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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서북지역 융(戎)의 특성과 쟁투(爭鬪)

  • 국가
    서북제융(西北諸戎)
서북(西北) 지역의 제융(諸戎)은 한대(漢代)에 장건(張騫)이 처음으로 서역에 이르는 길을 드러내고, [후한대에] 감영(甘英)이 마침내 서해(西海)에 이르자, 어떤 나라는 [국왕의 아들을] 보내 황제를 시위(侍衛)하도록 하였고, 어떤 나라는 [표를] 받들어 공헌하였다. 당시 비록 최선을 다하여 군사적 대응을 하였다고 하나, 간신히 조금 이겼을 뿐이며, 다만 전대에 비하여 그 도모하는 것이 심원하였을 뿐이다. 조위시에는 삼국이 정립하여 대치하고, 날마다 전쟁만 일삼았다. 서진(西晉)의 사마씨(司馬氏)가 를 평정한 이후 잠시 평화를 얻었으나, 무기교위(戊己校尉)주 001
각주 001)
戊己校尉: 前漢 元帝 初元 元年(전48)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屯田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치소는 車師 前王의 궁정에 두었다. 西域都護에 예속되었으나, 단독으로 府를 열고 丞, 司馬, 候 등의 속관을 두었다. 무기교위가 통령하는 吏士들 또한 정벌의 임무를 맡았다. 秩은 二千石이다. 新莽시부터 후한 초기까지 때에 따라 폐지되기도 하고 다시 설치되기도 하였다. 後漢 明帝 永平 17년(74)에 두 사람을 두어 하나는 車師 後王部의 金浦城에 주둔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車師前王部의 柳中城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서로의 거리가 천여 리였다. 나중에 폐지하기도 하고 다시 설치하기도 하였다. 安帝 永初 元年(107)에 서역도호를 폐지한 뒤에, 늘 西域長史와 함께 西域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三國 魏 文帝 黃初 3년(222)에도 설치하여, 高昌에 治所를 두었는데, 관품은 4품이었다. 兩晉 시기에도 설치하였는데, 관품은 4품이었다. 十六國 시기 前涼의 張駿이 무기교위 조정을 사로잡고, 그 땅을 高昌郡으로 삼았다. 여전히 그 관을 설치하니, 西域都護, 玉門大護軍과 함께 三營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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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을 두었을 뿐이고, 서역의 제국(諸國) 또한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중원(中原)에 동란이 일어나고, 호인(胡人)이 교대로 일어나니, 서역강동(江東)이 격절되어 역관과 사자[重譯]가 교왕하지 못하였다. 여광(呂光) 주 002
각주 002)
呂光(338∼399): 字는 世明이며, 略陽(甘肅省의 天水) 氐族 사람으로, 呂婆樓의 아들이다. 十六國時期 後涼國의 건국자이다. 呂光은 본디 前秦의 將領이었다. 前秦 建元 18년(382) 淝水戰의 전야에 天王 符堅의 命을 받아 西域 정벌에 나서서, 焉耆를 항복시키고 龜茲를 격파하여, 西域에 위엄을 떨쳤다. 이로 인하여 원방의 諸國이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呂光은 본디 龜茲에 머무르려 하였는데, 名僧 鳩摩羅什의 권유를 받고, 또 部豪들 또한 中原으로 돌아가기 원했기 때문에, 마침내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前秦이 淝水에서 패한 뒤에, 전진 境內의 各族이 제각기 이반하여, 여광은 서역에 갇혀 동쪽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前秦 太安 元年(385)에 끝내 涼州로 공격하여 들어갔다. 386년에 呂光은 符堅의 사망 소식을 듣고, 太安으로 개원하였으며, 아울러 使持節·侍中·中外大都督·督隴右·河西諸軍事·大將軍·涼州牧·酒泉公을 自稱하였다. 389년에는 三河王을 칭하고, 麟嘉로 개원하였다. 396년에는 다시 天王으로 개칭하고, 國號를 大涼이라 하였으며, 龍飛로 개원하였다. 龍飛 4년(399)에 呂光은 病이 위중하여, 太子 呂紹를 세워 天王으로 삼고, 스스로는 太上皇帝라 불렀는데, 오래지 않아 죽었다. 諡號는 懿武皇帝, 廟號는 太祖라고 하였다. 『晉書』 載記에 입전되어 있다(『晉書』 卷122 「載記」第22 〈呂光〉: 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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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국(龜茲國)을 점령한 것 또한 만이가 만이를 토벌한 것일 뿐이지, 중국의 뜻은 아니다. 이로부터 여러 국들이 나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여, 그 승부와 강약을 자세히 기록하기 어렵다. 명주(明珠)와 취우(翠羽)는 후궁에 가득 차있어도, 포초(蒲梢)나 용문(龍文)과 같은 명마가 외서(外署)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양(梁)이 천명을 받은 뒤 정삭(正朔)을 받들고 궐에 조공하는 나라로는 구지(仇池) 탕창(宕昌) 고창(高昌) 등지(鄧至) 하남(河南) 구자(龜茲) 우전(于闐) 활(滑) 등의 제국(諸國)이 있다. 지금 그 풍속을 엮어서 서북융전(西北戎傳)을 지었다.

  • 각주 001)
    戊己校尉: 前漢 元帝 初元 元年(전48)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屯田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치소는 車師 前王의 궁정에 두었다. 西域都護에 예속되었으나, 단독으로 府를 열고 丞, 司馬, 候 등의 속관을 두었다. 무기교위가 통령하는 吏士들 또한 정벌의 임무를 맡았다. 秩은 二千石이다. 新莽시부터 후한 초기까지 때에 따라 폐지되기도 하고 다시 설치되기도 하였다. 後漢 明帝 永平 17년(74)에 두 사람을 두어 하나는 車師 後王部의 金浦城에 주둔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車師前王部의 柳中城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서로의 거리가 천여 리였다. 나중에 폐지하기도 하고 다시 설치하기도 하였다. 安帝 永初 元年(107)에 서역도호를 폐지한 뒤에, 늘 西域長史와 함께 西域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三國 魏 文帝 黃初 3년(222)에도 설치하여, 高昌에 治所를 두었는데, 관품은 4품이었다. 兩晉 시기에도 설치하였는데, 관품은 4품이었다. 十六國 시기 前涼의 張駿이 무기교위 조정을 사로잡고, 그 땅을 高昌郡으로 삼았다. 여전히 그 관을 설치하니, 西域都護, 玉門大護軍과 함께 三營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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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呂光(338∼399): 字는 世明이며, 略陽(甘肅省의 天水) 氐族 사람으로, 呂婆樓의 아들이다. 十六國時期 後涼國의 건국자이다. 呂光은 본디 前秦의 將領이었다. 前秦 建元 18년(382) 淝水戰의 전야에 天王 符堅의 命을 받아 西域 정벌에 나서서, 焉耆를 항복시키고 龜茲를 격파하여, 西域에 위엄을 떨쳤다. 이로 인하여 원방의 諸國이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呂光은 본디 龜茲에 머무르려 하였는데, 名僧 鳩摩羅什의 권유를 받고, 또 部豪들 또한 中原으로 돌아가기 원했기 때문에, 마침내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前秦이 淝水에서 패한 뒤에, 전진 境內의 各族이 제각기 이반하여, 여광은 서역에 갇혀 동쪽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前秦 太安 元年(385)에 끝내 涼州로 공격하여 들어갔다. 386년에 呂光은 符堅의 사망 소식을 듣고, 太安으로 개원하였으며, 아울러 使持節·侍中·中外大都督·督隴右·河西諸軍事·大將軍·涼州牧·酒泉公을 自稱하였다. 389년에는 三河王을 칭하고, 麟嘉로 개원하였다. 396년에는 다시 天王으로 개칭하고, 國號를 大涼이라 하였으며, 龍飛로 개원하였다. 龍飛 4년(399)에 呂光은 病이 위중하여, 太子 呂紹를 세워 天王으로 삼고, 스스로는 太上皇帝라 불렀는데, 오래지 않아 죽었다. 諡號는 懿武皇帝, 廟號는 太祖라고 하였다. 『晉書』 載記에 입전되어 있다(『晉書』 卷122 「載記」第22 〈呂光〉: 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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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張騫), 감영(甘英), 여광(呂光)
지명
서역, 후한, 서해(西海), 조위, 서진(西晉), , 서역, 서역, 강동(江東), 구자국(龜茲國), 중국, 양(梁), 구지(仇池), 탕창(宕昌), 고창(高昌), 등지(鄧至), 하남(河南), 구자(龜茲), 우전(于闐), 활(滑)
서명
서북융전(西北戎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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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역 융(戎)의 특성과 쟁투(爭鬪)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20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