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합의 六詔 통합
개원(開元, 713~741, 唐 玄宗) 말에 피라합은 하만(河蠻)주 001을 축출하여 대화성(大和城)
주 002
각주 002)
을 얻었으며, 또 대리성(大釐城)을 습격하여 차지하였고, 이어서 용구(龍口)
주 003에 성을 쌓았는데, 이들의 말로 산비탈을 ‘화(和)’라 하는 까닭에 ‘대화(大和)’라 불렀으며, 합라봉이 머물도록 하였다. 천자는 조를 내려 피라합에게 귀의(歸義)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 때에 이르러, 5조(詔)가 쇠미하여지고, 귀의만 홀로 강해졌다. 이에 [피라합은] 검남절도사(黔南節度使) 왕욱(王昱)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육조(六詔)를 하나로 합치는 것을 구하였는데, 황제의 허가가 났다. 귀의는 여러 만(蠻)을 아우른 뒤에 마침내 토번(吐蕃)까지 격파하게 되자 점차 교만하여졌다. [피라합이] 입조하자, 천자 또한 예를 더하였다. 또 미만(渳蠻)주 004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자 중인(中人)을 급히 파견하여 운남왕(雲南王)으로 책봉하고 금포(錦袍)와 금전대(金鈿帶) 등 일곱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에 치소를 대화성으로 옮겼다.주 005천보(天寶, 742~755, 唐 玄宗) 초에 [피라합은] 합라봉의 아들 봉가이(鳳迦異)를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천자는 그를] 홍로경(鴻臚卿)주 006에 임명하였는데, 은총과 하사가 매우 남달랐다.大和城: 太和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雲南省 大理市 太和村 서쪽 10里일대를 가리킨다. 唐代 河蠻에 축성한 것을 南詔에서 중축하여 太和賧의 치소가 되었다. 開元 26년(738)에서 大曆 14年(779)까지 南詔의 都城이었다.『蠻書』卷5 「六瞼」에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리 떨어져 있는데, 거리가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높이가 1丈 정도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설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하는데, 현재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남아 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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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大和城: 太和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雲南省 大理市 太和村 서쪽 10里일대를 가리킨다. 唐代 河蠻에 축성한 것을 南詔에서 중축하여 太和賧의 치소가 되었다. 開元 26년(738)에서 大曆 14年(779)까지 南詔의 都城이었다.『蠻書』卷5 「六瞼」에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리 떨어져 있는데, 거리가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높이가 1丈 정도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설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하는데, 현재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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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피라합, 합라봉, 피라합, 귀의(歸義), 귀의, 피라합, 왕욱(王昱), 귀의, 피라합, 피라합, 합라봉, 봉가이(鳳迦異)
- 지명
- 대화성(大和城), 대리성(大釐城), 용구(龍口), 토번(吐蕃), 대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