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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토번이 곤명, 신천, 납천에 둔영을 설치하여 수비함

  • 국가
    남조(南詔)
토번의 군장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수주를 얻지 못하면 걱정이 끊이지 않을 것인데, 항상 양두만(兩頭蠻)이 당(唐)을 끼고 거래하는 것을 당하게 된다고 하니, 남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즈음 토번은 흉년이 계속되었고, 마침 찬보가 죽어 장사지냈으며, 군역징발과 세금징수가 빈번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병사를 징발하였는데, 3호(戶)마다 졸(卒) 1인을 내게 하였다. [이는] 토번의 법에 대조집(大調集)이라 하는 것이다. 또 의 병사 3만이 남조에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가 납천(納川) 고홍(故洪) 낙제(諾濟) 납(臘) 율재(聿齎) 주 001
각주 001)
聿齎: 지금의 雲南 德欽縣 남쪽에 있는 城으로, 南詔에서 劍川節度使에 예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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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5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군대를 모두 서산(西山)검산(劍山) 주 002
각주 002)
劍山: 四川 茂縣 서북, 黑水縣 東南에 있는 劍山屯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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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출동시켜 수주를 빼앗아 남조와를 단절시키려 하였다. 위고가 즉시 상언하기를 “경우(京右)의 여러 둔(屯)은 마땅히 척후를 분명히 하고, 조속히 수확을 마치며, 빈농군(邠隴軍)주 003
각주 003)
邠隴軍: 吐蕃과 전쟁시 唐軍에는 邠隴兵 5천명으로 구원하려 온 曲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七盤城, 威武軍, 維州와 茂州 등에서 모집한 병사들이었다(『新唐書』卷147 「曲環傳」, “德宗初, 虜寇劍南, 詔環以邠·隴兵五千馳救, 收七盤城·威武軍·維茂等州”). 당시 邠은 邠州인데, 唐 永徽 2년(651에 설치한 羈縻州로서 四川 汶川縣 서남 邛崍山부근으로, 茂州都督府에 속하였다. 隴은 四川 梓潼縣 서북에 있는 十八隴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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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교외를 불사른다면 적이 침입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고는 장수 사비(邪毗)를 보내어 병사 1만으로 남북로에 주둔하게 하고, 조욱(趙昱)에게는 군사 1만을 주어 여주(黎州)아주(雅州)를 지키게 하였다. 이모심위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이 수주를 취하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운남을 엿보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무면(武免)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양저미(羊苴咩)로 나아가게 하십시오. 만약 적이 나오지 않으면 내년 2월에 깊이 쳐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토번이 군사 3만으로 염주(鹽州) 주 004
각주 004)
鹽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鹽州조에 따르면 염주는 靈武節度使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다. 西魏 廢帝 3년(554)에 西安州를 개칭한 것인데, 治所는 五原縣에 있었다. 현재 陝西省 定邊縣으로, 鹽池가 있어 붙여진 지명인데, 지명이 몇 차례 변동되다가, 乾元 元年(758) 鹽州가 되었는데, 建中이후에 吐蕃에게 빼앗겼다가 建元에 수복하였다. 후에는 西夏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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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하였다. 황제는 적이 속임수가 많다고 여기고, 이어서 대군을 보낼 것이라 의심하였다. 그래서 위고에게 조를 내리기를, 적의 변방 깊숙이 노략질하여 적의 세력을 나누라고 하였다. 위고가 상표하기를, “적의 정예 병력은 대부분 남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금 염주하주(夏州) 주 005
각주 005)
夏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夏州조에 따르면 하주는 夏州綏銀節度使의 치소로 속현은 4현이다. 北魏 太和 11년(487)에 統萬鎭을 승급하여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化政郡 岩綠縣으로 唐代 朔方으로 개명하였는데, 현재 陝西 靖邊縣 북쪽의 白城子이다. 隋 大業 3년(607)에 朔方郡이 되었다가 貞觀 2년(628)에 夏州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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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으로 향하고 있는 적병은 전군이 아닙니다. 하곡(河曲) 주 006
각주 006)
河曲은 黃河가 굽어지는 곳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위에서 말하는 河曲은 黨項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鹽州와 夏州 일대 즉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州일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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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당항(党項)의 가축을 노략질하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인주(麟州) 주 007
각주 007)
麟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麟州조에 따르면 인주는 振武節度使 소속의 주로 속현은 3현이다. 唐 貞觀 8년(634) 西麟州를 개편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四川 若爾蓋縣 동쪽지역이다. 羈縻州로서 松州都督府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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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깨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고는 제 장수를 재촉하여 길을 나누어 출동하도록 하였다. 혹자는 서산으로부터, 혹자는 평이(平夷)를 경유하여, 혹자는 농타화(隴陀和)석문(石門)을 지나고, 혹자는 신천(神川) 납천(納川)을 가로질러서 남조와 만났다. 이 때 회골(回鶻) 태원(太原) 분녕(邠寧) 경원(涇原)의 군대는 토번의 북쪽을 공격하고, 검남(黔南)동천(東川)산남(山南)의 군대는 그 동쪽지역을 공격하고, 봉상(鳳翔)의 군대는 그 서쪽을 공격하였다. 남조는 깊이 침투하여 성을 함락시킨 것이 일곱이요, 보(堡)를 불태운 것이 150개소이며, 참수한 것이 만 급이고, 노획한 갑옷과 무기가 15만이었다. 곤명유주(維州) 주 008
각주 008)
維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維州조에 따르면 유주는 원래 劒南西川節度使 소속으로, 唐 武德 7년(624)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四川 理縣 동북 薄城鎭 서남이다. 羈縻州로서 茂州에 속하였는데, 여러차례 지명이 바뀌다가 乾元 元年(758) 維州로 복귀하였다. 四川 理縣의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廣德 元年(763)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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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여 회군하였다. 진무(振武) 영무(靈武)의 군대는 적 2만을 깨뜨렸고, 경원봉상의 군대는 원주(原州) 주 009
각주 009)
原州: 北魏 正光 5년(524)에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高平郡으로 지금의 寧夏 固原縣에서 甘肅 平涼市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명이 乾元 元年(758)에 原州로 복원되었는데, 廣德 元年(763)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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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적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오직 남조만이 적의 핵심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사로잡고 노획한 것이 가장 많았다. 황제는 환관 윤해(尹偕)를 보내 이모심을 위로하였다. 토번곤명, 신천, 납천에 성대하게 둔영(屯營)을 설치하고 스스로 수비를 하였다. 이모심은 해마다 방물을 바쳤고, 천자는 예로써 대하였다.

  • 각주 001)
    聿齎: 지금의 雲南 德欽縣 남쪽에 있는 城으로, 南詔에서 劍川節度使에 예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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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劍山: 四川 茂縣 서북, 黑水縣 東南에 있는 劍山屯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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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邠隴軍: 吐蕃과 전쟁시 唐軍에는 邠隴兵 5천명으로 구원하려 온 曲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七盤城, 威武軍, 維州와 茂州 등에서 모집한 병사들이었다(『新唐書』卷147 「曲環傳」, “德宗初, 虜寇劍南, 詔環以邠·隴兵五千馳救, 收七盤城·威武軍·維茂等州”). 당시 邠은 邠州인데, 唐 永徽 2년(651에 설치한 羈縻州로서 四川 汶川縣 서남 邛崍山부근으로, 茂州都督府에 속하였다. 隴은 四川 梓潼縣 서북에 있는 十八隴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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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鹽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鹽州조에 따르면 염주는 靈武節度使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다. 西魏 廢帝 3년(554)에 西安州를 개칭한 것인데, 治所는 五原縣에 있었다. 현재 陝西省 定邊縣으로, 鹽池가 있어 붙여진 지명인데, 지명이 몇 차례 변동되다가, 乾元 元年(758) 鹽州가 되었는데, 建中이후에 吐蕃에게 빼앗겼다가 建元에 수복하였다. 후에는 西夏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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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夏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夏州조에 따르면 하주는 夏州綏銀節度使의 치소로 속현은 4현이다. 北魏 太和 11년(487)에 統萬鎭을 승급하여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化政郡 岩綠縣으로 唐代 朔方으로 개명하였는데, 현재 陝西 靖邊縣 북쪽의 白城子이다. 隋 大業 3년(607)에 朔方郡이 되었다가 貞觀 2년(628)에 夏州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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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河曲은 黃河가 굽어지는 곳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위에서 말하는 河曲은 黨項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鹽州와 夏州 일대 즉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州일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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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麟州:『元和郡縣圖志』卷4 「關內道」4 麟州조에 따르면 인주는 振武節度使 소속의 주로 속현은 3현이다. 唐 貞觀 8년(634) 西麟州를 개편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四川 若爾蓋縣 동쪽지역이다. 羈縻州로서 松州都督府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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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維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維州조에 따르면 유주는 원래 劒南西川節度使 소속으로, 唐 武德 7년(624)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四川 理縣 동북 薄城鎭 서남이다. 羈縻州로서 茂州에 속하였는데, 여러차례 지명이 바뀌다가 乾元 元年(758) 維州로 복귀하였다. 四川 理縣의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廣德 元年(763)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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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原州: 北魏 正光 5년(524)에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高平郡으로 지금의 寧夏 固原縣에서 甘肅 平涼市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명이 乾元 元年(758)에 原州로 복원되었는데, 廣德 元年(763)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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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고, 위고, 사비(邪毗), 조욱(趙昱), 이모심, 위고, 무면(武免), 위고, 위고, 위고, 윤해(尹偕), 이모심, 이모심
지명
토번, 수주, 당(唐), 남조, 토번, 토번, , 남조, 납천(納川), 고홍(故洪), 낙제(諾濟), 납(臘), 율재(聿齎), 서산(西山), 검산(劍山), 수주, 남조, 여주(黎州), 아주(雅州), 수주, 운남, 양저미(羊苴咩), 토번, 염주(鹽州), 염주, 하주(夏州), 하곡(河曲), 당항(党項), 토번, 인주(麟州), 서산, 평이(平夷), 농타화(隴陀和), 석문(石門), 신천(神川), 납천(納川), 남조, 회골(回鶻), 태원(太原), 분녕(邠寧), 경원(涇原), 토번, 검남(黔南), 동천(東川), 산남(山南), 봉상(鳳翔), , 남조, 곤명, 유주(維州), 진무(振武), 영무(靈武), 경원, 봉상, 원주(原州), 남조, 토번, 곤명, 신천, 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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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이 곤명, 신천, 납천에 둔영을 설치하여 수비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