구 세계와 동남아시아에서 “大傣族說”·“南詔傣族王國說”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설을 가장 먼저 발표한 것은 영국인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E. H. Parker였다. 1893년 그의 논문이 발표된 뒤, 많은 학자들이 이를 답습하였다. 이 설의 요지는 ① 泰國의 주체 민족인 泰族, 미얀마 경내의 撣族, 중국 경내의 傣族은 본디 同族이다. ② 이 민족은 본래 중원 및 長江 유역에 거주하다가, 漢族의 압박을 받아 雲南으로 遷居하여 독립 왕국을 세웠는데, 그것이 南詔王國과 이를 이은 大理王國이다. ③ 13세기 몽고 쿠빌라이의 공격으로 大理國이 멸망하자, 이들은 다시 滇(운남)·緬(미얀마)·泰(태국)의 緣邊 지구로 이동하고, 또 대량으로 暹羅로 이동하여 暹羅國을 이루는 주체 민족이 되었다. 이 설은 별다른 검증 없이 1960·1970년대까지도 많은 태국인들 그리고 서구 세계와 동남아시아 역사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泰國에서는 13세기 이전의 泰國史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논설로서 확신되었다. 물론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해 분주하던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南詔傣族王國說”에 반박하는 연구들을 줄기차게 내어 놓았다. 그 결과 南詔 왕실은 傣族이 아니라 白族이나 彝族의 先民이었으며, 또 南詔 국가는 白族과 彝族의 선민이 연합하여 세운 국가라는 설이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3세기에 傣族의 대거 南遷 또한 존재하지 않았음을 논증함으로써 “大傣族說·南詔傣族王國說”의 가장 중요한 논리적 고리 중 하나를 끊어버렸다. 이러한 중국 학계의 연구 성과와 그 주장은 1980년대를 고비로 세계의 다른 나라 학계에서도 수용되기 시작하였다(鄭勉,『中國高中世史硏究』, 2010: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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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羊苴咩城: 南詔國의 수도로 현재의 大理 洱海의 서남쪽에 있었으며, 雲南 大理市 西北의 舊 大理에 해당한다. 陽苴咩城이라 하기도하며, 簡稱으로 苴咩城이라고도 한다. 779年에 南詔의 왕 異牟尋이 이곳에 성을 쌓고 천도 하였다. 이 뒤로 南詔國과 大理國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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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표(驃), 주파(朱波), 돌라주(突羅朱), 도리졸(徒里拙), 영창(永昌), 육진랍(陸眞臘), 동천축(東天竺), 타화라(墮和羅), 남조(南詔), 양저미성(羊苴咩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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驃의 지리적 위치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