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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왕차전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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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이 당시에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주 001
각주 001)
西川節度使:『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에 따르면 成都府는 서천절도사의 치소이며 同書 卷33 「劒南道」下에 따르면 梓州는 東川節度使의 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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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영(杜元潁) 주 002
각주 002)
杜元潁(?~832):『舊唐書』卷164 「杜元潁傳」에 따르면 두원영은 당 태종대의 名臣 杜如晦의 후손으로 덕종 정원말에 진사에 급제하여 입사하여, 원화연간 左拾遺, 右輔闕, 翰林學士등을 거쳐 목종시에 同平章事가 되었다. 목종 長慶 3년(823) 平章事의 직함을 띠고 西川지역을 鎭守하게 되었다. 그는 촉지역의 진귀한 기물을 진상하는 일에만 열중하여, 결국 가혹한 수탈로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太和 3년(829) 南詔가 蜀지역을 침략하였는데, 그는 아무런 방비도 갖추지 않아 패배하여 循州司馬로 좌천되었고, 太和 6년(832)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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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변방의 성장(城障)과 초소가 기강이 이완되고 서로들 속임수를 썼으니,주 003
각주 003)
『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년조에 따르면 두원영은 목종조의 재상으로 文才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군대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졸들의 의복과 군량을 줄이는 바람에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남조의 경내로 들어가 약탈을 하여 자급하였다. 그런데 남조에서는 도리어 의복과 식량을 주어 그들을 도왔다고 하는데, 이때 南詔에서는 촉의 허실과 동정을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본문에서 기강이 헤이해지고 서로간에 속임수를 썼다는 것은 변경의 군졸들이 부족한 물자를 남조로부터 몰래 지원받고 군사상의 기밀을 그들에게 흘린 정황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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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대화(大和, 827~835, 唐 文宗) 3년(829)이다. 이에 차전이 무리를 모두 동원하여 공주(邛州) 주 004
각주 004)
邛州: 南朝 梁代 설치되었는데, 당시 치소는 지금의 四川 邛崍市 東南 55리에 있는 蒲口頓이었는데, 西魏시에 依政縣으로 개치되었다. 隋 大業 2年(606) 폐지되었다가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고, 顯慶 2年(657)에 지금의 邛崍市인 臨邛縣에 치소를 두었다. 天寶 元年(742)에 臨邛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邛州가 되었다. 지금의 四川 邛崍, 大邑, 蒲江 등의 시현지역을 통할하였다. 西川節度使의 관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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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주(戎州) 수주(雟州)를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성도의 경내주 005
각주 005)
『舊唐書』卷197 「南詔蠻傳」에 따르면 ‘逼成都府’라 하여 成都府에 남조의 군대가 근접한 것으로 되어 있고『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年(829) 11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군대가 邛州로부터 곧장 성도에 도착했고 경술 그 외성을 함락시켰는데 원영이 군사들을 모아 내성을 지켜 이에 저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成都府城 전체가 함락된 것은 아니고 그 일부인 외성만 함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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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들어가, 서쪽 외성(外城)에서 열흘간 머무르면서 주민들을 위로하니 시중이 혼란스럽지 않았다. 돌아가기 직전에야 자녀(子女)와 공인(工人) 기인(技人) 수만을 약탈하여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자살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구원병이 추격하자, 차전는 몸소 후미를 맡았다. 대도하(大度河) 주 006
각주 006)
大度河: 오늘날 四川 西部 雅礱江의 지류인 鮮水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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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중국인들에게 말하기를, “이 남쪽은 나의 경내이다.주 007
각주 007)
此吾南境: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 곳은 나의 남쪽 경계이다”가 된다. 그런데『資治通鑑』卷244에서는 ‘此南吾境’으로 되어 있고,『舊唐書』卷163 「杜元潁傳」에서도 ‘此南吾境’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 남쪽은 나의 경내이다”라고 할수 있다. 문맥에 따르면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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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을 건너면] 너희들은 본국을 떠나는 것이니, 마땅히 통곡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리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한탄하였으며, 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열에 셋은 되었다. 남조는 이때부터 무늬가 있는 직물을 만드는 솜씨가 좋아졌는데, [그 수준이] 중국과 비슷하였다. 다음해 표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주 008
각주 008)
『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 따르면 대화 4년(830) 정월 그 왕 嵯巓이 표문을 올려 사정을 진술하고 죄를 청했으며 이와 함께 두원영의 과실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年 11월조에 嵯巓이 사자를 보내 올린 표문이 실려 있는데, “蠻이 줄곧 조공의 직무를 이행하였는데 어째서 감히 변경을 침범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원영이 군사들을 구휼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원영을 원망하고 다투어 길잡이가 되었으며 저희들의 이번 원정을 통해 포악한 元帥를 주벌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주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촉지역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폐하께서는 바라옵건데 그를 벌주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미 邵州자사로 강등된 두원영을 循州司馬로 다시 강등시켰다. 이어서 신임 서천절도사 郭釗가 남조와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화약을 맺었으며 조정에서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내어 차전에게 국서를 하사였다. 한편 이에 대한 胡三省의 주석에 따르면 차전은 군주를 시해하고 다른 군주를 세웠기 때문에 남조의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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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사자가 와서 입조하였고, 개성(開成, 836~840, 文宗.) 회창(會昌, 841~846, 武宗) 연간에 두 번 와서 입조하였다.

  • 각주 001)
    西川節度使:『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에 따르면 成都府는 서천절도사의 치소이며 同書 卷33 「劒南道」下에 따르면 梓州는 東川節度使의 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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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杜元潁(?~832):『舊唐書』卷164 「杜元潁傳」에 따르면 두원영은 당 태종대의 名臣 杜如晦의 후손으로 덕종 정원말에 진사에 급제하여 입사하여, 원화연간 左拾遺, 右輔闕, 翰林學士등을 거쳐 목종시에 同平章事가 되었다. 목종 長慶 3년(823) 平章事의 직함을 띠고 西川지역을 鎭守하게 되었다. 그는 촉지역의 진귀한 기물을 진상하는 일에만 열중하여, 결국 가혹한 수탈로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太和 3년(829) 南詔가 蜀지역을 침략하였는데, 그는 아무런 방비도 갖추지 않아 패배하여 循州司馬로 좌천되었고, 太和 6년(832)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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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년조에 따르면 두원영은 목종조의 재상으로 文才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군대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졸들의 의복과 군량을 줄이는 바람에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남조의 경내로 들어가 약탈을 하여 자급하였다. 그런데 남조에서는 도리어 의복과 식량을 주어 그들을 도왔다고 하는데, 이때 南詔에서는 촉의 허실과 동정을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본문에서 기강이 헤이해지고 서로간에 속임수를 썼다는 것은 변경의 군졸들이 부족한 물자를 남조로부터 몰래 지원받고 군사상의 기밀을 그들에게 흘린 정황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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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邛州: 南朝 梁代 설치되었는데, 당시 치소는 지금의 四川 邛崍市 東南 55리에 있는 蒲口頓이었는데, 西魏시에 依政縣으로 개치되었다. 隋 大業 2年(606) 폐지되었다가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되고, 顯慶 2年(657)에 지금의 邛崍市인 臨邛縣에 치소를 두었다. 天寶 元年(742)에 臨邛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邛州가 되었다. 지금의 四川 邛崍, 大邑, 蒲江 등의 시현지역을 통할하였다. 西川節度使의 관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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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舊唐書』卷197 「南詔蠻傳」에 따르면 ‘逼成都府’라 하여 成都府에 남조의 군대가 근접한 것으로 되어 있고『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年(829) 11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군대가 邛州로부터 곧장 성도에 도착했고 경술 그 외성을 함락시켰는데 원영이 군사들을 모아 내성을 지켜 이에 저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成都府城 전체가 함락된 것은 아니고 그 일부인 외성만 함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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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大度河: 오늘날 四川 西部 雅礱江의 지류인 鮮水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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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此吾南境: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 곳은 나의 남쪽 경계이다”가 된다. 그런데『資治通鑑』卷244에서는 ‘此南吾境’으로 되어 있고,『舊唐書』卷163 「杜元潁傳」에서도 ‘此南吾境’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 남쪽은 나의 경내이다”라고 할수 있다. 문맥에 따르면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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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 따르면 대화 4년(830) 정월 그 왕 嵯巓이 표문을 올려 사정을 진술하고 죄를 청했으며 이와 함께 두원영의 과실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44 「唐紀」60 太和 3年 11월조에 嵯巓이 사자를 보내 올린 표문이 실려 있는데, “蠻이 줄곧 조공의 직무를 이행하였는데 어째서 감히 변경을 침범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원영이 군사들을 구휼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원영을 원망하고 다투어 길잡이가 되었으며 저희들의 이번 원정을 통해 포악한 元帥를 주벌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주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촉지역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폐하께서는 바라옵건데 그를 벌주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미 邵州자사로 강등된 두원영을 循州司馬로 다시 강등시켰다. 이어서 신임 서천절도사 郭釗가 남조와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화약을 맺었으며 조정에서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내어 차전에게 국서를 하사였다. 한편 이에 대한 胡三省의 주석에 따르면 차전은 군주를 시해하고 다른 군주를 세웠기 때문에 남조의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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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두원영(杜元潁), 차전, 차전
지명
공주(邛州), 융주(戎州), 수주(雟州), 성도, 대도하(大度河),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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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차전의 습격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