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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苴蠻과 남조의 군사조직

  • 국가
    남조(南詔)
망저만(望苴蠻)주 001
각주 001)
望苴蠻: 줄여서 “望蠻”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佤族의 선조. 漢代와 魏晉南北朝시대에 나타난 “閩濮”중에서 분화된 것으로, “望”과 “佤”는 동일한 민족칭호를 다르게 音寫한 것이다. 그들의 분포지역은 “外喻部落”, “永昌西北” “瀾滄江以西”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永昌西北은 지금의 雲南省 保山 서북 騰沖縣 일대이고, 瀾滄江 以西는 지금의 臨滄地區의 阿佤山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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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창강(蘭蒼江) 서쪽에 있었는데, 남녀가 모두 용맹하고 민첩하여 안장이 없이도 말을 타며 창과 칼을 잘 사용하며, 짧은 갑옷으로 가슴과 복부를 가리며, 가죽으로 된 투구에는 모두 묘우(貓牛)주 002
각주 002)
貓牛:『漢書』「司馬相如傳」의 顔師古注에서는 “犛牛卽今之貓牛者也.”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야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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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꼬리를 꽂고, 빠르게 돌격하는 것이 귀신같았다. 대체로 군사가 출병할 때는 망저자(望苴子)주 003
각주 003)
望苴子: 羅苴子와 마찬가지로, 南詔가 望蠻중에서 징발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苴子”는 勇士 혹은 士兵를 의미한다. 南詔는 여기서 군대를 징발하여 상비병으로 대외전쟁에 투입하였다. 그 충원과 조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는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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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봉에 서고, 청평관의 자제들이 우의(羽儀)주 004
각주 004)
羽儀: 羽儀는 원래『易』「漸卦」의 “鴻漸於陸, 其羽可用爲儀.”라는 구절에서 기원하는데, 이에 대해 唐 孔穎達의 疏에서는 “處高而能不以位自累, 則其羽可用爲物之儀表, 可貴可法也”라고 하였다. 이에 기인하여 지위가 높고 재덕이 있어 존중을 받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당대 南蠻들과 관련하여서는 羽儀長의 직책에서 보듯, 왕의 護衛와 儀仗을 맡는 직책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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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다. 왕의 좌우에는 우의장(羽儀長) 8인이 있는데, 청평관이 왕을 알현할 때는 칼을 찰 수가 없는데, 오직 우의장만이 칼을 차니 가장 믿음직한 집단이었다. 6명의 조장(曹長)주 005
각주 005)
曹長: 唐代 尙書丞郞이나 郞中들이 일상적으로 서로를 칭하는 호칭이었지만, 望苴蠻들은 이를 공식적인 관직으로 정착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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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데, 조장이 공이 있으면 대군장(大軍將)으로 보임된다. 대군장은 12명인데, 청평관과 동일한 지위로 매일 왕이 머무는 곳에서 정사를 의논한다. 외진으로 나가 군벽(軍壁)주 006
각주 006)
軍壁: 軍營壁壘의 의미로서, ‘治軍壁’은 외진에서의 군사활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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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스릴 때는 절도(節度)를 칭하고, 그 다음으로 청평관에 보임된다. 내산관(內算官)주 007
각주 007)
內算官: 南詔에서 淸平官중에서 보임된 1명의 관리로 기밀을 담당하여, 詔王을 대신하여 문서를 판단하고 처리하였는데, 이 외에 副內算官 2인이 있었다. 算官이라는 표현은 중국의 관제에서는 하급 기술직으로서 통계를 담당하는 관직을 가리키는 경우는 있으나, 고위관의 명칭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南詔 관직에 대한 音寫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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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데 왕을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외산관(外算官)은 왕의 처분을 기록하여 6조(曹)에 송부한다.주 008
각주 008)
望苴蠻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蠻書』卷9 「南蠻條敎」에서는 南詔의 일반적인 지배체제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大將軍’ 대신 ‘大軍將’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거나 內算官 外算官에 대한 설명은 거의 유사하여『신당서』찬술시『만서』를 참조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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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에는 6절도(節度)가 있는데, 농동(弄棟) 주 009
각주 009)
弄棟節度: 南詔 후기에 雲南節度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治所는 弄棟城으로 지금의 雲南 姚安縣 동쪽 10리 姚安壩子 동쪽 구릉상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의 姚安縣과 楚雄市를 포괄하는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大理國시에 弄棟府로 개칭하였다. 弄棟은 원래 前漢 元封 2년(전109) 처음 雲南郡의 屬縣이 설치되었는데, 三國 蜀 建興 3년(225)에는 雲南郡治가 되었다. 東晉 成帝시에 興寧郡治가 되었다가 梁末에 폐지되었다. 唐 高宗 麟德 원년(664) 姚州로 개편하고 都督府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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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永昌) 은생(銀生) 주 010
각주 010)
銀生節度: 南詔에 설치된 군사기구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瀾滄拉祜族自治縣 북쪽 上允鎭에 있는 銀生城이었다. 지금의 雲南 서남 瀾滄江 以西와 小黑江이남에서 미얀마지역을 포함하였다. 南詔後期에 開南節度가 편입되어 지금의 雲南 景東彝族自治縣에서 남쪽으로 西雙版納와 국경지구까지를 포괄하였다. 이곳은 婆羅門, 波斯, 閡婆, 勃尼, 昆侖 등과의 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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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천(劍川) 주 011
각주 011)
劍川節度: 唐 貞元 10년(794) 南詔가 寧北節度를 개치한 곳으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劍川縣 南14里에 있는 劍川城이었다. ‘劍’은 원래 티벳어로 納西族을 가리키는 말이고, ‘川’은 地方을 의미하는 말로서, 劍川은 納西人의 지역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雲南 大理 白族自治州 북부와 怒江 傈僳族自治州 일부를 포괄하였다. 후에 鐵橋節度가 편입되어, 지금의 滇西 북부의 넓은 지역이 포함되었는데,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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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柘東) 주 012
각주 012)
柘東: 지금 雲南 昆明市 舊城 南關밖에 있는 善闡城이다. 南詔시기 閣羅鳳의 아들 鳳伽異가 節度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9세기 중엽 善闡府라고 개칭하였다. 東京이라고도 불렸는데 蒙古 至元 7년(1270) 府로 개편되었다가 至元 13년(1276) 中慶路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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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麗水) 주 013
각주 013)
麗水: 지금 미얀마경내의 이라와디강을 의미하는데, 祿耳江 혹은 祿旦江이라고도 한다. 이에 근거하여 지금의 미얀마 Kachin주 Myitkyina에 麗水城이 있었는데, 南詔 후기 鎭西節度를 개편하면서 麗水節度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미얀마 북부지역을 관할하였는데, 大理시에 騰沖府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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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고], 2도독(都督)이 회천(會川) 주 014
각주 014)
會川都督府: 南詔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四川 會理縣에 있었으며, 지금의 四川 會理縣 동남으로 金沙江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서쪽으로는 雅礱江, 북쪽으로는 大渡河에 이르렀다. 곧 會同府로 개칭되었다가 大理시에 會川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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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회(通海) 주 015
각주 015)
通海都督府: 南詔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通海縣에 있는 通海城이었으며, 지금의 雲南 通海縣 이남으로 紅河哈尼族彝族自治州와 文山壯族苗族自治州 대부분과 베트남 북부지역을 통할하였다.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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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였다. 또 10검(瞼)이 있는데, 이족(夷族)의 말로 검(瞼)은 주(州)와 같은데, 운남검(雲南瞼), 백애검(白厓瞼) 주 016
각주 016)
白厓: 지금의 四川 沐川縣 동남 健全鄉 雙河村에 있는 寨로서 南宋시기에 嘉州 犍爲縣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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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발롱검(勃弄瞼),주 017
각주 017)
勃弄: 白壓臌라고도 하는데, 雲南 瀰渡縣 북쪽의 紅崖로서 南詔의 十瞼중의 하나가 설치되었다. 唐 武德 7년(624)에 縣이 설치되어 南雲州의 治所가 되었다. 貞觀 3年(629) 匡州의 소속이 되었다가 天寶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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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첨검(品澹瞼), 등천검(邆川瞼),주 018
각주 018)
邆川: 지금의 雲南 洱源縣 동남 36里에 있는 邆川鎭에 있는 邆川城으로서, 그 동북에 德源城의 유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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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검(蒙舍瞼), 대리검(大釐瞼) 주 019
각주 019)
大釐瞼: 大厘瞼이라고도 표현하는데, 史賧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치소는 지금의 雲南 大理市 서북 60리 喜洲鎭에 있는 大厘城으로서, 大理시기에는 喜賧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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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사검(史瞼), 저양검(苴咩瞼) 혹은 양검(陽瞼), 몽진검(蒙秦瞼),주 020
각주 020)
蒙秦瞼: 治所는 지금의 雲南 巍山彝族回族自治縣 서북 五十八里에 있는 碗成村으로서, 雲南 巍山彝族回族自治縣 북부와 漾濞彝族自治縣의 지역을 포괄하였다.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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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검(矣和瞼),주 021
각주 021)
矣和瞼: 지금의 建水縣 동남에 矣和波山이 있고, 蒙自縣과 個舊市 간의 大屯海가 矣波海로 불리는 것으로 봐서 이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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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검(趙川瞼) 주 022
각주 022)
趙川瞼: 渠斂趙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雲南 大理市 동쪽 16리에 있는 鳳儀鎭이다. 雲南 大理市 東南部를 통할하였는데, 大理시기에 趙賧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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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한다.

  • 각주 001)
    望苴蠻: 줄여서 “望蠻”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佤族의 선조. 漢代와 魏晉南北朝시대에 나타난 “閩濮”중에서 분화된 것으로, “望”과 “佤”는 동일한 민족칭호를 다르게 音寫한 것이다. 그들의 분포지역은 “外喻部落”, “永昌西北” “瀾滄江以西”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永昌西北은 지금의 雲南省 保山 서북 騰沖縣 일대이고, 瀾滄江 以西는 지금의 臨滄地區의 阿佤山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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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貓牛:『漢書』「司馬相如傳」의 顔師古注에서는 “犛牛卽今之貓牛者也.”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야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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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望苴子: 羅苴子와 마찬가지로, 南詔가 望蠻중에서 징발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苴子”는 勇士 혹은 士兵를 의미한다. 南詔는 여기서 군대를 징발하여 상비병으로 대외전쟁에 투입하였다. 그 충원과 조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는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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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羽儀: 羽儀는 원래『易』「漸卦」의 “鴻漸於陸, 其羽可用爲儀.”라는 구절에서 기원하는데, 이에 대해 唐 孔穎達의 疏에서는 “處高而能不以位自累, 則其羽可用爲物之儀表, 可貴可法也”라고 하였다. 이에 기인하여 지위가 높고 재덕이 있어 존중을 받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당대 南蠻들과 관련하여서는 羽儀長의 직책에서 보듯, 왕의 護衛와 儀仗을 맡는 직책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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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曹長: 唐代 尙書丞郞이나 郞中들이 일상적으로 서로를 칭하는 호칭이었지만, 望苴蠻들은 이를 공식적인 관직으로 정착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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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軍壁: 軍營壁壘의 의미로서, ‘治軍壁’은 외진에서의 군사활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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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內算官: 南詔에서 淸平官중에서 보임된 1명의 관리로 기밀을 담당하여, 詔王을 대신하여 문서를 판단하고 처리하였는데, 이 외에 副內算官 2인이 있었다. 算官이라는 표현은 중국의 관제에서는 하급 기술직으로서 통계를 담당하는 관직을 가리키는 경우는 있으나, 고위관의 명칭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南詔 관직에 대한 音寫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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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望苴蠻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蠻書』卷9 「南蠻條敎」에서는 南詔의 일반적인 지배체제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大將軍’ 대신 ‘大軍將’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거나 內算官 外算官에 대한 설명은 거의 유사하여『신당서』찬술시『만서』를 참조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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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弄棟節度: 南詔 후기에 雲南節度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治所는 弄棟城으로 지금의 雲南 姚安縣 동쪽 10리 姚安壩子 동쪽 구릉상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의 姚安縣과 楚雄市를 포괄하는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大理國시에 弄棟府로 개칭하였다. 弄棟은 원래 前漢 元封 2년(전109) 처음 雲南郡의 屬縣이 설치되었는데, 三國 蜀 建興 3년(225)에는 雲南郡治가 되었다. 東晉 成帝시에 興寧郡治가 되었다가 梁末에 폐지되었다. 唐 高宗 麟德 원년(664) 姚州로 개편하고 都督府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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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銀生節度: 南詔에 설치된 군사기구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瀾滄拉祜族自治縣 북쪽 上允鎭에 있는 銀生城이었다. 지금의 雲南 서남 瀾滄江 以西와 小黑江이남에서 미얀마지역을 포함하였다. 南詔後期에 開南節度가 편입되어 지금의 雲南 景東彝族自治縣에서 남쪽으로 西雙版納와 국경지구까지를 포괄하였다. 이곳은 婆羅門, 波斯, 閡婆, 勃尼, 昆侖 등과의 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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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劍川節度: 唐 貞元 10년(794) 南詔가 寧北節度를 개치한 곳으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劍川縣 南14里에 있는 劍川城이었다. ‘劍’은 원래 티벳어로 納西族을 가리키는 말이고, ‘川’은 地方을 의미하는 말로서, 劍川은 納西人의 지역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雲南 大理 白族自治州 북부와 怒江 傈僳族自治州 일부를 포괄하였다. 후에 鐵橋節度가 편입되어, 지금의 滇西 북부의 넓은 지역이 포함되었는데,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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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柘東: 지금 雲南 昆明市 舊城 南關밖에 있는 善闡城이다. 南詔시기 閣羅鳳의 아들 鳳伽異가 節度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9세기 중엽 善闡府라고 개칭하였다. 東京이라고도 불렸는데 蒙古 至元 7년(1270) 府로 개편되었다가 至元 13년(1276) 中慶路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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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麗水: 지금 미얀마경내의 이라와디강을 의미하는데, 祿耳江 혹은 祿旦江이라고도 한다. 이에 근거하여 지금의 미얀마 Kachin주 Myitkyina에 麗水城이 있었는데, 南詔 후기 鎭西節度를 개편하면서 麗水節度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미얀마 북부지역을 관할하였는데, 大理시에 騰沖府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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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會川都督府: 南詔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四川 會理縣에 있었으며, 지금의 四川 會理縣 동남으로 金沙江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서쪽으로는 雅礱江, 북쪽으로는 大渡河에 이르렀다. 곧 會同府로 개칭되었다가 大理시에 會川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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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通海都督府: 南詔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雲南 通海縣에 있는 通海城이었으며, 지금의 雲南 通海縣 이남으로 紅河哈尼族彝族自治州와 文山壯族苗族自治州 대부분과 베트남 북부지역을 통할하였다.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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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白厓: 지금의 四川 沐川縣 동남 健全鄉 雙河村에 있는 寨로서 南宋시기에 嘉州 犍爲縣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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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勃弄: 白壓臌라고도 하는데, 雲南 瀰渡縣 북쪽의 紅崖로서 南詔의 十瞼중의 하나가 설치되었다. 唐 武德 7년(624)에 縣이 설치되어 南雲州의 治所가 되었다. 貞觀 3年(629) 匡州의 소속이 되었다가 天寶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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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邆川: 지금의 雲南 洱源縣 동남 36里에 있는 邆川鎭에 있는 邆川城으로서, 그 동북에 德源城의 유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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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大釐瞼: 大厘瞼이라고도 표현하는데, 史賧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치소는 지금의 雲南 大理市 서북 60리 喜洲鎭에 있는 大厘城으로서, 大理시기에는 喜賧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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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蒙秦瞼: 治所는 지금의 雲南 巍山彝族回族自治縣 서북 五十八里에 있는 碗成村으로서, 雲南 巍山彝族回族自治縣 북부와 漾濞彝族自治縣의 지역을 포괄하였다. 大理시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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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矣和瞼: 지금의 建水縣 동남에 矣和波山이 있고, 蒙自縣과 個舊市 간의 大屯海가 矣波海로 불리는 것으로 봐서 이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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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趙川瞼: 渠斂趙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雲南 大理市 동쪽 16리에 있는 鳳儀鎭이다. 雲南 大理市 東南部를 통할하였는데, 大理시기에 趙賧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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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난창강(蘭蒼江), 농동(弄棟), 영창(永昌), 은생(銀生), 검천(劍川), 자동(柘東), 여수(麗水), 회천(會川), 통회(通海), 운남검(雲南瞼, 백애검(白厓瞼), 발롱검(勃弄瞼), 품첨검(品澹瞼), 등천검(邆川瞼), 몽사검(蒙舍瞼), 대리검(大釐瞼), 사검(史瞼), 저양검(苴咩瞼), 양검(陽瞼), 몽진검(蒙秦瞼), 의화검(矣和瞼), 조천검(趙川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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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苴蠻과 남조의 군사조직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