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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옥문관에서 서역으로 들어가는 세갈래의 길

  • 국가
    서융(西戎)
서역의 여러 나라들은 한나라 초기에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열렸을 때 36개가 있었지만 후에는 50여개로 나뉘어졌다. 건무(建武) 연간(25~56) 이래로 다시 서로 병탄하여 지금에 이르러 20개가 되었다. 길은주 001
각주 001)
道從燉煌玉門關入西域: 中華書局 表點本은 ‘道’를 앞의 구절에 연결하고, ‘從’과 떼어놓은 것은 誤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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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옥문관에서 서역으로 들어가는데, 과거에는 2개의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3개의 길이 있다.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나선 뒤 약강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총령(葱領)을 넘고 현도(縣度) 주 002
각주 002)
縣度: 『漢書』 「西域傳」 烏秅國條에서 顔師古는 縣度에 대해 “끈을 달아서 건너간다는 뜻이며, 縣은 懸의 古字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漢書』에 의하면 이곳은 “陽關에서 5, 888 떨어져 있고, 西域都護의 治所까지는 5, 020리 떨어져 있다. 縣度라 함은 石山을 가리키는데, 지나갈 수 없는 협곡이어서 사람들이 끈으로 서로를 끌면서 건너간다.”고 한다. 현재 新疆 서남부 사릭콜에서 파키스탄·인도·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파미르 산중의 峽谷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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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경유하여 대월지(大月氏)에 들어가니, 이것이 남도(南道)가 된다.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나선 뒤 도호정(都護井)주 003
각주 003)
都護井: 『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卑踶候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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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고 삼롱사(三隴沙)주 004
각주 004)
三隴沙: 『太平御覽』 卷74에는 “流沙는 玉門關 밖에 있으며, 南北 2천리 東西 수백리에 이르며, 세 군데 斷崖가 있는데, 이를 三隴이라고 부른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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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쪽 끝을 돌아 거로창(居盧倉)주 005
각주 005)
居廬倉: 거로창은 鄯善國의 수도 즉 伊循城 부근에 두어진 屯田에서 수확된 곡식을 쌓아두는 倉庫였고, 서역을 출입하는 漢의 使臣이나 軍隊를 위한 곡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1930~34年에 西北科學考察團이 롭 노르를 조사할 당시 居廬倉 遺址로 보이는 폐허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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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경유한 뒤, 사서정(沙西井)주 006
각주 006)
沙西井: 位置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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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부터는 서북쪽으로 향해서 가다가 용퇴(龍堆)주 007
각주 007)
龍堆: 白龍堆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漢書』 「匈奴傳下」에는 “白龍堆는 그 모양이 마치 土龍의 몸체와 같고, 머리는 없고 꼬리만 있으며, 크고 높은 것은 2~3척, 낮은 것은 1척 남짓이며, 모두 東北向으로 비슷하고, 西域에 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것은 鹽澤 즉 롭 노르 부근 동북부에 있는 거대한 砂丘群을 가리키며 현지 주민들은 yardang이라고 부른다. 이에 관해서는 嶋崎昌(1977: 429~466)의 「白龍堆考」가 가장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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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나면 옛 누란(樓蘭)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 서쪽으로 향하여 구자(龜茲)에 이르고 총령에 도달하게 되니, 이것이 중도(中道)가 된다.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나선 뒤 횡갱(橫坑)을 경유하고 삼룡사와 용퇴를 피해가면 오선(五船) 주 008
각주 008)
五船: 일찍이 徐松은 『西域水道記』에서 五船이 哈密 일대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松田壽男 역시 ‘五船은 의심할 나위 없이 伊吾’라고 주장하여 哈密說을 지지했다. 최근의 한 연구는 玄奘의 傳記인 『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玉門關을 나서서 伊吾의 경계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게 되는 ‘五峰’에 관한 언급에 주목하고, 이 五峰은 곧 驛傳 혹은 驛站이 있었던 것이어서 ‘五傳’이라고 불리웠던 곳인데 이 五傳이 음성상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五船으로 假借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西域傳」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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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쪽으로 나가게 되며, 거사(車師)의 경계에 있는 무기교위(戊己校尉)주 009
각주 009)
戊己校尉: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고 휘하에 丞·司馬 各1인, 候5인이 있었다. 戊己校尉를 설치한 목적은 車師前王庭의 屯田을 위해서였다. 戊己校尉를 둘러싼 학계의 복잡한 논의에 관해서는 『漢書』 「西域傳」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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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치소 고창(高昌)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 서쪽으로 향하면 구자에서 중도와 만나게 되니, 이것이 신도(新道)가 된다. 대저 서역의 산물에 대해서는 과거의 사서에 이미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제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설명하겠다.

  • 각주 001)
    道從燉煌玉門關入西域: 中華書局 表點本은 ‘道’를 앞의 구절에 연결하고, ‘從’과 떼어놓은 것은 誤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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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縣度: 『漢書』 「西域傳」 烏秅國條에서 顔師古는 縣度에 대해 “끈을 달아서 건너간다는 뜻이며, 縣은 懸의 古字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漢書』에 의하면 이곳은 “陽關에서 5, 888 떨어져 있고, 西域都護의 治所까지는 5, 020리 떨어져 있다. 縣度라 함은 石山을 가리키는데, 지나갈 수 없는 협곡이어서 사람들이 끈으로 서로를 끌면서 건너간다.”고 한다. 현재 新疆 서남부 사릭콜에서 파키스탄·인도·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파미르 산중의 峽谷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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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都護井: 『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卑踶候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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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三隴沙: 『太平御覽』 卷74에는 “流沙는 玉門關 밖에 있으며, 南北 2천리 東西 수백리에 이르며, 세 군데 斷崖가 있는데, 이를 三隴이라고 부른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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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居廬倉: 거로창은 鄯善國의 수도 즉 伊循城 부근에 두어진 屯田에서 수확된 곡식을 쌓아두는 倉庫였고, 서역을 출입하는 漢의 使臣이나 軍隊를 위한 곡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1930~34年에 西北科學考察團이 롭 노르를 조사할 당시 居廬倉 遺址로 보이는 폐허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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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沙西井: 位置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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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龍堆: 白龍堆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漢書』 「匈奴傳下」에는 “白龍堆는 그 모양이 마치 土龍의 몸체와 같고, 머리는 없고 꼬리만 있으며, 크고 높은 것은 2~3척, 낮은 것은 1척 남짓이며, 모두 東北向으로 비슷하고, 西域에 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것은 鹽澤 즉 롭 노르 부근 동북부에 있는 거대한 砂丘群을 가리키며 현지 주민들은 yardang이라고 부른다. 이에 관해서는 嶋崎昌(1977: 429~466)의 「白龍堆考」가 가장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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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五船: 일찍이 徐松은 『西域水道記』에서 五船이 哈密 일대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松田壽男 역시 ‘五船은 의심할 나위 없이 伊吾’라고 주장하여 哈密說을 지지했다. 최근의 한 연구는 玄奘의 傳記인 『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玉門關을 나서서 伊吾의 경계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게 되는 ‘五峰’에 관한 언급에 주목하고, 이 五峰은 곧 驛傳 혹은 驛站이 있었던 것이어서 ‘五傳’이라고 불리웠던 곳인데 이 五傳이 음성상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五船으로 假借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西域傳」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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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戊己校尉: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고 휘하에 丞·司馬 各1인, 候5인이 있었다. 戊己校尉를 설치한 목적은 車師前王庭의 屯田을 위해서였다. 戊己校尉를 둘러싼 학계의 복잡한 논의에 관해서는 『漢書』 「西域傳」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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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한나라, 돈황, 총령(葱領), 현도(縣度), 대월지(大月氏), 누란(樓蘭), 구자(龜茲), 총령, 오선(五船), 거사(車師), 고창(高昌), 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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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옥문관에서 서역으로 들어가는 세갈래의 길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