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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고회(高悝)가 장휴교(張侯橋) 아래에서 불상을 발견함

  • 국가
    제박국(諸薄國)
진(晉) 함화 연간(咸和, 326∼334)에 단양윤(丹陽尹)주 001
각주 001)
丹陽尹: 『宋書』 「州郡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丹陽尹은 秦의 鄣郡으로 치소는 지금 吳興郡의 故鄣縣이었다. 漢初에는 吳國에 속하였다가, 吳王 濞가 반란을 일으켰다 패한 뒤로 江都國에 속하게 되었다. 武帝 元封 2년(전109)에 丹陽郡이 되었으며, 치소는 지금 宣城郡의 宛陵縣이었다. 晉 武帝 太康 2년(281)에 丹陽郡을 나누어 宣城郡을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宛陵에 두었다. 그리고 丹陽郡의 치소는 建業으로 옮겼다. 元帝 太興 元年(318)에 고쳐서 尹이라 하였다. 거느린 縣은 8곳, 戶는 41,010, 인구는 237,341인이었다.”(『宋書』 卷35 「州郡志」 1 〈揚州〉: 1029). 건업은 현재의 南京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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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회(高悝)가 길을 가다 장후교(張侯橋)에 이르러, 냇물 속에서 여러 척 길이의 오색의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어떤 괴이한 물건인지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빛이 나는 곳을 헤쳐 보니, 금으로 만든 불상이 나왔는데, 광배와 대좌 부분이 없었다. 고회는 이에 수레에서 내려 불상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는데, 장간항(長干巷) 입구에 이르자, 소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고회가 수레 모는 이에게 소가 가고자 하는 대로 맡기게 하니, 소는 곧 수레를 끌고 사원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고회는 불상을 절의 승려에게 주어 남겨두었다. 매번 한밤중이 되면, 항상 밝은 빛이 나며 공중에서 금석기(金石器)의 음향이 들렸다. 한 해가 지나고, 고기잡이 장계세(張係世)라는 사람이 해구(海口)에서 홀연히 동화부(銅花趺)가 물위로 떠오른 것을 발견하였다. 장계세는 그것을 건져 현부로 보냈고, 현에서는 조정으로 보냈다. 조정에서 동화부를 불상과 맞추어 보니, 완연히 들어맞았다.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371)에 교주 합포(合浦) 주 002
각주 002)
合浦縣: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으며, 合浦郡에 속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에 설치되었다. 후한대에는 합포군의 治所가 되었다.合浦郡: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徐聞縣(廣東省의 徐聞縣 남쪽)에 두어졌다. 관할 구역은 오늘날 광동성의 新興 開平으로부터 서남쪽, 廣西省의 容縣 玉林 橫縣 이남의 지역에 상당하였다. 후한대에 치소를 합포현(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으로 옮겼다. 三國時期 吳 黃武 7년(228)에 珠官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孫亮時에 다시 合浦郡으로 하였다. 南朝 宋代에는 越州에 속하였으며, 南齊 시기에는 치소를 徐聞縣으로 옮겼다가 梁代에 다시 合浦縣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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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동종지(董宗之)가 진주를 캐다가 물에 빠졌는데, 바닥에서 광배를 발견하였다. 교주부에서는 이것을 조정으로 압송하였으며, 조정에서 광배를 불상과 맞추어 보니, 꼭 맞았다. 함화 연간에 불상을 얻은 뒤로 함안 초까지 30여 년을 지나 광배와 대좌 부분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 각주 001)
    丹陽尹: 『宋書』 「州郡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丹陽尹은 秦의 鄣郡으로 치소는 지금 吳興郡의 故鄣縣이었다. 漢初에는 吳國에 속하였다가, 吳王 濞가 반란을 일으켰다 패한 뒤로 江都國에 속하게 되었다. 武帝 元封 2년(전109)에 丹陽郡이 되었으며, 치소는 지금 宣城郡의 宛陵縣이었다. 晉 武帝 太康 2년(281)에 丹陽郡을 나누어 宣城郡을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宛陵에 두었다. 그리고 丹陽郡의 치소는 建業으로 옮겼다. 元帝 太興 元年(318)에 고쳐서 尹이라 하였다. 거느린 縣은 8곳, 戶는 41,010, 인구는 237,341인이었다.”(『宋書』 卷35 「州郡志」 1 〈揚州〉: 1029). 건업은 현재의 南京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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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合浦縣: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으며, 合浦郡에 속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에 설치되었다. 후한대에는 합포군의 治所가 되었다.合浦郡: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徐聞縣(廣東省의 徐聞縣 남쪽)에 두어졌다. 관할 구역은 오늘날 광동성의 新興 開平으로부터 서남쪽, 廣西省의 容縣 玉林 橫縣 이남의 지역에 상당하였다. 후한대에 치소를 합포현(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으로 옮겼다. 三國時期 吳 黃武 7년(228)에 珠官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孫亮時에 다시 合浦郡으로 하였다. 南朝 宋代에는 越州에 속하였으며, 南齊 시기에는 치소를 徐聞縣으로 옮겼다가 梁代에 다시 合浦縣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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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고회(高悝), 고회, 고회, 고회, 장계세(張係世), 장계세, 간문제(簡文帝), 동종지(董宗之)
지명
진(晉), 장후교(張侯橋), 장간항(長干巷), 합포(合浦), 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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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회(高悝)가 장휴교(張侯橋) 아래에서 불상을 발견함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060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