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공격에 대한 成都의 수비
만은 본디 계책이 없어서, 기회를 틈타 진격하여 끝까지 가지 못하고, 다만 개미가 먹이를 모으고 파리가 먹이를 찾아 분주히 날아다니듯이, 작은 이익을 노략질하는데 익숙할 뿐이다. 따라서 도처에 군영을 남겨놓았다. 그런 까닭에 촉(蜀) 지역의 노약자들이 서로 잡아끌고 부축하며 모두 성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도는] 성곽 안의 거리와 거주지가 꽉 차서, 한 호(戶)가 차지하는 땅이 자리 하나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 비라도 내리면 키와 동이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비를 가렸다. 성 안의 우물이 고갈되자, 마하지(摩訶池)
주 001
각주 001)
의 물을 공동으로 마셨는데,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모래를 광주리에 담아 [여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어도 관을 갖추지 못하니, 구덩이를 파서 공동으로 묻었다. 전 노주자사(瀘州刺史) 양경복(楊慶復)은 노탐(盧耽)을 위하여 공격용 기구와 투석용 돌을 만들고 성의 병장기를 견고하게 설치하였으며, 여덟 명의 장수가 각각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참빗처럼 촘촘한 울타리주 002를 세우고, 밤에는 횃불을 늘어놓아 성을 비추니 수비를 위한 설비들이 웅장하고 새로웠다. 또 날랜 병사 3천을 가려서 돌장(突將)주 003이라 이름 붙이고, 장도(長刀)와 거과부(巨檛斧)를 사용하게 하였다. 좌우로 나누어 번갈아 쉬게 하면서 날마다 군대에 예속시키니, 병사들의 마음에 투지가 넘쳐흘렀다. 추룡은 쌍류(雙流)주 004로부터 천천히 행군하였는데, 속으로는 동성(董成)의 치욕을 갚고자 하여, 상개(上介)
주 005를 자신의 군영에 보내와 일을 의논했으면 한다라고 노탐을 속였다. [이에] 노탐이 절도부사(節度副使) 유반(柳槃)을 보내 두원충(杜元忠)과 만나 강화를 의논하게 하였다. 두원충이 망령되이 말하기를, “황제가 노탐을 만나고자 하니, 수레를 구비하되 보삽(葆翣)주 006摩訶池:『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서천의 백성들은 남조군이 장차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다투어 성도성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성도에는 내성만 있고 해자가 없어서 사람들이 점할 수 있는 토지는 자리 한 개 정도에 불과했고 비가 오면 키와 동이를 뒤집어써서 이를 가렸다. 또한 물이 부족하여 摩訶池에 있는 흙탕물을 가져다 이를 걸러 마셨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서 인용된『成都記』에 따르면 마하지는 성도의 내성인 張儀子城 안에 위치하는데 과거 隋의 蜀王 楊秀가 흙을 가져다 자성을 확장, 건축하면서 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胡僧이 이를 보고는 ‘摩訶宮毗羅’라고 하였다. 호승들에게 ‘摩訶’란 ‘크다’라는 뜻이고 ‘宮毗羅’는 용을 뜻하는데 이 못이 넓고 커서 용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같이 말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못의 이름을 ‘마하지’라고 했다 한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成都府조에 따르면 摩訶池는 州의 中城 안에 있다고 하였으니 역시 子城에 못이 있다고 한 호삼성의 주석과 부합한다. 張儀子城이라고 한 것은 戰國 秦 惠王때 張儀가 이곳에 처음 성을 쌓았고 이것이 그대로 이어졌으므로 張儀子城이라 한 것이다.
각주 006)
으로 덮개를 했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유반(柳槃)이 결정할 수 없어서 돌아왔다. 만이 3백 기에게 장막을 지워 보내 큰소리로 말하기를, “수(隋) 촉왕(蜀王)의 청사주 007葆翣:『後漢書』卷1下 「光武帝紀」下 建武 13年 夏 4月조에 ‘葆車’에 대한 唐 章懷太子의 주석에 따르면 葆車는 수레위에 羽葆를 꽂은 것으로 ‘葆’란 다섯 빛깔의 깃털을 모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색빛깔의 깃털로 덮개를 장식한 수레가 보거로 천자가 사용한다. 한편『周禮』卷27 ‘巾車’조에 따르면 王后의 수레로는 重翟, 厭翟, 安車, 翟車, 輦車가 있는데 연거에는 翣을 꽂고 깃털로 덮개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연거는 장식하지 않는 수레로 왕후가 궁중에 거주하면서 조용하게 타는 것이며 사람이 이것을 끌고, 翣을 꽂은 것은 먼지를 막기위함이라고 하였다. 즉 翣은 먼지를 가리기 위해 왕후의 수레에 설치하는 기물이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추룡이 葆翣으로 수레의 덮개를 해달라고 한 것은 결국 천자와 황후의 수레를 구비해 달라는 의미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이 이미 황제를 참칭하였으므로 이에 상응하는 수레를 타야한다고 한 것이다.
각주 007)
에 장막을 펼쳐, 표신의 행재소주 008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노탐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속히 가버렸다.“隋蜀王聽事”:『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庚午조에 따르면 ‘又遣人負綵幕至城南, 云欲張陳蜀王廳以居驃信’이라하여 ‘남조가 사람을 보내 綵幕을 지고 성의 남쪽에 와서 이를 촉왕의 청사에 펼쳐놓고 표신이 머물게 하겠다’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본문에서 말한 聽事는 촉왕이 행정사무를 보던 관청의 廳舍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촉왕 양수가 촉에 있을 때 청사를 지었는데 지극히 크고 웅장했다 한다. 수 촉왕은 楊秀로『隋書』卷45 「文四子傳」 ‘庶人秀’조에 따르면 그는 수 문제의 네 번째 아들이다. 開皇 원년(581) 촉왕에 봉해진 이래 仁壽 2년(602)까지 益州의 병마와 행정을 통솔했다. 그런데 당시 새로 황태자가 된 楊廣(훗날의 煬帝)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의 그의 모함으로 인수 2년, 봉작을 삭탈당하고 庶人이 되었다. 양제 즉위 이후로도 금고상태가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수말 宇文化及이 양제를 살해한 후 그를 황제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거부하여 마침내 자식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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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摩訶池:『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서천의 백성들은 남조군이 장차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다투어 성도성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성도에는 내성만 있고 해자가 없어서 사람들이 점할 수 있는 토지는 자리 한 개 정도에 불과했고 비가 오면 키와 동이를 뒤집어써서 이를 가렸다. 또한 물이 부족하여 摩訶池에 있는 흙탕물을 가져다 이를 걸러 마셨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서 인용된『成都記』에 따르면 마하지는 성도의 내성인 張儀子城 안에 위치하는데 과거 隋의 蜀王 楊秀가 흙을 가져다 자성을 확장, 건축하면서 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胡僧이 이를 보고는 ‘摩訶宮毗羅’라고 하였다. 호승들에게 ‘摩訶’란 ‘크다’라는 뜻이고 ‘宮毗羅’는 용을 뜻하는데 이 못이 넓고 커서 용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같이 말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못의 이름을 ‘마하지’라고 했다 한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成都府조에 따르면 摩訶池는 州의 中城 안에 있다고 하였으니 역시 子城에 못이 있다고 한 호삼성의 주석과 부합한다. 張儀子城이라고 한 것은 戰國 秦 惠王때 張儀가 이곳에 처음 성을 쌓았고 이것이 그대로 이어졌으므로 張儀子城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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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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葆翣:『後漢書』卷1下 「光武帝紀」下 建武 13年 夏 4月조에 ‘葆車’에 대한 唐 章懷太子의 주석에 따르면 葆車는 수레위에 羽葆를 꽂은 것으로 ‘葆’란 다섯 빛깔의 깃털을 모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색빛깔의 깃털로 덮개를 장식한 수레가 보거로 천자가 사용한다. 한편『周禮』卷27 ‘巾車’조에 따르면 王后의 수레로는 重翟, 厭翟, 安車, 翟車, 輦車가 있는데 연거에는 翣을 꽂고 깃털로 덮개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연거는 장식하지 않는 수레로 왕후가 궁중에 거주하면서 조용하게 타는 것이며 사람이 이것을 끌고, 翣을 꽂은 것은 먼지를 막기위함이라고 하였다. 즉 翣은 먼지를 가리기 위해 왕후의 수레에 설치하는 기물이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추룡이 葆翣으로 수레의 덮개를 해달라고 한 것은 결국 천자와 황후의 수레를 구비해 달라는 의미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이 이미 황제를 참칭하였으므로 이에 상응하는 수레를 타야한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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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隋蜀王聽事”:『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庚午조에 따르면 ‘又遣人負綵幕至城南, 云欲張陳蜀王廳以居驃信’이라하여 ‘남조가 사람을 보내 綵幕을 지고 성의 남쪽에 와서 이를 촉왕의 청사에 펼쳐놓고 표신이 머물게 하겠다’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본문에서 말한 聽事는 촉왕이 행정사무를 보던 관청의 廳舍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촉왕 양수가 촉에 있을 때 청사를 지었는데 지극히 크고 웅장했다 한다. 수 촉왕은 楊秀로『隋書』卷45 「文四子傳」 ‘庶人秀’조에 따르면 그는 수 문제의 네 번째 아들이다. 開皇 원년(581) 촉왕에 봉해진 이래 仁壽 2년(602)까지 益州의 병마와 행정을 통솔했다. 그런데 당시 새로 황태자가 된 楊廣(훗날의 煬帝)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의 그의 모함으로 인수 2년, 봉작을 삭탈당하고 庶人이 되었다. 양제 즉위 이후로도 금고상태가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수말 宇文化及이 양제를 살해한 후 그를 황제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거부하여 마침내 자식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양경복(楊慶復), 노탐(盧耽), 추룡, 동성(董成), 상개(上介), 노탐, 노탐, 유반(柳槃), 두원충(杜元忠), 두원충, 노탐, 유반(柳槃), 수(隋) 촉왕(蜀王), 노탐
- 지명
- 촉(蜀), 성도, 성도, 마하지(摩訶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