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범천개(范天凱)의 공헌(貢獻)과 조서(詔書)

  • 국가
    임읍국(林邑國)
효무제(孝武帝) 효건 연간(孝建, 454∼456)과 대명 연간(大明, 457∼464) 중에 임읍왕 범신성(范神成)이 누차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표를 받들고 공헌하였다. 명제(明帝) 태예(泰豫) 원년(472)에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方物)을 공헌하였다. 제(齊) 영명 연간(永明, 483∼493)에 범문찬(范文贊)이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공헌(貢獻)하였다. 천감(天監) 9년(510)에 [범]문찬의 아들 천개(天凱)가 하얀 원숭이를 봉헌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이르기를, “임읍왕(林邑王) 범천개는 해외(海外)주 001
각주 001)
海表: 본문의 ‘海表’는 ‘海外’와 같은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표’와 ‘해외’의 ‘해’는 물리적 바다가 아니라, 관념상의 바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海內(=中國)’의 상대어로 ‘중국’의 바깥 즉 오랑캐의 땅을 가리킨다. 이에 관하여는 김한규의 정리가 참고할 만하다. 김한규는 秦漢代의 ‘四海’개념을 정리하면서 ‘해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漢의 武帝期에 이르러 ‘四海’ 개념 자체에 적지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해외’라는 새로운 개념이 발생하였고, ‘사해’ 개념은 종래의 ‘해내’(=중국)와 더불어 새로운 ‘해외’(=사이) 개념을 아울러 포괄하는 종합적 세계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인의 세계가 이원화되는 과정과 함께, 당시인들의 ‘중국’외 지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새로운 세계질서의 편성에 대한 왕성한 의욕을 아울러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위덕이 ‘사해’(=중+외)에 고루 미쳐야 한다는 그들의 이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김한규, 1982: 77).
닫기
에 있으면서도,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고 멀리서 직공(職貢)의 본분을 다하니, 어진 데다 아름답다 할 만하다. 마땅히 작호(爵號)를 나누어주어 영화와 은택을 입도록 해야겠다. 지절(持節) 독연해제군사(督緣海諸軍事) 위남장군(威南將軍) 임읍왕(林邑王)이 가(可)하다.”라고 하였다. [천감] 10년(511)과 13년(514)에 천개가 거듭 사자를 보내 방물을 공헌하였다. 천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아들 필취발마(弼毳跋摩) 주 002
각주 002)
弼毳跋摩(515∼528): 왕의 이름이 갑자기 중국식에서 힌두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중국사서에서 임읍왕명은 모두 범어식 이름에 대하여 음차한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임읍의 ‘힌두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닫기
가 즉위하여 표를 받들어 공헌하였다. 보통(普通) 7년(526)에 [임읍] 왕(王) 고식승등(高式勝鐙)이 사자를 보내 방물을 공헌하니, 조를 내려 지절(持節) 독연해제군사(督緣海諸軍事) 수남장군(綏南將軍) 임읍왕(林邑王)으로 삼았다. 대통(大通) 원년(527)에 다시 사자를 보내 공헌(貢獻)하였다. 중대통(中大通) 2년(530)에 행임읍왕(行林邑王) 고식률타라발마(高式律陁羅跋摩)가 사자를 보내 공헌하니, 조(詔)를 내려 지절(持節) 독연해제군사(督緣海諸軍事) 수남장군(綏南將軍) 임읍왕(林邑王)으로 삼았다. 6년(534)에 다시 사자를 보내 방물을 공헌하였다.

  • 각주 001)
    海表: 본문의 ‘海表’는 ‘海外’와 같은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표’와 ‘해외’의 ‘해’는 물리적 바다가 아니라, 관념상의 바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海內(=中國)’의 상대어로 ‘중국’의 바깥 즉 오랑캐의 땅을 가리킨다. 이에 관하여는 김한규의 정리가 참고할 만하다. 김한규는 秦漢代의 ‘四海’개념을 정리하면서 ‘해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漢의 武帝期에 이르러 ‘四海’ 개념 자체에 적지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해외’라는 새로운 개념이 발생하였고, ‘사해’ 개념은 종래의 ‘해내’(=중국)와 더불어 새로운 ‘해외’(=사이) 개념을 아울러 포괄하는 종합적 세계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인의 세계가 이원화되는 과정과 함께, 당시인들의 ‘중국’외 지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새로운 세계질서의 편성에 대한 왕성한 의욕을 아울러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위덕이 ‘사해’(=중+외)에 고루 미쳐야 한다는 그들의 이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김한규, 1982: 77).
     바로가기
  • 각주 002)
    弼毳跋摩(515∼528): 왕의 이름이 갑자기 중국식에서 힌두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중국사서에서 임읍왕명은 모두 범어식 이름에 대하여 음차한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임읍의 ‘힌두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효무제(孝武帝), 범신성(范神成), 명제(明帝), 범문찬(范文贊), [범]문찬, 천개(天凱), 범천개, 천개, 천개, 필취발마(弼毳跋摩), 고식승등(高式勝鐙), 고식률타라발마(高式律陁羅跋摩)
지명
제(齊)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범천개(范天凱)의 공헌(貢獻)과 조서(詔書)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