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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조공(朝貢)과 빙례(聘禮)가 지속됨

 
  • 국가왜(倭)
선제(宣帝)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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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帝:司馬懿(179~251)를 말하며 字는 仲達이다. 三國시대 曹操의 휘하에서 중용되어 조비가 위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으며 조비의 유언에 따라 明帝와 齊王을 보좌하여 위말 황실 인척인 曹爽과 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그의 업적으로는 蜀漢의 諸葛孔明을 五丈原에서 막아 그의 北進 시도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遼東을 정벌하여 遼東太守인 公孫淵을 멸망시켜 遼東을 魏의 영토에 귀속시켰다. 뒤에 그의 손자 司馬炎이 晉을 건국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때문에 晉 건국 후 高祖宣帝로 추존되었으며 司馬宣王이라고도 한다.

가 공손씨(公孫氏)를 평정하자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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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懿는 遼東의 公孫氏를 멸망시키기 위해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출병하여 3년(239)에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에서 公孫氏란 公孫淵을 말한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 중국이 삼국정립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남방의 吳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의 사절인 장미·허안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오의 사자를 참수하여 그 목을 魏에 보냈다. 위는 삼국정립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봉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단교하지 않을 뿐더러 魏의 사자에 대한 태도가 공손치 않자 237년 위는 유주자사 毌丘儉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군대를 遼隧(遼寧省 營口縣 서쪽)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昭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북방에서 침입하고 238년에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정벌하니, 평양성에서 격파되었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대 50년간 요동에서 서북조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는 무너지고 위의 강력한 동방정책이 시행되게 되었다.

여왕이 사신을 대방(帶方)에 파견하여 입조 알현하였다.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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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志』 「倭人傳」에는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라고 하여 景初 2년(238)에 大夫 難升米를 (대방)郡에 보내 입조를 청하였고 태수 유하가 이를 경사에 보고하였다고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 뒤 조공(朝貢)과 빙례(聘禮)가 끊이지 않았다. 문제(文帝)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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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帝:司馬昭(211~265)를 말한다. 司馬昭는 字는 子上이며, 司馬懿의 次子이고 司馬師의 동생이며 晉 개국황제인 司馬炎의 아버지이다. 司馬昭는 司馬懿 사후 그 뒤를 이은 司馬師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魏의 국정을 담당하였다. 司馬昭가 國相, 즉 相國에 임명된 경위는 먼저 257년 鎭東大將軍 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하고 諸葛誕을 구원하러 온 孫吳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晉이 司馬昭를 晉公과 相國에 임명하려 했으나 고사하였다. 甘露 5년(260) 高貴鄕公 曹髦가 司馬昭를 치려다가 어이없게 피살되자 曹奐을 元帝로 추대하였다. 263년에는 鄧艾를 파견하여 蜀漢을 공격, 劉禪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마침내 264년 相國에 임명되고 晉王에 봉해졌으며 九錫이 내려졌다. 265년 司馬昭 사후 崇陽陵에 매장되었고 그의 아들 司馬炎이 魏를 대신하여 晉을 건국함에 따라 文帝로 推封되었고 廟號는 太祖가 되었다.

가 국상(國相)이었을 때에도 여러 번 조공을 보냈다.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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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志』 「倭人傳」에 따르면, 魏 齊王(曹芳) 正始 원년(240), 4년(243), 6년(245), 8년(247)에 위와 사신 왕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正始 원년의 기사가 『晉書』 「宣帝本紀」에는 “魏正始元年正月, 東倭重譯納貢”이라고 기록된 점이 특이한데, 『晉書』에 처음으로 ‘東倭’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東倭’는 야마타이국을 ‘왜’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나라를 ‘왜종’이라 하였는데, 『晉書』는 이것을 ‘東倭’라고 하여 九州의 倭와 구분하여 ‘동쪽의 왜’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시년간(泰始年間)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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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始年間:西晉 開國皇帝인 司馬炎의 첫 번째 통치기간을 가리키는 年號로, 265년 12월부터 274년까지이다.

초에는 사자를 파견하여 중역(重譯)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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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譯:두 번에 걸쳐 통역을 해야만 대화가 가능한 먼 곳에서 중국에 조공하러 왔음을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尚書大傳』 권4에, “成王之時, 越裳重譯而來朝, 曰道路悠遠, 山川阻深, 恐使之不通, 故重三譯而朝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어 외교적 상투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漢書』 「平帝紀」의 “元始元年春正月, 越裳氏重譯獻白雉一, 黑雉二, 詔使三公以薦宗廟”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顏師古注는 “譯謂傳言也. 道路絶遠, 風俗殊隔, 故累譯而後乃通”이라고 하였다.

하며 들어와 조공을 하였다.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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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帝 이하의 기록은 『魏書』에 일부분 기록되어 있지만 泰始年間의 기록은 『晉書』에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다. 『晉書』 「武帝本紀」(55쪽)에 “(泰始 2년) 十一月己卯, 倭人來獻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 001
宣帝:司馬懿(179~251)를 말하며 字는 仲達이다. 三國시대 曹操의 휘하에서 중용되어 조비가 위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으며 조비의 유언에 따라 明帝와 齊王을 보좌하여 위말 황실 인척인 曹爽과 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그의 업적으로는 蜀漢의 諸葛孔明을 五丈原에서 막아 그의 北進 시도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遼東을 정벌하여 遼東太守인 公孫淵을 멸망시켜 遼東을 魏의 영토에 귀속시켰다. 뒤에 그의 손자 司馬炎이 晉을 건국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때문에 晉 건국 후 高祖宣帝로 추존되었으며 司馬宣王이라고도 한다.
주 002
司馬懿는 遼東의 公孫氏를 멸망시키기 위해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출병하여 3년(239)에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에서 公孫氏란 公孫淵을 말한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 중국이 삼국정립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남방의 吳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의 사절인 장미·허안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오의 사자를 참수하여 그 목을 魏에 보냈다. 위는 삼국정립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봉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단교하지 않을 뿐더러 魏의 사자에 대한 태도가 공손치 않자 237년 위는 유주자사 毌丘儉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군대를 遼隧(遼寧省 營口縣 서쪽)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昭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북방에서 침입하고 238년에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정벌하니, 평양성에서 격파되었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대 50년간 요동에서 서북조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는 무너지고 위의 강력한 동방정책이 시행되게 되었다.
주 003
『魏志』 「倭人傳」에는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라고 하여 景初 2년(238)에 大夫 難升米를 (대방)郡에 보내 입조를 청하였고 태수 유하가 이를 경사에 보고하였다고 상세히 전하고 있다.
주 004
文帝:司馬昭(211~265)를 말한다. 司馬昭는 字는 子上이며, 司馬懿의 次子이고 司馬師의 동생이며 晉 개국황제인 司馬炎의 아버지이다. 司馬昭는 司馬懿 사후 그 뒤를 이은 司馬師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魏의 국정을 담당하였다. 司馬昭가 國相, 즉 相國에 임명된 경위는 먼저 257년 鎭東大將軍 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하고 諸葛誕을 구원하러 온 孫吳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晉이 司馬昭를 晉公과 相國에 임명하려 했으나 고사하였다. 甘露 5년(260) 高貴鄕公 曹髦가 司馬昭를 치려다가 어이없게 피살되자 曹奐을 元帝로 추대하였다. 263년에는 鄧艾를 파견하여 蜀漢을 공격, 劉禪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마침내 264년 相國에 임명되고 晉王에 봉해졌으며 九錫이 내려졌다. 265년 司馬昭 사후 崇陽陵에 매장되었고 그의 아들 司馬炎이 魏를 대신하여 晉을 건국함에 따라 文帝로 推封되었고 廟號는 太祖가 되었다.
주 005
『魏志』 「倭人傳」에 따르면, 魏 齊王(曹芳) 正始 원년(240), 4년(243), 6년(245), 8년(247)에 위와 사신 왕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正始 원년의 기사가 『晉書』 「宣帝本紀」에는 “魏正始元年正月, 東倭重譯納貢”이라고 기록된 점이 특이한데, 『晉書』에 처음으로 ‘東倭’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東倭’는 야마타이국을 ‘왜’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나라를 ‘왜종’이라 하였는데, 『晉書』는 이것을 ‘東倭’라고 하여 九州의 倭와 구분하여 ‘동쪽의 왜’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006
泰始年間:西晉 開國皇帝인 司馬炎의 첫 번째 통치기간을 가리키는 年號로, 265년 12월부터 274년까지이다.
주 007
重譯:두 번에 걸쳐 통역을 해야만 대화가 가능한 먼 곳에서 중국에 조공하러 왔음을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尚書大傳』 권4에, “成王之時, 越裳重譯而來朝, 曰道路悠遠, 山川阻深, 恐使之不通, 故重三譯而朝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어 외교적 상투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漢書』 「平帝紀」의 “元始元年春正月, 越裳氏重譯獻白雉一, 黑雉二, 詔使三公以薦宗廟”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顏師古注는 “譯謂傳言也. 道路絶遠, 風俗殊隔, 故累譯而後乃通”이라고 하였다.
주 008
宣帝 이하의 기록은 『魏書』에 일부분 기록되어 있지만 泰始年間의 기록은 『晉書』에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다. 『晉書』 「武帝本紀」(55쪽)에 “(泰始 2년) 十一月己卯, 倭人來獻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
선제(宣帝) , 문제(文帝)
지명
대방(帶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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