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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구달(區達) 이후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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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읍국(林邑國)
말에 크게 어지러워지자, [상림현의] 공조(功曹) 구달(區達, 쿠 리엔)이 현령을 죽이고 자립(自立)하여 왕이 되었다.주 001
각주 001)
유인선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럼 업의 건국과 활약상에 대해서는 『欽定越史通鑑綱目』에 나와 있다. “후한 말 뜨엉 럼[象林] 현 출신 구 리엔(Khu Lien, 區連)이란 사람이 이곳 현령을 죽이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린이[林邑]라 했다. 구 리엔이 대가 끊기니 외손 팜 훙(Pham Hung, 范熊)이 왕위를 계승했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들어와 럼 업인들은 녓 남 군과 끄우 쩐 군[九眞郡]을 자주 침범하여 양민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해 갔다.”(유인선, 200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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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가 몇 대 전해진 뒤, 후사가 끊겨 외손 범웅(范熊, 팜 훙)을 세웠다. 이 죽자, 그의 아들 [범]일(逸, 팜 젓)이 위를 이었다. 서진성제(成帝) 함강(咸康) 3년(337)에 범일이 죽자, 노비 출신인 [범]문(文, 팜 반)주 002
각주 002)
범문: Pham Van. 유인선은 팜 반을 중국계로 보았다(유인선, 200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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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위하여 자립하였다. 은 본디 일남군 서권현(西捲縣) 이인(夷人) 범치(范稚)의 가노(家奴)였는데, 늘 산과 계곡에서 소를 쳤다. [어느 날 계곡에서 소를 치다가] 가물치[鱧魚] 두 마리를 잡았는데, 이 가물치가 변하여 쇳덩어리가 되었다. 쇳덩어리를 녹여 도(刀)를 만들었다. 도가 완성되자, 문이 바위를 향하여 빌어 말하기를, “만약 바위를 베어 깨뜨리면, 나는 마땅히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도를 들어 바위를 베었는데, 마치 마른 풀을 베듯 갈라졌다. 문이 혼자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범치는 늘 문에게 임읍에 가서 장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임읍 왕에게 궁실(宮室)과 병거(兵車) 및 병기계(兵器械)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왕이 총애하여 중용하였다. 나중에 [범문이] 왕의 여러 아들들을 중상하여 각기 다른 나라로 망명하게 하였다. 왕이 죽음에 미쳐 후사가 없자, 문이 거짓으로 이웃 나라에 왕의 아들을 마중한다 하여 가서 마실 것[漿]에 독을 놓아 죽이고, 마침내 국인(國人)을 협박하여 자립(自立)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곁의 소국(小國)을 공격하여 모두 병탄하고 멸망시키니, 무리 4, 5만을 갖게 되었다. 당시 교주자사(交州刺史) 강장(姜莊) 주 003
각주 003)
강장: 교주자사 강장에 관하여 추적할 수 있는 사적은 이곳의 것이 전부이다. 『晉書』에서는 姜壯이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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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인의 친신 한집(韓戢)사치(謝稚)에게 연이어 일남군(日南郡)을 관장하게 하였는데,주 004
각주 004)
謝稚: 『晉書』에서는 謝稚를 謝擢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日南太守의 직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 여기에서의 ‘監’은 ‘주관하다.’, ‘관장하다.’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진서』에는 交州刺史와 日南太守가 일남군 요외로부터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여러 나라 상인들로부터 그 물품의 열에 두셋을 갈취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음을 전하면서, 특히 한집은 직접 자신이 매매하는 것이 태반이었고, 또 이 배들을 털어대는 것이 마치 정벌하는 듯했다고 한다(『晉書』 卷97 「四夷」 〈南蠻〉: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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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일남군이 관장하는] 여러 나라가 근심하였다. 동진 목제(穆帝) 주 005
각주 005)
穆帝(343∼361): 이름은 司馬聃. 字는 彭子. 康帝의 長子로 康帝 사후 위를 이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두 살이었다. 17年간 재위하였다. 康帝의 病이 위중하자 大臣들이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344년 9월 康帝가 병사하자, 같은 달 己亥일에 제위에 올랐다. 다음해에 연호를 바꾸어 “永和”라고 하였다. 즉위할 당시 2세였기 때문에 褚太后가 臨朝聽政하였다. 재위 기간에 桓溫을 이용하여 庾氏 세력을 구축하였지만, 환온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져 제위 찬탈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361년 5월 정사(丁巳)일에 사마담은 建康宮의 顯陽殿에서 1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廟號는 孝宗이라 하였고, 諡號는 穆帝라 하였다. 永平陵(현재의 江蘇省 江寧縣 西北쪽의 幕府山 남쪽)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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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永和) 3년(347)에 조정[臺]은 하후람(夏侯覽)을 파견하여 태수로 삼았는데, 백성을 침탈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임읍은 일찍이 전토(田土)가 없어서, 일남(日南)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항상 침략하여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민의 원망이 높은 것을 틈타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일남을 습격하였다. 하후람을 죽여 그 시체를 희생으로 하늘에 제를 지냈다. [범문은] 일남에 3년간 머물렀다가 임읍으로 돌아갔다. 교주자사(交州刺史) 주번(朱藩)이 나중에 독호(督護)주 006
각주 006)
督護: 기록상 西晉 末에 처음 등장한 이래 주로 東晉代에 운용되었다. 관제적 위상은 都督과 큰 차이가 있지만, 장군이 휘하 무관으로 하여금 일정한 군사관할권을 가진 지휘관 역할을 하도록 부여한 加官이었다. 南朝 宋代 이후로는 軍府에서 參軍 아래의 최하급관(流外官)인 參軍督護로 위상과 기능이 변질 하락하였으나, 특별히 남방의 交州와 廣州 지역에서는 남조말까지도 西江督護 南江督護 東江督護 등이 군사적 요충지에서 독자적으로 군사관할권을 행사하는 고급 지휘관으로 기능했음을 볼 수 있다. 陳의 창업주가 된 陳覇先은 梁 末에 西江督護로서 후경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크게 입신한 사례이다(이주현, 1994: 27∼35). 『宋書』 「百官志」에 따르면, “參軍督護는 동진시에 설치되었으며, 본디 모두 병영을 통령하였으며, 부곡을 거느렸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하였다(『宋書』 卷39 「百官」 上: 1223). 또 『資治通鑒』 宋文帝元嘉三年條에서는 “晦之走也, 左右皆棄之, 唯延陵蓋追隨不捨, 帝以蓋爲鎭軍功曹督護”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胡三省注는 “晉氏가 강을 건넌 뒤에(동진 시에), 參軍督護가 있었다. 功曹參軍은 督護를 겸하였으니, 곧 參軍督護의 임직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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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웅(劉雄)을 파견하여 일남을 지키게 하였는데, 범문이 다시 처절하게 멸하였다. 나아가 구덕군(九德郡)에 침범하여, 그 관리와 민을 해쳤다. [범문이] 사자를 보내 [교주자사] 주번에게 고하기를, 일남의 북쪽 지경에 있는 횡산(橫山) 주 007
각주 007)
橫山: 현재의 호아인 썬(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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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경계로 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주번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번은] 다시 독호 도완(陶緩)이구(李衢)를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범문임읍으로 돌아갔으나, 얼마 있다가 다시 일남에 주둔하였다. 5년(349)에 범문이 죽고, 그 아들 범불(范佛, 팜펏)이 섰는데, 여전히 일남에 주둔하였다. 정서장군(征西將軍) 환온(桓溫) 주 008
각주 008)
桓溫(312∼373): 字는 符子이고, 東晉시기의 대장군으로 譙國 龍亢(현재의 安徽 懷遠)사람이다. 동진 明帝의 딸인 南康公主를 아내로 삼았다. 그 부친은 桓彝이며, 환온의 家는 당시 동진의 명문가였다. 환온은 3차에 걸쳐 北伐을 수행하였다. 그의 관력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咸康 7년(341) 琅琊太守의 직을 맡았다. 永和 元年(345)에는 荊州刺史가 되었으며, 庾翼을 대신하여 兵權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에 桓溫은 成漢의 內部가 불안한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長江을 따라 올라가, 成漢의 蜀地를 평정하였다. 漢王 李勢는 투항하였으며, 환온은 征西大將軍에 배수되고, 臨賀郡公에 봉해졌다. 永和 5년(349) 4월에 後趙의 군주 石虎가 죽자, 北方이 다시 혼란에 빠졌고, 환온이 여러 차례 北伐을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환온이 자신의 휘하로 임읍을 토벌하게 한 것은 이 북벌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永和 6년(350)에 朝廷은 殷浩를 中軍將軍·都督五州諸軍事로 삼아 北伐의 重任을 맡겼는데, 은호는 이를 통해 환온과 맞섰다. 결과적으로 은호는 대패하여 돌아왔고, 桓溫이 마침내 大權을 장악하였다. 永和 10년(354)에 桓溫은 제1차 北伐에 나서 前秦을 공격하였는데, 승승장구하여 長安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군량 부족으로 襄陽으로 물러났다. 永和 12년(356)에 桓溫은 第2次 北伐을 감행하여, 羌族 姚襄을 쳐서 패퇴시키고, 洛陽을 수복하였다. 隆和 元年(362)에 桓溫은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또 남천한 士族들의 귀향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관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前燕은 東晉의 君臣이 서로 견제하는 틈을 타서 다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太和 4년(369)에 桓溫은 보다 높은 威望을 얻기 위해, 步騎 5萬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 前燕을 향해 진격하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군량이 떨어지고, 前秦의 援兵이 이를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 마침내 배를 불사르고 무기를 버린 채 육로로 퇴각하였다. 우물을 파서 마시며 700여 리를 행군하였는데, 도중에 前燕 騎兵의 매복 공격을 받아, 3만 여명을 잃고 대패하여 돌아왔다. 咸安 元年(371)부터 환온은 領尙書事·侍中에 大司馬와 都督中外諸軍事를 맡아 실질적인 輔政을 행하였는데, 司馬奕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은 뒤, 다시 簡文帝를 세우고, 大司馬로써 전권을 행사하였다. 다음해에 간문제가 죽자 桓溫은 스스로 晉을 대신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오래지 않아 病死하였고, 그 아우 桓沖에게 자신의 지위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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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호(督護) 등준(縢畯) 주 009
각주 009)
縢畯: 정서대장군 환온의 독호로써 범불을 토벌한 사적은 『晉書』와 『梁書』, 『南史』에 보이며, 『晉書』에는 환온이 3차 북벌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벌어지는 전투에서 西陽太守로서 언급된다. 이 밖의 사적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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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구진태수(九眞太守) 관수(灌邃) 주 485
각주 485)
灌邃: 『梁書』와 『南史』에 임읍을 토벌한 이야기가 전하고, 기타의 사적은 찾기 어렵다. 다만 『舊唐書』는 관수의 임읍 토벌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北景은 漢의 縣名이며, 日南郡에 속하였는데, 安南府의 南쪽 3,000里에 위치한다. 北景은 南쪽에 있다. 동진의 장수 灌邃가 林邑王 范佛을 공격하여, 그 國을 격파하였는데, 마침내 그 國에서 오월 오일에 해그림자를 재는 도구인 表를 세웠더니, 그림자가 표의 남쪽으로 9촌1분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북경 이남은 모두 북쪽으로 창호를 내어 해를 맞이한다. ‘北’字는 혹 하나만 있어서 ‘匕’이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舊唐書』 卷41 「地理志」 4 〈景州〉: 1757).” 즉 일남군이 왜 일남이라는 이름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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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교주광주(廣州) 주 011
각주 011)
廣州: 광주는 交州로부터 분리 설치되었다. 『三國志』 「吳書」에 따르면, 交阯太守 士燮이 죽자, 손권이 사섭의 아들 徽를 安遠將軍으로 삼고 九眞太守의 직을 겸령하게 한 뒤 校尉 陳時로 사섭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 때(黃武 5년; 226)에 교주자사 여대가 표를 올려 海南의 三郡을 나누어 交州로 삼아 將軍 戴良을 刺史로 삼도록 하고, 海東의 四郡을 廣州로 하여 여대 자신이 刺史가 되었다(『三國志』 卷61 「吳書」: 1384)고 한다. 그러나 이후 사휘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광주는 폐지되고 잠시 구제가 회복되었다. 다시 永安 6년(263)에 다시 交州를 나누어 廣州를 설치하였다(『晉書』 卷15 「地理」 下: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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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범불이 성을 빙둘러 굳게 지켰다. 관수등준에게 적의 앞 쪽에 병사들을 벌여놓도록 하고, 자신은 경졸 700인을 이끌고 뒤로 돌아가 성채를 뛰어 넘어 들어가니, 범불의 무리가 놀라 대형이 무너지며 달아났다. 관수가 추격하여 임읍에 이르니, 범불이 마침내 항복을 청하였다. 애제(哀帝) 승평 연간(昇平, 357∼361) 초에 다시 [임읍의] 침략을 받았으나, 자사(刺史) 온방지(溫放之)가 쳐서 깨뜨렸다.주 012
각주 012)
승평 연간 초면 穆帝에 해당한다. 애제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또 昇平은 ‘升平’으로 바꾸어야 한다. 『晉書』 「穆帝本紀」에 따르면, 교주자사 온방지는 升平 3년(359) 12월에 군대를 이끌고 林邑의 參黎와 耽潦을 토벌하여 모두 항복시켰다고 한다(『晉書』 卷8 「孝宗穆帝聃」: 204). 온방지에 관하여 더 이상의 정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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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安帝) 주 013
각주 013)
安帝(382∼418): 이름은 司馬德宗. 孝武帝의 長子로, 孝武帝가 죽은 뒤 위를 이었으며, 재위 기간은 22년이다. 司馬德宗은 총명하지 못한데다 용렬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즉위 후에는 연이어 司馬道子와 司馬德文에게 휘둘렸으며, 시종일관 꼭두각시였다. 그의 재위기간 중에는 孫恩과 盧循의 반란이 발발하였으며, 403년에는 楚王에 책봉된 大將軍 桓玄이 皇帝를 자칭하고, 司馬德宗을 폐하여 平固王(平固는 현재 江西省 贛州市 東)으로 삼고 그를 尋陽(江西省 九江市)으로 옮겨 살도록 명하여, 東晉 왕조가 중간에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군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토벌하자, 桓玄은 패하여 尋陽으로 도주하여 사마덕종을 끼고 강릉 일대(현재 湖北省 江陵縣)를 전전하였다. 404년에 桓玄의 군대가 패하고 환현이 피살되자, 안제는 비로소 복위할 수 있었다. 418년에 대장군 劉裕가 中書侍郞 王韶之에게 사마덕종의 좌우 시종을 매수하여 그를 제거하도록 밀명을 내렸고, 12월 형의 안전을 걱정하여 하루 종일 그를 시종하여 지키던 司馬德文이 병이나 휴양하는 틈을 타서, 戊寅日에 王韶之가 시종들을 지휘하여 사마덕종을 살해하였다. 향년 37歲였으며, 休平陵(현재 江蘇省 江寧縣의 蔣山)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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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안(隆安) 3년(399)에 불(佛)의 손자 수달(須達) 주 014
각주 014)
范須達: 『晉書』 및 『宋書』에는 ‘須達’이 ‘胡達’로 되어있고, ‘팜 호 덧’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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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시 일남을 침략하여 태수 경원(炅源)을 사로잡고, 또 진군하여 구덕군을 침략하여 태수 조병(曹炳)을 사로잡았다. 교지태수(交趾太守) 두원(杜瑗) 주 015
각주 015)
杜瑗: 도 비엔. 두원의 집안은 본디 지금의 시안 부근에 살던 중국인이었으나, 그의 조부가 寧浦郡의 태수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교지의 朱鳶縣에 정착했다. 당시 교주는 온방지의 뒤를 이어 朱輔가 자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자리는 잠시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자사가 없는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구진태수로 있던 현지인 리 똔[李遜]이었다. 그는 380년 자사가 새로 임명되어 부임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경쟁자였던 교지태수 두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晉書』 「本紀」에 따르면, 두원이 리 똔을 제거한 것은 효무제 태원 6년 즉 381년이다). 두원은 일남과 구덕의 태수를 역임하고 교지태수로 있다가 리 똔을 살해하고 신임자사를 맞이한 것이다(유인선, 2002: 62). 두원은 이 때의 공으로 龍驤將軍에 오르고, 본문에 보이는 것처럼 임읍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교주자사의 자리에 오른다. 交趾郡 朱鳶縣의 土豪 杜瑗이 交州刺史에 취임한 이래 5세기에는 그의 子와 孫인 杜慧度와 杜弘文이 交州 吏民들의 추대에 의해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전통 사서인 『大越史記全書』 外紀 3 「士王紀」에서는 이들 杜氏를 士王 즉 士燮의 후예로 기록하기도 하였다(後藤均平, 1973: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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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호 등일(鄧逸) 등을 보내어 격파하자, 바로 두원을 자사로 삼았다. 의희(義熙) 3년(407)에 수달이 다시 구진(九眞)군을 침략하였는데, 임시로 군의 일을 맡고 있던 두혜기(杜慧期) 주 016
각주 016)
杜慧期: 『宋書』의 「良吏傳」에 따르면, 두혜기는 두원을 이어 교주자사에 추대된 杜慧度(도 뚜에 도)의 아우로 두원의 아들이다. 士燮 때 그러했던 것처럼, 당시의 교주는 두원의 두씨 집안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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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더불어 싸워 수달의 자식 교룡왕(交龍王) 견지(甄知) 및 그 장수 범건(范健) 등을 베고, 수달의 자식 염능(能)을 생포하였으며, 백여 인을 노획하였다. 두원이 죽은 뒤주 017
각주 017)
유인선은 두원이 죽은 뒤의 일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광주자사 盧循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 비엔[杜瑗]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도 비엔이 마침 고령으로 사망하고 아들 도 뚜에 도[杜慧度]가 주민들의 천거로 자사가 되자, 노순은 즉시 合浦를 점령하고 교주로 쳐들어 갔다. 교주 내에 리 똔[李遜]의 자손들이 호응한 까닭에 악전고투하였지만, 도 뚜에 도는 끝내 盧氏와 李氏 일가를 무너뜨리고 북쪽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것처럼 임읍이 다시 남쪽을 소란스럽게 하자, 420년대에 대대적인 정벌을 하여 임읍을 항복시키고, 그때까지 잃은 모든 것을 찾았다(유인선, 2002: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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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임읍일남구덕 등 여러 군을 침략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살상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교주(交州)가 마침내 허약해졌다.
[범]수달(須達)이 죽고 그 아들 적진(敵眞)이 서자, 적진의 아우 적등(敵鐙)이 그 어미의 손을 잡아끌고 나라 밖으로 도망하였다. [범]적진이 끝내 그 어미와 아우를 포용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나라를 버리고 천축(天竺)으로 가고자 하였다.주 018
각주 018)
敵眞의 印度行은 흔히 임읍의 ‘힌두화’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힌두화’와 연결되어 설명된다. 石井米雄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다낭(Danang) 남쪽의 챠 끼에우(Tra Kieu)에서 출토된 古瓦 연구에 따르면, 2세기에서 4세기의 챠 끼에우 지역과 紅河 델타 士燮의 지배 지역에서는 매우 비슷한 中國式의 人面瓦가 출토된다고 한다. 范文이 양주 출신이라는 전설도 있고, 임읍의 도시문화는 베트남 중부 별도의 철기문화인 사휜 문화 위에 그 산품의 주된 시장인 중국문명이 중첩되어 있었다. 미손(Myson)에서는 바드라바르만의 이름을 가진 4세기 말 경에 만들어진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발견되고 있다. 范胡達의 것이라 생각된다. 또 중국 사료에 따르면, 범호달의 아들 적진은 나라를 버리고 天竺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미손의 비문에 따르면 강가 왕이라는 왕이 갠지스를 지나치게 연모한 나머지 인도에 가버렸다고 한다. 인도(힌두) 사상이 임읍의 왕들 사이에 점차 內在化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삽화이다. 동남아시아에 예를 들어 렌가 건축물 같은 비동남아시아적, 인도적인 건축물이 도입된 것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의 벵갈-안다만 해 연안에서 현저하며 또 옥에오(Oc Eo) 유물이 대표하는 것과 같이 2세기 이후로는 인도나 서방세계에서 나온 잡화가 다량으로 도입되었다. 또 그 연차를 알 수 없는 남베트남 출토의 보카인 비문, 또 중국사료에 산견되는 왕명에 산스크리트어가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인도적인 문명의 유입은 시스템적인 것은 아니었다. 산발적 개별적 도입에 지나지 않았다. 문자와 종교를 수반하는 인도 문명이 동남아시아 연해의 여러 도시에 도입된 것은 5∼6세기의 일이다.”(石井米雄, 1999: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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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위를 생질에게 선양하였고, 국의 상(相) 장린(藏麟)이 고집스럽게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조카는 왕위에 오르자 장린을 살해하였고, [이에] 장린의 아들이 다시 그를 공격하여 죽이고 [범]적등의 동모이부제(同母異父弟)인 문적(文敵)을 세웠다. 문적은 나중에 부남왕(扶南王)의 아들 당근순(當根純)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대신(大臣) 범제농(范諸農)이 그 난을 평정하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제농(諸農)이 죽고, [범]양매(陽邁)가 즉위하였다. 유송(劉宋) 영초(永初) 2년(421)에 사자를 보내 공헌(貢獻)하니, 양매를 임읍왕에 책봉(冊封)하였다. 양매가 죽고, 아들 돌(咄)이 섰는데, 그 아비를 흠모하여 다시 양매 주 019
각주 019)
范陽邁: 팜 드엉 마이(Pham Duong Mai) 2세. 한편으로 宋에 사신을 보내 입공하면서도, 교주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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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칭하였다.

  • 각주 001)
    유인선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럼 업의 건국과 활약상에 대해서는 『欽定越史通鑑綱目』에 나와 있다. “후한 말 뜨엉 럼[象林] 현 출신 구 리엔(Khu Lien, 區連)이란 사람이 이곳 현령을 죽이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린이[林邑]라 했다. 구 리엔이 대가 끊기니 외손 팜 훙(Pham Hung, 范熊)이 왕위를 계승했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들어와 럼 업인들은 녓 남 군과 끄우 쩐 군[九眞郡]을 자주 침범하여 양민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해 갔다.”(유인선, 200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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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범문: Pham Van. 유인선은 팜 반을 중국계로 보았다(유인선, 200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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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강장: 교주자사 강장에 관하여 추적할 수 있는 사적은 이곳의 것이 전부이다. 『晉書』에서는 姜壯이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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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謝稚: 『晉書』에서는 謝稚를 謝擢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日南太守의 직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 여기에서의 ‘監’은 ‘주관하다.’, ‘관장하다.’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진서』에는 交州刺史와 日南太守가 일남군 요외로부터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여러 나라 상인들로부터 그 물품의 열에 두셋을 갈취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음을 전하면서, 특히 한집은 직접 자신이 매매하는 것이 태반이었고, 또 이 배들을 털어대는 것이 마치 정벌하는 듯했다고 한다(『晉書』 卷97 「四夷」 〈南蠻〉: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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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穆帝(343∼361): 이름은 司馬聃. 字는 彭子. 康帝의 長子로 康帝 사후 위를 이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두 살이었다. 17年간 재위하였다. 康帝의 病이 위중하자 大臣들이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344년 9월 康帝가 병사하자, 같은 달 己亥일에 제위에 올랐다. 다음해에 연호를 바꾸어 “永和”라고 하였다. 즉위할 당시 2세였기 때문에 褚太后가 臨朝聽政하였다. 재위 기간에 桓溫을 이용하여 庾氏 세력을 구축하였지만, 환온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져 제위 찬탈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361년 5월 정사(丁巳)일에 사마담은 建康宮의 顯陽殿에서 1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廟號는 孝宗이라 하였고, 諡號는 穆帝라 하였다. 永平陵(현재의 江蘇省 江寧縣 西北쪽의 幕府山 남쪽)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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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督護: 기록상 西晉 末에 처음 등장한 이래 주로 東晉代에 운용되었다. 관제적 위상은 都督과 큰 차이가 있지만, 장군이 휘하 무관으로 하여금 일정한 군사관할권을 가진 지휘관 역할을 하도록 부여한 加官이었다. 南朝 宋代 이후로는 軍府에서 參軍 아래의 최하급관(流外官)인 參軍督護로 위상과 기능이 변질 하락하였으나, 특별히 남방의 交州와 廣州 지역에서는 남조말까지도 西江督護 南江督護 東江督護 등이 군사적 요충지에서 독자적으로 군사관할권을 행사하는 고급 지휘관으로 기능했음을 볼 수 있다. 陳의 창업주가 된 陳覇先은 梁 末에 西江督護로서 후경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크게 입신한 사례이다(이주현, 1994: 27∼35). 『宋書』 「百官志」에 따르면, “參軍督護는 동진시에 설치되었으며, 본디 모두 병영을 통령하였으며, 부곡을 거느렸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하였다(『宋書』 卷39 「百官」 上: 1223). 또 『資治通鑒』 宋文帝元嘉三年條에서는 “晦之走也, 左右皆棄之, 唯延陵蓋追隨不捨, 帝以蓋爲鎭軍功曹督護”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胡三省注는 “晉氏가 강을 건넌 뒤에(동진 시에), 參軍督護가 있었다. 功曹參軍은 督護를 겸하였으니, 곧 參軍督護의 임직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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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橫山: 현재의 호아인 썬(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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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桓溫(312∼373): 字는 符子이고, 東晉시기의 대장군으로 譙國 龍亢(현재의 安徽 懷遠)사람이다. 동진 明帝의 딸인 南康公主를 아내로 삼았다. 그 부친은 桓彝이며, 환온의 家는 당시 동진의 명문가였다. 환온은 3차에 걸쳐 北伐을 수행하였다. 그의 관력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咸康 7년(341) 琅琊太守의 직을 맡았다. 永和 元年(345)에는 荊州刺史가 되었으며, 庾翼을 대신하여 兵權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에 桓溫은 成漢의 內部가 불안한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長江을 따라 올라가, 成漢의 蜀地를 평정하였다. 漢王 李勢는 투항하였으며, 환온은 征西大將軍에 배수되고, 臨賀郡公에 봉해졌다. 永和 5년(349) 4월에 後趙의 군주 石虎가 죽자, 北方이 다시 혼란에 빠졌고, 환온이 여러 차례 北伐을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환온이 자신의 휘하로 임읍을 토벌하게 한 것은 이 북벌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永和 6년(350)에 朝廷은 殷浩를 中軍將軍·都督五州諸軍事로 삼아 北伐의 重任을 맡겼는데, 은호는 이를 통해 환온과 맞섰다. 결과적으로 은호는 대패하여 돌아왔고, 桓溫이 마침내 大權을 장악하였다. 永和 10년(354)에 桓溫은 제1차 北伐에 나서 前秦을 공격하였는데, 승승장구하여 長安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군량 부족으로 襄陽으로 물러났다. 永和 12년(356)에 桓溫은 第2次 北伐을 감행하여, 羌族 姚襄을 쳐서 패퇴시키고, 洛陽을 수복하였다. 隆和 元年(362)에 桓溫은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또 남천한 士族들의 귀향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관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前燕은 東晉의 君臣이 서로 견제하는 틈을 타서 다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太和 4년(369)에 桓溫은 보다 높은 威望을 얻기 위해, 步騎 5萬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 前燕을 향해 진격하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군량이 떨어지고, 前秦의 援兵이 이를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 마침내 배를 불사르고 무기를 버린 채 육로로 퇴각하였다. 우물을 파서 마시며 700여 리를 행군하였는데, 도중에 前燕 騎兵의 매복 공격을 받아, 3만 여명을 잃고 대패하여 돌아왔다. 咸安 元年(371)부터 환온은 領尙書事·侍中에 大司馬와 都督中外諸軍事를 맡아 실질적인 輔政을 행하였는데, 司馬奕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은 뒤, 다시 簡文帝를 세우고, 大司馬로써 전권을 행사하였다. 다음해에 간문제가 죽자 桓溫은 스스로 晉을 대신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오래지 않아 病死하였고, 그 아우 桓沖에게 자신의 지위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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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縢畯: 정서대장군 환온의 독호로써 범불을 토벌한 사적은 『晉書』와 『梁書』, 『南史』에 보이며, 『晉書』에는 환온이 3차 북벌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벌어지는 전투에서 西陽太守로서 언급된다. 이 밖의 사적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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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灌邃: 『梁書』와 『南史』에 임읍을 토벌한 이야기가 전하고, 기타의 사적은 찾기 어렵다. 다만 『舊唐書』는 관수의 임읍 토벌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北景은 漢의 縣名이며, 日南郡에 속하였는데, 安南府의 南쪽 3,000里에 위치한다. 北景은 南쪽에 있다. 동진의 장수 灌邃가 林邑王 范佛을 공격하여, 그 國을 격파하였는데, 마침내 그 國에서 오월 오일에 해그림자를 재는 도구인 表를 세웠더니, 그림자가 표의 남쪽으로 9촌1분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북경 이남은 모두 북쪽으로 창호를 내어 해를 맞이한다. ‘北’字는 혹 하나만 있어서 ‘匕’이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舊唐書』 卷41 「地理志」 4 〈景州〉: 1757).” 즉 일남군이 왜 일남이라는 이름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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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廣州: 광주는 交州로부터 분리 설치되었다. 『三國志』 「吳書」에 따르면, 交阯太守 士燮이 죽자, 손권이 사섭의 아들 徽를 安遠將軍으로 삼고 九眞太守의 직을 겸령하게 한 뒤 校尉 陳時로 사섭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 때(黃武 5년; 226)에 교주자사 여대가 표를 올려 海南의 三郡을 나누어 交州로 삼아 將軍 戴良을 刺史로 삼도록 하고, 海東의 四郡을 廣州로 하여 여대 자신이 刺史가 되었다(『三國志』 卷61 「吳書」: 1384)고 한다. 그러나 이후 사휘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광주는 폐지되고 잠시 구제가 회복되었다. 다시 永安 6년(263)에 다시 交州를 나누어 廣州를 설치하였다(『晉書』 卷15 「地理」 下: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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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승평 연간 초면 穆帝에 해당한다. 애제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또 昇平은 ‘升平’으로 바꾸어야 한다. 『晉書』 「穆帝本紀」에 따르면, 교주자사 온방지는 升平 3년(359) 12월에 군대를 이끌고 林邑의 參黎와 耽潦을 토벌하여 모두 항복시켰다고 한다(『晉書』 卷8 「孝宗穆帝聃」: 204). 온방지에 관하여 더 이상의 정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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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安帝(382∼418): 이름은 司馬德宗. 孝武帝의 長子로, 孝武帝가 죽은 뒤 위를 이었으며, 재위 기간은 22년이다. 司馬德宗은 총명하지 못한데다 용렬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즉위 후에는 연이어 司馬道子와 司馬德文에게 휘둘렸으며, 시종일관 꼭두각시였다. 그의 재위기간 중에는 孫恩과 盧循의 반란이 발발하였으며, 403년에는 楚王에 책봉된 大將軍 桓玄이 皇帝를 자칭하고, 司馬德宗을 폐하여 平固王(平固는 현재 江西省 贛州市 東)으로 삼고 그를 尋陽(江西省 九江市)으로 옮겨 살도록 명하여, 東晉 왕조가 중간에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군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토벌하자, 桓玄은 패하여 尋陽으로 도주하여 사마덕종을 끼고 강릉 일대(현재 湖北省 江陵縣)를 전전하였다. 404년에 桓玄의 군대가 패하고 환현이 피살되자, 안제는 비로소 복위할 수 있었다. 418년에 대장군 劉裕가 中書侍郞 王韶之에게 사마덕종의 좌우 시종을 매수하여 그를 제거하도록 밀명을 내렸고, 12월 형의 안전을 걱정하여 하루 종일 그를 시종하여 지키던 司馬德文이 병이나 휴양하는 틈을 타서, 戊寅日에 王韶之가 시종들을 지휘하여 사마덕종을 살해하였다. 향년 37歲였으며, 休平陵(현재 江蘇省 江寧縣의 蔣山)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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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范須達: 『晉書』 및 『宋書』에는 ‘須達’이 ‘胡達’로 되어있고, ‘팜 호 덧’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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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杜瑗: 도 비엔. 두원의 집안은 본디 지금의 시안 부근에 살던 중국인이었으나, 그의 조부가 寧浦郡의 태수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교지의 朱鳶縣에 정착했다. 당시 교주는 온방지의 뒤를 이어 朱輔가 자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자리는 잠시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자사가 없는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구진태수로 있던 현지인 리 똔[李遜]이었다. 그는 380년 자사가 새로 임명되어 부임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경쟁자였던 교지태수 두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晉書』 「本紀」에 따르면, 두원이 리 똔을 제거한 것은 효무제 태원 6년 즉 381년이다). 두원은 일남과 구덕의 태수를 역임하고 교지태수로 있다가 리 똔을 살해하고 신임자사를 맞이한 것이다(유인선, 2002: 62). 두원은 이 때의 공으로 龍驤將軍에 오르고, 본문에 보이는 것처럼 임읍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교주자사의 자리에 오른다. 交趾郡 朱鳶縣의 土豪 杜瑗이 交州刺史에 취임한 이래 5세기에는 그의 子와 孫인 杜慧度와 杜弘文이 交州 吏民들의 추대에 의해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전통 사서인 『大越史記全書』 外紀 3 「士王紀」에서는 이들 杜氏를 士王 즉 士燮의 후예로 기록하기도 하였다(後藤均平, 1973: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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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杜慧期: 『宋書』의 「良吏傳」에 따르면, 두혜기는 두원을 이어 교주자사에 추대된 杜慧度(도 뚜에 도)의 아우로 두원의 아들이다. 士燮 때 그러했던 것처럼, 당시의 교주는 두원의 두씨 집안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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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유인선은 두원이 죽은 뒤의 일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광주자사 盧循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 비엔[杜瑗]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도 비엔이 마침 고령으로 사망하고 아들 도 뚜에 도[杜慧度]가 주민들의 천거로 자사가 되자, 노순은 즉시 合浦를 점령하고 교주로 쳐들어 갔다. 교주 내에 리 똔[李遜]의 자손들이 호응한 까닭에 악전고투하였지만, 도 뚜에 도는 끝내 盧氏와 李氏 일가를 무너뜨리고 북쪽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것처럼 임읍이 다시 남쪽을 소란스럽게 하자, 420년대에 대대적인 정벌을 하여 임읍을 항복시키고, 그때까지 잃은 모든 것을 찾았다(유인선, 2002: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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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敵眞의 印度行은 흔히 임읍의 ‘힌두화’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힌두화’와 연결되어 설명된다. 石井米雄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다낭(Danang) 남쪽의 챠 끼에우(Tra Kieu)에서 출토된 古瓦 연구에 따르면, 2세기에서 4세기의 챠 끼에우 지역과 紅河 델타 士燮의 지배 지역에서는 매우 비슷한 中國式의 人面瓦가 출토된다고 한다. 范文이 양주 출신이라는 전설도 있고, 임읍의 도시문화는 베트남 중부 별도의 철기문화인 사휜 문화 위에 그 산품의 주된 시장인 중국문명이 중첩되어 있었다. 미손(Myson)에서는 바드라바르만의 이름을 가진 4세기 말 경에 만들어진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발견되고 있다. 范胡達의 것이라 생각된다. 또 중국 사료에 따르면, 범호달의 아들 적진은 나라를 버리고 天竺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미손의 비문에 따르면 강가 왕이라는 왕이 갠지스를 지나치게 연모한 나머지 인도에 가버렸다고 한다. 인도(힌두) 사상이 임읍의 왕들 사이에 점차 內在化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삽화이다. 동남아시아에 예를 들어 렌가 건축물 같은 비동남아시아적, 인도적인 건축물이 도입된 것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의 벵갈-안다만 해 연안에서 현저하며 또 옥에오(Oc Eo) 유물이 대표하는 것과 같이 2세기 이후로는 인도나 서방세계에서 나온 잡화가 다량으로 도입되었다. 또 그 연차를 알 수 없는 남베트남 출토의 보카인 비문, 또 중국사료에 산견되는 왕명에 산스크리트어가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인도적인 문명의 유입은 시스템적인 것은 아니었다. 산발적 개별적 도입에 지나지 않았다. 문자와 종교를 수반하는 인도 문명이 동남아시아 연해의 여러 도시에 도입된 것은 5∼6세기의 일이다.”(石井米雄, 1999: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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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范陽邁: 팜 드엉 마이(Pham Duong Mai) 2세. 한편으로 宋에 사신을 보내 입공하면서도, 교주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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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구달(區達, 범웅(范熊, , [범]일(逸, 성제(成帝), 범일, [범]문(文, , 범치(范稚), 범치, 범문, 강장(姜莊), 한집(韓戢), 사치(謝稚), 목제(穆帝), 하후람(夏侯覽), 하후람, 범문, 주번(朱藩), 유웅(劉雄), 범문, 범문, 주번, 주번, 주번, 도완(陶緩), 이구(李衢), 범문, 범문, 범불(范佛, 환온(桓溫), 등준(縢畯), 관수(灌邃), 범불, 관수, 등준, 범불, 관수, 범불, 애제(哀帝), 온방지(溫放之), 안제(安帝), 불(佛), 수달(須達), 경원(炅源), 조병(曹炳), 두원(杜瑗), 등일(鄧逸), 두원, 수달, 두혜기(杜慧期), 수달, 견지(甄知), 범건(范健), 수달, 염능(能), 두원, [범]수달(須達), 적진(敵眞), 적진, 적등(敵鐙), [범]적진, 장린(藏麟), 장린, 장린, [범]적등, 문적(文敵), 문적, 당근순(當根純), 범제농(范諸農), 제농(諸農), [범]양매(陽邁), 양매, 양매, 돌(咄), 양매
지명
, 서진, 일남군, 서권현(西捲縣), 일남군(日南郡), 일남군, 동진, 임읍, 일남(日南), 일남, 일남, 임읍, 일남, 구덕군(九德郡), 일남, 횡산(橫山), 임읍, 일남, 일남, 교주, 광주(廣州), 임읍, 임읍, 일남, 구덕군, 구진(九眞)군, 임읍, 일남, 구덕, 교주(交州), 천축(天竺), 유송(劉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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