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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舍尨 이래의 계보와 당과의 관계

  • 국가
    남조(南詔)
군왕인 몽씨(蒙氏)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서로 이어진다. 사방(舍尨) 이래로 족보의 계보를 살펴볼 수 있다. 사방독라(獨邏)를 낳았는데, 세노라(細奴邏)라고도 한다. [독라는] 고종(高宗)시에 사자를 보내 입조하였고, [당 고종은]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 세노라나성염(邏盛炎)을 낳았고, 나성염염합(炎閤)을 낳았다. 무후(武后)시에 성염이 직접 입조하였는데, 마침 처가 임신중이었다가 성라피(盛邏皮)를 낳았다. [성염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또 아들을 가지게 되었으니, 만약 당나라 땅에서 죽게 되더라도 좋다”고 하였다. 염합이 즉위하였다가 개원(開元)연간에 죽었다. 동생 성라피가 즉위하여 피라각(皮邏閣)을 낳았다. [ 조정은] 특진(特進)에 제수하고, 대등군왕(臺登郡王)주 001
각주 001)
臺登郡王: 臺登은 前漢 元鼎 6年(전111) 越雟郡의 屬縣으로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四川 冕寧縣의 남쪽 瀘沽鎭에 있었다. 南齊시에 폐하였다가, 北周 武帝시 다시 설치되었는데, 白沙郡의 郡治였다. 隋代 越雟郡에 속하였가가 唐 武德 원년(618) 登州의 治所가 되고, 貞觀 2年(628)에 다시 雟州에 예속하였가가 天寶初에는 越雟郡에 속하였다. 乾元初에 다시 越州에 속하였다가 太和 6년(832) 雟州의 治所가 되었으나, 咸通 10년(869) 南詔에 의해 장악되었다. 따라서 臺登은 郡이 된 적은 없고 皮羅閣시기에는 南詔의 통치영역도 아니었다. 이는 외교적 고려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邏盛炎의 두 아들인 炎閤과 盛羅皮의 경쟁에 唐 왕조가 개입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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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하였다. 염합이 아들이 없을 때 합라봉(閤邏鳳)을 후사로 삼았는데,주 002
각주 002)
이 문장에는 상호 모순이 되는 부분이 있다. 앞서 盛羅皮가 炎閤의 동생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盛羅皮의 손자에 해당하는 閤羅鳳이 炎閤을 계승하였다고 설명되고 있다. 閤羅鳳이 다른 곳에서는 閣羅鳳으로 되어 있는 것은 각각 炎閤과 皮羅閣의 후계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南詔王國 초기 내부 세력이 唐朝와의 親疎에 따라 분열되었고, 이를 통합한 異牟尋에 정통성이 새로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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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합이] 아들이 생기자 [합라봉은] 원래의 계보로 돌려보냈다. [합라봉은] ‘합(閤)’을 계승하여 이름을 지었었는데 나중에도 고치지 않았다.주 003
각주 003)
『資治通鑑』卷243 「唐紀」59 長慶 3年 秋 7月조에서는 ‘不與父連名’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에서는 父子가 이름을 서로 이어 붙이니 그 선조 細奴邏가 邏盛炎을 낳았고, 邏盛炎은 炎閤을 낳았으며, 炎閤이 죽자 그 아우 盛邏皮가 들어섰는데 盛邏皮는 皮邏閤을 낳았고, 皮邏閤은 閤邏鳳을 낳았으며 閤邏鳳은 鳳迦異를 낳았고 鳳迦異는 異牟尋을 낳았으며 異牟尋은 尋閣勸을 낳고 尋閣勸은 勸龍晟, 勸利를 낳았으니 모두 이름을 이어 붙인 것이다.’ 즉 남조에서는 부왕의 마지막 이름자를 자기 이름의 첫 글자로 삼아 여기에 새 이름을 지어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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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臺登郡王: 臺登은 前漢 元鼎 6年(전111) 越雟郡의 屬縣으로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四川 冕寧縣의 남쪽 瀘沽鎭에 있었다. 南齊시에 폐하였다가, 北周 武帝시 다시 설치되었는데, 白沙郡의 郡治였다. 隋代 越雟郡에 속하였가가 唐 武德 원년(618) 登州의 治所가 되고, 貞觀 2年(628)에 다시 雟州에 예속하였가가 天寶初에는 越雟郡에 속하였다. 乾元初에 다시 越州에 속하였다가 太和 6년(832) 雟州의 治所가 되었으나, 咸通 10년(869) 南詔에 의해 장악되었다. 따라서 臺登은 郡이 된 적은 없고 皮羅閣시기에는 南詔의 통치영역도 아니었다. 이는 외교적 고려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邏盛炎의 두 아들인 炎閤과 盛羅皮의 경쟁에 唐 왕조가 개입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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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이 문장에는 상호 모순이 되는 부분이 있다. 앞서 盛羅皮가 炎閤의 동생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盛羅皮의 손자에 해당하는 閤羅鳳이 炎閤을 계승하였다고 설명되고 있다. 閤羅鳳이 다른 곳에서는 閣羅鳳으로 되어 있는 것은 각각 炎閤과 皮羅閣의 후계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南詔王國 초기 내부 세력이 唐朝와의 親疎에 따라 분열되었고, 이를 통합한 異牟尋에 정통성이 새로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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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資治通鑑』卷243 「唐紀」59 長慶 3年 秋 7月조에서는 ‘不與父連名’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에서는 父子가 이름을 서로 이어 붙이니 그 선조 細奴邏가 邏盛炎을 낳았고, 邏盛炎은 炎閤을 낳았으며, 炎閤이 죽자 그 아우 盛邏皮가 들어섰는데 盛邏皮는 皮邏閤을 낳았고, 皮邏閤은 閤邏鳳을 낳았으며 閤邏鳳은 鳳迦異를 낳았고 鳳迦異는 異牟尋을 낳았으며 異牟尋은 尋閣勸을 낳고 尋閣勸은 勸龍晟, 勸利를 낳았으니 모두 이름을 이어 붙인 것이다.’ 즉 남조에서는 부왕의 마지막 이름자를 자기 이름의 첫 글자로 삼아 여기에 새 이름을 지어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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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사방(舍尨), 사방, 독라(獨邏), 세노라(細奴邏), 독라, 고종(高宗), 당 고종, 세노라, 나성염(邏盛炎), 나성염, 염합(炎閤), 무후(武后), 성염, 성라피(盛邏皮), 성염, 염합, 성라피, 피라각(皮邏閣), 염합, 합라봉(閤邏鳳), 염합, 합라봉, 합라봉
지명
당나라,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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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尨 이래의 계보와 당과의 관계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