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피라합의 六詔 통합

  • 국가
    남조(南詔)
개원(開元, 713~741, 唐 玄宗) 말에 피라합은 하만(河蠻)주 001
각주 001)
河蠻: 南詔가 성장하기 시작할 당시 滇池地區를 중심되는 거주지역으로 하는 白蠻과 그 동쪽으로 烏蠻이 있었고, 西洱河 즉 洱海주위를 중심지역으로 하는 종족을 河蠻이라고 하였다.
닫기
을 축출하여 대화성(大和城) 주 002
각주 002)
大和城: 太和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雲南省 大理市 太和村 서쪽 10里일대를 가리킨다. 唐代 河蠻에 축성한 것을 南詔에서 중축하여 太和賧의 치소가 되었다. 開元 26년(738)에서 大曆 14年(779)까지 南詔의 都城이었다.『蠻書』卷5 「六瞼」에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리 떨어져 있는데, 거리가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높이가 1丈 정도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설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하는데, 현재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남아 있다
닫기
을 얻었으며, 또 대리성(大釐城)을 습격하여 차지하였고, 이어서 용구(龍口) 주 003
각주 003)
龍口: 南詔에서 설치한 城으로, 지금의 雲南 大理市 서북 70리 上關에 있는데, 蒼山과 洱海가 만나는 곳이다. 樊綽의『蠻書』卷5에 大和城 大厘城 陽苴咩城은 모두 河灣의 거주지였는데 개원 25년(737) 蒙歸義 즉 皮羅閤이 河灣을 축출하고 大和城을 뺏어 장악하고, 수 개월 후에 苴咩城의 盛羅皮를 습격하여 大厘城을 취한다음 龍口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盛羅皮와 皮羅閤은 부자지간으로 되어 있는데, 상호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閤羅鳳의 정통성 확립과정에서 혈연관계에 혼란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닫기
에 성을 쌓았는데, 이들의 말로 산비탈을 ‘화(和)’라 하는 까닭에 ‘대화(大和)’라 불렀으며, 합라봉이 머물도록 하였다. 천자는 조를 내려 피라합에게 귀의(歸義)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 때에 이르러, 5조(詔)가 쇠미하여지고, 귀의만 홀로 강해졌다. 이에 [피라합은] 검남절도사(黔南節度使) 왕욱(王昱)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육조(六詔)를 하나로 합치는 것을 구하였는데, 황제의 허가가 났다. 귀의는 여러 만(蠻)을 아우른 뒤에 마침내 토번(吐蕃)까지 격파하게 되자 점차 교만하여졌다. [피라합이] 입조하자, 천자 또한 예를 더하였다. 또 미만(渳蠻)주 004
각주 004)
渳蠻: 楊愼의『雲南山川志』에서 西洱海는 府城의 동족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전의 葉楡河이며 名渳海 혹은 西洱河라고 한다는 설명하고 있다. 渳蠻이 渳海 주변에 거주하는 蠻人이라고 한다면, 결국 河蠻과도 동일한 민족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닫기
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자 중인(中人)을 급히 파견하여 운남왕(雲南王)으로 책봉하고 금포(錦袍)와 금전대(金鈿帶) 등 일곱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에 치소를 대화성으로 옮겼다.주 005
각주 005)
『舊唐書』卷197, 「南詔蠻傳」에 따르면 이는 開元 27年(739)의 일이다. 본문에서 말한 中人은 환관을 말한다.
닫기
천보(天寶, 742~755, 唐 玄宗) 초에 [피라합은] 합라봉의 아들 봉가이(鳳迦異)를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천자는 그를] 홍로경(鴻臚卿)주 006
각주 006)
鴻臚卿:『唐六典』卷18 ‘鴻臚卿’조에 따르면 홍로시에는 정원 1인의 卿을 두며 품질은 從3品이라고 하였다. 그 직무는 賓客과 凶儀의 일을 담당하며 典客, 司儀의 두 署 및 그 관속을 통솔한다. 즉 홍로경은 홍로시의 장관으로 다른 나라 군왕의 책봉 및 조문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봉가이가 받은 홍로경의 관직은 그 직함에 상응하는 직무와 권한이 따르는 職事官이 아닌 加官일 것이다.
닫기
에 임명하였는데, 은총과 하사가 매우 남달랐다.

  • 각주 001)
    河蠻: 南詔가 성장하기 시작할 당시 滇池地區를 중심되는 거주지역으로 하는 白蠻과 그 동쪽으로 烏蠻이 있었고, 西洱河 즉 洱海주위를 중심지역으로 하는 종족을 河蠻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大和城: 太和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雲南省 大理市 太和村 서쪽 10里일대를 가리킨다. 唐代 河蠻에 축성한 것을 南詔에서 중축하여 太和賧의 치소가 되었다. 開元 26년(738)에서 大曆 14年(779)까지 南詔의 都城이었다.『蠻書』卷5 「六瞼」에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리 떨어져 있는데, 거리가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높이가 1丈 정도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설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하는데, 현재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龍口: 南詔에서 설치한 城으로, 지금의 雲南 大理市 서북 70리 上關에 있는데, 蒼山과 洱海가 만나는 곳이다. 樊綽의『蠻書』卷5에 大和城 大厘城 陽苴咩城은 모두 河灣의 거주지였는데 개원 25년(737) 蒙歸義 즉 皮羅閤이 河灣을 축출하고 大和城을 뺏어 장악하고, 수 개월 후에 苴咩城의 盛羅皮를 습격하여 大厘城을 취한다음 龍口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盛羅皮와 皮羅閤은 부자지간으로 되어 있는데, 상호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閤羅鳳의 정통성 확립과정에서 혈연관계에 혼란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渳蠻: 楊愼의『雲南山川志』에서 西洱海는 府城의 동족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전의 葉楡河이며 名渳海 혹은 西洱河라고 한다는 설명하고 있다. 渳蠻이 渳海 주변에 거주하는 蠻人이라고 한다면, 결국 河蠻과도 동일한 민족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舊唐書』卷197, 「南詔蠻傳」에 따르면 이는 開元 27年(739)의 일이다. 본문에서 말한 中人은 환관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鴻臚卿:『唐六典』卷18 ‘鴻臚卿’조에 따르면 홍로시에는 정원 1인의 卿을 두며 품질은 從3品이라고 하였다. 그 직무는 賓客과 凶儀의 일을 담당하며 典客, 司儀의 두 署 및 그 관속을 통솔한다. 즉 홍로경은 홍로시의 장관으로 다른 나라 군왕의 책봉 및 조문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봉가이가 받은 홍로경의 관직은 그 직함에 상응하는 직무와 권한이 따르는 職事官이 아닌 加官일 것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피라합, 합라봉, 피라합, 귀의(歸義), 귀의, 피라합, 왕욱(王昱), 귀의, 피라합, 피라합, 합라봉, 봉가이(鳳迦異)
지명
대화성(大和城), 대리성(大釐城), 용구(龍口), 토번(吐蕃), 대화성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피라합의 六詔 통합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