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조공(朝貢)과 빙례(聘禮)가 지속됨
선제(宣帝)
주 001가 공손씨(公孫氏)를 평정하자주 002
각주 002)
여왕이 사신을 대방(帶方)에 파견하여 입조 알현하였다.주 003그 뒤 조공(朝貢)과 빙례(聘禮)가 끊이지 않았다. 문제(文帝)
주 004司馬懿는 遼東의 公孫氏를 멸망시키기 위해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출병하여 3년(239)에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에서 公孫氏란 公孫淵을 말한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 중국이 삼국정립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남방의 吳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의 사절인 장미·허안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오의 사자를 참수하여 그 목을 魏에 보냈다. 위는 삼국정립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봉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단교하지 않을 뿐더러 魏의 사자에 대한 태도가 공손치 않자 237년 위는 유주자사 毌丘儉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군대를 遼隧(遼寧省 營口縣 서쪽)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昭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북방에서 침입하고 238년에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정벌하니, 평양성에서 격파되었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대 50년간 요동에서 서북조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는 무너지고 위의 강력한 동방정책이 시행되게 되었다.
각주 004)
가 국상(國相)이었을 때에도 여러 번 조공을 보냈다.주 005文帝:司馬昭(211~265)를 말한다. 司馬昭는 字는 子上이며, 司馬懿의 次子이고 司馬師의 동생이며 晉 개국황제인 司馬炎의 아버지이다. 司馬昭는 司馬懿 사후 그 뒤를 이은 司馬師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魏의 국정을 담당하였다. 司馬昭가 國相, 즉 相國에 임명된 경위는 먼저 257년 鎭東大將軍 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하고 諸葛誕을 구원하러 온 孫吳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晉이 司馬昭를 晉公과 相國에 임명하려 했으나 고사하였다. 甘露 5년(260) 高貴鄕公 曹髦가 司馬昭를 치려다가 어이없게 피살되자 曹奐을 元帝로 추대하였다. 263년에는 鄧艾를 파견하여 蜀漢을 공격, 劉禪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마침내 264년 相國에 임명되고 晉王에 봉해졌으며 九錫이 내려졌다. 265년 司馬昭 사후 崇陽陵에 매장되었고 그의 아들 司馬炎이 魏를 대신하여 晉을 건국함에 따라 文帝로 推封되었고 廟號는 太祖가 되었다.
각주 005)
태시년간(泰始年間)주 006초에는 사자를 파견하여 중역(重譯)주 007하며 들어와 조공을 하였다.주 008
『魏志』 「倭人傳」에 따르면, 魏 齊王(曹芳) 正始 원년(240), 4년(243), 6년(245), 8년(247)에 위와 사신 왕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正始 원년의 기사가 『晉書』 「宣帝本紀」에는 “魏正始元年正月, 東倭重譯納貢”이라고 기록된 점이 특이한데, 『晉書』에 처음으로 ‘東倭’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東倭’는 야마타이국을 ‘왜’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나라를 ‘왜종’이라 하였는데, 『晉書』는 이것을 ‘東倭’라고 하여 九州의 倭와 구분하여 ‘동쪽의 왜’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司馬懿는 遼東의 公孫氏를 멸망시키기 위해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출병하여 3년(239)에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에서 公孫氏란 公孫淵을 말한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 중국이 삼국정립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남방의 吳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의 사절인 장미·허안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오의 사자를 참수하여 그 목을 魏에 보냈다. 위는 삼국정립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봉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단교하지 않을 뿐더러 魏의 사자에 대한 태도가 공손치 않자 237년 위는 유주자사 毌丘儉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군대를 遼隧(遼寧省 營口縣 서쪽)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昭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북방에서 침입하고 238년에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정벌하니, 평양성에서 격파되었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대 50년간 요동에서 서북조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는 무너지고 위의 강력한 동방정책이 시행되게 되었다.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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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文帝:司馬昭(211~265)를 말한다. 司馬昭는 字는 子上이며, 司馬懿의 次子이고 司馬師의 동생이며 晉 개국황제인 司馬炎의 아버지이다. 司馬昭는 司馬懿 사후 그 뒤를 이은 司馬師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魏의 국정을 담당하였다. 司馬昭가 國相, 즉 相國에 임명된 경위는 먼저 257년 鎭東大將軍 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하고 諸葛誕을 구원하러 온 孫吳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晉이 司馬昭를 晉公과 相國에 임명하려 했으나 고사하였다. 甘露 5년(260) 高貴鄕公 曹髦가 司馬昭를 치려다가 어이없게 피살되자 曹奐을 元帝로 추대하였다. 263년에는 鄧艾를 파견하여 蜀漢을 공격, 劉禪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마침내 264년 相國에 임명되고 晉王에 봉해졌으며 九錫이 내려졌다. 265년 司馬昭 사후 崇陽陵에 매장되었고 그의 아들 司馬炎이 魏를 대신하여 晉을 건국함에 따라 文帝로 推封되었고 廟號는 太祖가 되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선제(宣帝), 문제(文帝)
- 지명
- 대방(帶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