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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扶南의 토산물과 습속

  • 국가
    부남(扶南)
부남(扶南) 주 001
각주 001)
扶南國: 夫南이나 跋南이라 부르기도 하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힌두化된 古國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1세기경에 건국되었다. 유지는 현재의 캄보디아 내에 있으며, 그 강역은 대략 지금의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라오스 남부, 베트남 남부와 태국 동남부 일대이다. 힌두교를 받들어 國教로 삼았고, 印度文化의 영향이 매우 깊다. 扶南王國의 國都는 5세기에 毗耶陀补罗城(Vyadhapura,梵文:猎人城)에 있었는데, 현재의 巴南(Banam) 부근으로, 메콩강이 서북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크메르어 중에 扶南國王은 “산의 왕”(Kurung bnam; 山帝)라고 불리는데, Kurung(帝)과 bnam(山)의 합성어이다. 扶南은 크메르어 bnam(山)의 음차이며, 산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산은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신들이 사는 메루산(Mount Meru, 수미산)을 의미한다고 한다(양승윤 등, 1999: 129). 謝光에 따르면, 부남국은 서기 85년에 건립되어 서기 546년 즈음에 첸라에 병합되었다(謝光, 1997: 94). 건국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3세기 초에 扶南王 范蔓이 대외 확장을 시도하여, 세력이 말레이 반도에 이르렀다. 三國 시기에 부남국왕 范旃이 사자를 보내 吳에 이르렀으며, 오 또한 康泰와 朱應을 파견하여 부남에 사자로 보냈다. 이 후에 양국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7세기 중엽에 북방의 속국이었던 眞臘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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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남(日南)주 002
각주 002)
日南郡: 녓남이라고 한다(유인선, 2002: 41).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치소는 西捲縣에 있었으며, 서권현은 현재 베트남 중부의 꽝찌(廣治; Quang Tri) 서북 쪽의 광찌하(廣治河; Quang Tri River)와 깜로하(甘露河; Cam Lo River)가 만나는 지점이다(현재의 다낭Danang 부근이라는 설도 있다).『水經』「溫水注」에서는 “區粟建八尺表, 日影度南八寸, 自此影以南在日之南, 故以郡名”(『水經注疏』, 1989: 2997)이라 하여 그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일남군의 관할구역은 지금의 베트남 중부로 북쪽은 橫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大嶺에 이르는 지역이다. 후한대에는 교주에 속하였다. 三國 吳 赤烏 11년(248)에 朱吾縣(현재 베트남 平治天Thua Thien省 美麗 부근)으로 치소를 옮겼다. 西晉 太康 초에 치소를 盧容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廣田縣 동쪽 東香江과 蒲江의 합류처)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西捲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東晉 永和 연간에 치소를 比景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宋河 하류의 高牢下村)으로 옮겼다. 劉宋 시기에는 서권현에 치소를 두었으며, 南齊 시에는 郡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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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남쪽 7천 리에 있는데, 땅이 낮고 우묵하다. 환왕(環王)과 풍속(風俗)이 같고,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이 있다. 왕의 성(姓)은 고룡(古龍)이다. [왕은] 여러 층으로 된 누각에 살며, [주위는] 목책(木柵)을 둘러 성(城)을 만들었는데, 석류 잎으로 지붕을 덮는다. 왕이 나갈 때는 코끼리를 탄다. 그 인민은 검은 몸에 곱슬머리로주 003
각주 003)
醜黑拳髮: 같은 내용에 대하여『晉書』에서는 ‘人皆醜黑拳髮’이라 하였고(『晉書』卷97 「扶南國」, 2547),『梁書』에서도 ‘今其國人皆醜黑, 拳髮’이라고 하였다(『梁書』卷54 「扶南國」, 790). 부남인들의 생김새에 관한 묘사이지만, 이 생김새에 관한 묘사는 부남의 族源에 관한 논쟁에서 말레이족설의 주요 논거로 사용되었다. 부남의 족원에 관하여는 대체로 세 가지 학설이 제출되어 있다. 하나는 현재의 캄보이아인 첸라인과 같은 크메르족이라는 설과, 몬 크메르족의 支族인 Lawa(拉佤)족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레이족설이다. 黎道綱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醜黑拳髮’이라는 부남인에 대한 묘사는 바로 689년 唐代의 승려 義淨이 작성한『南海寄歸內法傳』卷1 「南海諸州」에 기재된 ‘곤륜인’에 대한 묘사인 ‘頭捲體黑’이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무수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巴人의 논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巴人은 昆侖國 즉 掘倫國을 현대 인도네시아 말루카(Maluku; Moluccas) 제도 세람(Ceram)섬 남쪽의 작은 섬 고롱(Gorong)으로 비정하였다. 그 근거로 든 것은 남해 각국의 약물에 관한 義靜의 언급이었다. 義靜은 “세 종류의 육두구(豆蔻)는 모두 杜和羅에 있고, 두 색의 丁香은 모두 掘侖國에서 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말대로 말루카 군도에서는 정향이 많이 나고, 이 지역의 원시 말레이 인들은 ‘頭捲體黑’의 현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도강은 이에 더하여 말레이 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는 “적토국이 부남의 별종”이라는『宋書』의 기사와 언어적 대비 등을 근거로 부남 말레이 족원설을 지지하였다(黎道綱, 2007-5: 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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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로 다니는데, 풍속이 본디 노략질이나 도적질을 하지 않는다. 밭농사를 하는데, 한해 심으면 3년 동안 거둔다. 이 나라에는 강금(剛金)이 나는데, 모양이 자수정[紫石英]과 비슷하다. 물밑 바위에 붙어 자라므로, 사람들이 잠수하여 채취한다. [강금으로는] 옥(玉)에 [글이나 무늬를] 새길 수 있다. [물속에서 채취할 때] 거세한 양의 뿔을 끼워 당기면 [바위로부터] 떨어진다. 사람들은 투계(鬪鷄) 및 돼지 싸움을 즐긴다. 금·진주·향(香)을 세금으로 낸다. 특목성(特牧城) 주 004
각주 004)
特牧城: 이시자와 요시아키(石澤良昭)는 특목성은 곧 메콩강 하류의 비아댜푸라(Vyadhapura)라고 하였다(石澤良昭, 1998: 102). 비아댜푸라는 현재 캄보디아 남부의 Prey Veng州 Banam 근처로 ‘사냥자의 도시(City of the Hunter)라는 뜻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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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都邑)을 두었는데, 얼마 뒤에 진랍(眞臘)에게 [그 땅이] 병합되자, 더욱 남하하여 나불라(那弗那) 성(城) 주 005
각주 005)
那弗那: 현재 베트남의 안 끼앙(An Giang) 省 또아이 썬(Thoại Sơn)의 옥 에오(Oc Eo)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Coedès, 1968: p.36). 이시이 요네오는 옥 에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극동학원은 메콩강의 서쪽 지류 바사크 천의 서쪽 저습지에 있는 옥 에오를 발굴하였다. 옥 에오는 크메르어로 ‘寶石의 하천’이라는 뜻을 가졌다. 옥 에오에는 바티산이라는 하얀 바위산이 있고, 그 산록에는 사원 건축 단지가 있다. 암산의 서쪽 저습지 속에서 4重의 盛土와 5重의 요철 모양의 함몰지를 지닌 길이 3km 넓이 1.5km의 장방형 도시 유지가 발견되었다. 결과적으로 2~3세기로부터 6~7세기에 걸친 시기에 이 땅에는 東西 두 세계와 깊이 관계하는 항구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항공사진 분석에 따르면, 이 항구도시와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도시 유적지인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나 神殿 유적지인 프놈 다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운하가 연결되어 있었다. 옥 에오는 부남의 외항이었고, 앙코르 보레이는 부남의 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石井米雄, 1990: 79~80). 이 옥 에오 유지에서는 “後漢代의 거울, 佛像, 인도의 브라후미(Brahmi)계 문자가 있는 護符와 指輪, 힌두교의 神像, 2세기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帝나 안토니우스 피우스 帝의 금화를 개조한 메달 등 당시 중국과 인도 서아시아 나아가 로마를 연결하는 무역을 시사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石井米雄, 199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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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겼다. [당 고조] 무덕(武德) 연간(618~626)과 [당 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두 번 입조(入朝)하였으며, 또 백두인(白頭人)주 006
각주 006)
白頭人: 白頭國 사람이다.『通典』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扶南〉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貞觀 연간에 洛陽으로 白頭國 사람 두 명을 바쳤다. 그 國은 扶南의 서쪽 그리고 參半의 西南쪽에 있으며, 男女가 날 때부터 모두 흰 머리에 몸 또한 심하게 하얗다. 山洞 중에 거주하는데, 사면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參半國과 서로 접하여 있다.”(『通典』卷188: 5094). 이 백두국과 백두인을 현재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에 분포하여 거주하는 크무인(Khmus, 克木人)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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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바쳤다.
옥에오(Oceo)지도 연계

  • 각주 001)
    扶南國: 夫南이나 跋南이라 부르기도 하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힌두化된 古國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1세기경에 건국되었다. 유지는 현재의 캄보디아 내에 있으며, 그 강역은 대략 지금의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라오스 남부, 베트남 남부와 태국 동남부 일대이다. 힌두교를 받들어 國教로 삼았고, 印度文化의 영향이 매우 깊다. 扶南王國의 國都는 5세기에 毗耶陀补罗城(Vyadhapura,梵文:猎人城)에 있었는데, 현재의 巴南(Banam) 부근으로, 메콩강이 서북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크메르어 중에 扶南國王은 “산의 왕”(Kurung bnam; 山帝)라고 불리는데, Kurung(帝)과 bnam(山)의 합성어이다. 扶南은 크메르어 bnam(山)의 음차이며, 산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산은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신들이 사는 메루산(Mount Meru, 수미산)을 의미한다고 한다(양승윤 등, 1999: 129). 謝光에 따르면, 부남국은 서기 85년에 건립되어 서기 546년 즈음에 첸라에 병합되었다(謝光, 1997: 94). 건국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3세기 초에 扶南王 范蔓이 대외 확장을 시도하여, 세력이 말레이 반도에 이르렀다. 三國 시기에 부남국왕 范旃이 사자를 보내 吳에 이르렀으며, 오 또한 康泰와 朱應을 파견하여 부남에 사자로 보냈다. 이 후에 양국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7세기 중엽에 북방의 속국이었던 眞臘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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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日南郡: 녓남이라고 한다(유인선, 2002: 41).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치소는 西捲縣에 있었으며, 서권현은 현재 베트남 중부의 꽝찌(廣治; Quang Tri) 서북 쪽의 광찌하(廣治河; Quang Tri River)와 깜로하(甘露河; Cam Lo River)가 만나는 지점이다(현재의 다낭Danang 부근이라는 설도 있다).『水經』「溫水注」에서는 “區粟建八尺表, 日影度南八寸, 自此影以南在日之南, 故以郡名”(『水經注疏』, 1989: 2997)이라 하여 그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일남군의 관할구역은 지금의 베트남 중부로 북쪽은 橫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大嶺에 이르는 지역이다. 후한대에는 교주에 속하였다. 三國 吳 赤烏 11년(248)에 朱吾縣(현재 베트남 平治天Thua Thien省 美麗 부근)으로 치소를 옮겼다. 西晉 太康 초에 치소를 盧容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廣田縣 동쪽 東香江과 蒲江의 합류처)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西捲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東晉 永和 연간에 치소를 比景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宋河 하류의 高牢下村)으로 옮겼다. 劉宋 시기에는 서권현에 치소를 두었으며, 南齊 시에는 郡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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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醜黑拳髮: 같은 내용에 대하여『晉書』에서는 ‘人皆醜黑拳髮’이라 하였고(『晉書』卷97 「扶南國」, 2547),『梁書』에서도 ‘今其國人皆醜黑, 拳髮’이라고 하였다(『梁書』卷54 「扶南國」, 790). 부남인들의 생김새에 관한 묘사이지만, 이 생김새에 관한 묘사는 부남의 族源에 관한 논쟁에서 말레이족설의 주요 논거로 사용되었다. 부남의 족원에 관하여는 대체로 세 가지 학설이 제출되어 있다. 하나는 현재의 캄보이아인 첸라인과 같은 크메르족이라는 설과, 몬 크메르족의 支族인 Lawa(拉佤)족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레이족설이다. 黎道綱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醜黑拳髮’이라는 부남인에 대한 묘사는 바로 689년 唐代의 승려 義淨이 작성한『南海寄歸內法傳』卷1 「南海諸州」에 기재된 ‘곤륜인’에 대한 묘사인 ‘頭捲體黑’이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무수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巴人의 논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巴人은 昆侖國 즉 掘倫國을 현대 인도네시아 말루카(Maluku; Moluccas) 제도 세람(Ceram)섬 남쪽의 작은 섬 고롱(Gorong)으로 비정하였다. 그 근거로 든 것은 남해 각국의 약물에 관한 義靜의 언급이었다. 義靜은 “세 종류의 육두구(豆蔻)는 모두 杜和羅에 있고, 두 색의 丁香은 모두 掘侖國에서 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말대로 말루카 군도에서는 정향이 많이 나고, 이 지역의 원시 말레이 인들은 ‘頭捲體黑’의 현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도강은 이에 더하여 말레이 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는 “적토국이 부남의 별종”이라는『宋書』의 기사와 언어적 대비 등을 근거로 부남 말레이 족원설을 지지하였다(黎道綱, 2007-5: 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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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特牧城: 이시자와 요시아키(石澤良昭)는 특목성은 곧 메콩강 하류의 비아댜푸라(Vyadhapura)라고 하였다(石澤良昭, 1998: 102). 비아댜푸라는 현재 캄보디아 남부의 Prey Veng州 Banam 근처로 ‘사냥자의 도시(City of the Hunter)라는 뜻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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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那弗那: 현재 베트남의 안 끼앙(An Giang) 省 또아이 썬(Thoại Sơn)의 옥 에오(Oc Eo)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Coedès, 1968: p.36). 이시이 요네오는 옥 에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극동학원은 메콩강의 서쪽 지류 바사크 천의 서쪽 저습지에 있는 옥 에오를 발굴하였다. 옥 에오는 크메르어로 ‘寶石의 하천’이라는 뜻을 가졌다. 옥 에오에는 바티산이라는 하얀 바위산이 있고, 그 산록에는 사원 건축 단지가 있다. 암산의 서쪽 저습지 속에서 4重의 盛土와 5重의 요철 모양의 함몰지를 지닌 길이 3km 넓이 1.5km의 장방형 도시 유지가 발견되었다. 결과적으로 2~3세기로부터 6~7세기에 걸친 시기에 이 땅에는 東西 두 세계와 깊이 관계하는 항구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항공사진 분석에 따르면, 이 항구도시와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도시 유적지인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나 神殿 유적지인 프놈 다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운하가 연결되어 있었다. 옥 에오는 부남의 외항이었고, 앙코르 보레이는 부남의 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石井米雄, 1990: 79~80). 이 옥 에오 유지에서는 “後漢代의 거울, 佛像, 인도의 브라후미(Brahmi)계 문자가 있는 護符와 指輪, 힌두교의 神像, 2세기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帝나 안토니우스 피우스 帝의 금화를 개조한 메달 등 당시 중국과 인도 서아시아 나아가 로마를 연결하는 무역을 시사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石井米雄, 199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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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白頭人: 白頭國 사람이다.『通典』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扶南〉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貞觀 연간에 洛陽으로 白頭國 사람 두 명을 바쳤다. 그 國은 扶南의 서쪽 그리고 參半의 西南쪽에 있으며, 男女가 날 때부터 모두 흰 머리에 몸 또한 심하게 하얗다. 山洞 중에 거주하는데, 사면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參半國과 서로 접하여 있다.”(『通典』卷188: 5094). 이 백두국과 백두인을 현재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에 분포하여 거주하는 크무인(Khmus, 克木人)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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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당 고조, 당 태종
지명
부남(扶南), 환왕(環王), 특목성(特牧城), 진랍(眞臘), 나불라(那弗那)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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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南의 토산물과 습속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