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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당이 李師望을 절도사로 삼고 定邊軍을 둠

  • 국가
    남조(南詔)
이듬해(함통 8년, 867) 추룡양추경(楊酋慶)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죄수를 풀어준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처음에 이사망(李師望)이 건의하기를 “성도(成都)에서 만에 관련된 일을 모두 처리하는데, [일이 많아] 여러 날을 소비하여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공(邛), 촉(蜀), 가(嘉), 미(眉), 여(黎), 아(雅), 수(雟) 7주를 떼어 내어 정변군(定邊軍)으로 삼고,주 001
각주 001)
『新唐書』卷67 「方鎭表」에 따르면 함통 8년(867) 置定邊軍節度, 觀察, 處置, 統押近界諸蠻并統領諸道行營兵馬制置等使를 설치하고 巂, 眉, 蜀, 邛, 雅, 嘉, 黎등의 7州를 통솔하며 邛州를 치소로 삼게 한 것으로 되어 있어 본문의 서술과 일치한다. 그런데『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鳳翔少尹 李師望이 雟州가 요충지이면서 成都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정변군을 설치하고 邛州를 치소로 삼자고 주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채택, 정변군을 설치하고 그를 정변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즉『통감』에서는 정변군의 설치가 함통 9년(868)의 일이고『新唐書』에서는 함통 8년의 일로 되어 있어 양자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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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를 세워 긴요한 일들을 처리하게 하면, [거리가] 가까워 [일의 처리도] 신속할 것입니다.” 천자가 그렇다고 말하고 즉시 조를 내려 사망(師望)을 절도사로 삼고 공주(邛州)에 치소를 두었다. 공주성도에서 겨우 5사(舍)의 거리주 002
각주 002)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공주와 성도의 거리는 160리라고 하였다.『左傳』卷16 僖公 28年조에서 ‘三舍를 물려서 [초군의] 피해에 보답한 것입니다(退三舍辟之, 所以報也)’라고 한 子犯의 말에 대해 晉 杜預는 ‘一舍는 三十里(一舍三十里)’라고 주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문에서 말한 5사는 150리가 되니『통감』에서 말한 160리와 대략 일치한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는 1사 30리의 수치를 기준으로 공주와 성도의 거리를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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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수주(雟州)는 최남단으로 공주에서 천리의 거리여서,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앞뒤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다.주 003
각주 003)
본문과『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정변군의 치소 공주와 수주의 거리는 1천 리이며 성도와 수주의 거리는 1천 1백 60리로 성도에 치소가 있든, 공주에 치소가 있든 절도사의 치소에서 수주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즉 성도, 공주 모두 수주와는 거리가 멀어 본주와 수주 사이에 신속한 의견 교환이나 지시전달은 불가능함을 앞뒤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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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망은 멋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이롭게 여겨 [이러한 문제를] 속이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모으고 쌓는데 한이 없었고, 사사로이 뇌물을 챙긴 것이 백만을 헤아렸다. 또 만의 노여움을 야기하여 공을 세우고자, 이에 양추경등을 죽였다. 이미 병사들이 분노하여 장차 사망을 소금에 절여 분을 풀려 하였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소환하여 두방(竇滂)으로 교체하였다.주 004
각주 004)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冬 10월조에 따르면 정변군절도사 이사망의 축재와 학정으로 군사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자 하였는데, 사망은 계책을 써서 이 위기를 모면하고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대신 당시 太府少卿인 두방으로 하여금 정변군절도사를 대신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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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방은 더욱 탐욕스럽고 더욱 법을 따르지 않아 잘못을 꾸짖고 벌주며 가혹하고 세세히 따지는 것이 사망보다도 심하였다. 당시는 아직 만역(蠻役)이 일어나지 않은 때인데도, 정변군은 이미 곤경에 처하였다.

  • 각주 001)
    『新唐書』卷67 「方鎭表」에 따르면 함통 8년(867) 置定邊軍節度, 觀察, 處置, 統押近界諸蠻并統領諸道行營兵馬制置等使를 설치하고 巂, 眉, 蜀, 邛, 雅, 嘉, 黎등의 7州를 통솔하며 邛州를 치소로 삼게 한 것으로 되어 있어 본문의 서술과 일치한다. 그런데『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鳳翔少尹 李師望이 雟州가 요충지이면서 成都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정변군을 설치하고 邛州를 치소로 삼자고 주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채택, 정변군을 설치하고 그를 정변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즉『통감』에서는 정변군의 설치가 함통 9년(868)의 일이고『新唐書』에서는 함통 8년의 일로 되어 있어 양자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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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공주와 성도의 거리는 160리라고 하였다.『左傳』卷16 僖公 28年조에서 ‘三舍를 물려서 [초군의] 피해에 보답한 것입니다(退三舍辟之, 所以報也)’라고 한 子犯의 말에 대해 晉 杜預는 ‘一舍는 三十里(一舍三十里)’라고 주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문에서 말한 5사는 150리가 되니『통감』에서 말한 160리와 대략 일치한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는 1사 30리의 수치를 기준으로 공주와 성도의 거리를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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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본문과『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정변군의 치소 공주와 수주의 거리는 1천 리이며 성도와 수주의 거리는 1천 1백 60리로 성도에 치소가 있든, 공주에 치소가 있든 절도사의 치소에서 수주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즉 성도, 공주 모두 수주와는 거리가 멀어 본주와 수주 사이에 신속한 의견 교환이나 지시전달은 불가능함을 앞뒤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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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冬 10월조에 따르면 정변군절도사 이사망의 축재와 학정으로 군사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자 하였는데, 사망은 계책을 써서 이 위기를 모면하고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대신 당시 太府少卿인 두방으로 하여금 정변군절도사를 대신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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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추룡, 양추경(楊酋慶), 이사망(李師望), 사망(師望), 양추경, 사망, 두방(竇滂), 두방, 사망
지명
성도(成都), 공(邛), 촉(蜀), 가(嘉), 미(眉), 여(黎), 아(雅), 수(雟), 공주(邛州), 공주, 성도, 수주(雟州), 공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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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李師望을 절도사로 삼고 定邊軍을 둠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