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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한, 흉노, 선비, 오환의 관계를 설명함

서[경](書經)』에는 “만이(蠻夷)가 중국(夏)을 어지럽혔다.”주 001
각주 001)
書:『書經』, 즉 『尙書』를 가리킨다. 원문은 『尙書』 舜典의 기록이다(『尚書』 「虞書 舜典」, “蠻夷猾夏, 寇賊姦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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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기재되어 있고, 『시[경](詩經)』에서는 “험윤(玁狁)이 대단히 번성하였다.”주 002
각주 002)
詩:『詩經』을 가리킨다. ‘玁狁孔熾’는 『詩經』 「小雅」에 기재되어 있다(『詩經』 「小雅 南有嘉魚之什」, “六月棲棲, 戎車既飭, 四牡騤騤, 載是常服, 玁狁孔熾, 我是用急, 王于出征, 以匡王國.”). 『史記』 「匈奴列傳」에서는 獫狁이 匈奴의 선조라고 기록하였다(『史記』 卷110, 「匈奴列傳」:2879, “匈奴, 其先朝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 居于北蠻, 隨畜牧而轉移.”). 玁狁은 獫狁으로도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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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였다. 오래되었구나! 그들이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지가. 진(秦)나라한(漢)나라 이후에 흉노(匈奴)주 003
각주 003)
匈奴:秦漢時代 몽골고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漢나라와 병립하며 발전하다가 내분으로 인해 기원후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匈奴 대책 결과 일부 세력은 몽골 초원에서 주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때 또 다른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왔는데 南匈奴라 불리는 이 집단은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하였다. 西晉이 八王의 亂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하여 漢(前趙)를 세우고 懷帝와 愍帝를 사로잡아 西晉을 멸망시켰다. 匈奴와 훈이 同族이라는 설이 유럽과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유행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흉노를 민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의 인위적 연합조직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사와다 이사오, 2007:25~26;21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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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오랫동안 [중국 북쪽] 변경의 해악(害惡)이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주 004
각주 004)
孝武帝:前漢 武帝(전156~전87;재위 전141~전87)를 지칭한다. 武帝의 이름은 徹이며, 景帝의 아들이다. 膠東王에 봉해졌다가 7세에 皇太子가 되었다. 景帝 後元 3년(전141)에 즉위하였다.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여 主父偃의 건의대로 推恩令을 실시하여 諸候王의 자제를 列候로 봉하고 諸侯王國의 일부를 떼어내어 侯國으로 삼아 諸候王國을 약화시켰다. 左官律을 제정하고 附益之法을 만들어 諸侯王이 租稅만을 수취하고 政事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鼎 5년(전112)에 酎金令을 실시하여 列侯가 바친 金의 성분이 열악하면 列侯의 작위를 박탈하였다. 또 13部刺史를 통해 郡國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元朔 2년(전127)부터 元狩 4년(전119)까지 衛靑·霍去病을 파견하여 匈奴를 공격하였고, 張鶱을 西域으로 보내 西域과 通交하였다. 閩越·西南夷·朝鮮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정식 察擧제도를 만들어 지방에서 孝廉·秀才·賢良方正을 천거하게 하였고, 五經博士와 博士弟子員을 두었으며 長安에 太學을 설치하였다. 말년에 匈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농민봉기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征和 4년(전89) 輪臺의 屯田을 罷하라는 조서를 내려 租稅징수를 경감하고 農桑에 힘쓸 것임을 천명하였다. 임종 전에 8세인 劉弗陵을 太子로 삼아 霍光 등에게 輔政하도록 遺詔를 내렸다. 廟號는 世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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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비록 밖으로 사이(四夷)[의 경영]에 힘을 쏟아서, 동쪽으로는 양월(兩越)주 005
각주 005)
兩越:東越과 南越을 가리킨다. 東越은 閩越이라고도 하며, 秦漢時代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거주하였다. 『史記』 卷114 「東越列傳」에 따르면, 閩越王은 春秋時代 越王 句踐의 후예라고 한다. 秦始皇이 閩越을 정복하고 閩中郡으로 만들었는데, 漢初 無諸가 王이 되어 東冶(현재 福建省 福州市)에 도읍을 정하였다. 惠帝시기 東海王에 봉해지고 東甌(현재 浙江省 동남쪽 甌江의 永嘉縣 일대)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때문에 東甌王으로도 불렸다. 前漢 武帝는 元鼎 6년(전111)에 樓船將軍 楊僕 등을 보내 閩越을 정복하였고, 백성들을 江淮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南越은 秦末 趙佗가 세운 나라이며, 南海郡·桂林郡·象郡 등을 지배하였다. 현재의 湖南省 남부와 廣東省·廣西省 전부, 베트남 북부를 지배하였다. 趙佗는 南越의 武帝를 자칭하였다. 베트남의 최초의 王朝로 간주되는 南越은 漢武帝가 보낸 군대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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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주 006
각주 006)
朝鮮:遼河 유역과 韓半島 서북지방을 지배했던 나라이며 李氏朝鮮과 구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부른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 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전 7세기 초이다.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王이라 칭할 때, 朝鮮은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王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朝鮮은 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내로 쳐들어와 遼東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 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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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평정하였고, 서쪽으로는 이사(貳師) 주 007
각주 007)
貳師:大宛國의 貳師城을 지칭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수트리쉬나(Sutrishna) 혹은 우스루쉬나(Usrushna)라고 부른다. 『隋書』에서는 “蘇對沙那”, 『新唐書』에서는 “堵利瑟那” 혹은 “東曹”·“率都沙那”·“蘇對沙那” 등으로 표기하였다. 唐代에는 또 來威國이라고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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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완(大宛) 주 008
각주 008)
大宛:고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파미르고원 서쪽 기슭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페르가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으로는 康居, 서남으로는 大月氏·大夏, 동북으로는 烏孫과 접해 있었다. 貴山이 都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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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토벌하였으며, [서남쪽으로는] 공(邛), 주 009
각주 009)
邛:四川省 남부에 있었던 이민족, 혹은 그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前漢 武帝시기 漢나라 군대에 점령된 후 그들의 나라에 邛都라는 縣이 설치되었다. 邛都는 현재의 四川省 서쪽 雅礱江과 金沙江 사이에 위치한 昌縣 일대에 해당한다. 후에 越嶲郡의 治所가 되었다. 中華書局本標點校勘本에서는 ‘邛莋’을 하나의 이민족 혹은 국가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邛과 莋이 별도의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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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苲), 주 010
각주 010)
莋:四川省 서남부에 위치한 이민족, 혹은 이들이 세운 나라를 지칭한다. 前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 莋都夷의 땅에 莋都縣을 설치하였고, 沈黎郡의 治所가 되었다. 治所는 현재의 四川省 漢源縣 동북쪽이다. 天漢 4년(전97)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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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랑(夜郞) 주 011
각주 011)
夜郞:현재의 貴州省 일대에 있던 이민족, 혹은 이들의 세운 나라이다. 先秦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戰國時代에는 西南夷의 大國이 되었다. 정치의 중심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貴州의 서쪽, 북쪽, 남쪽의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영토는 현재의 貴州省 대부분과 雲南省 동북부, 四川省 남부, 廣西省 서북부에 해당하였다. 漢初 南越·巴蜀과 무역관계를 맺었다. 武帝 建元 6년(전135)에 唐蒙이 夜郞의 땅에 이르러 利를 미끼로 郡縣을 설치하기로 약속하여 드디어 漢 犍爲郡의 屬縣이 되었다. 元鼎 6년(전111)에 夜郞의 땅에 牂柯郡이 설치되어 200여 년간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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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지만, [그들은] 모두 황복(荒服)주 012
각주 012)
荒服:五服 가운데 가장 변두리에 있는 구역을 지칭한다.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서 비유적으로 化外의 蠻夷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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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밖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하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흉노는 제하(諸夏)주 013
각주 013)
諸夏:古代 문헌에서 中國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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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장 핍박하였으며, 흉노의 기병대[胡騎]가 남침하면 세 방향의 변경[三邊]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였다. 이 때문에 [효무제는] 여러 차례 위[청](衛靑) 주 014
각주 014)
衛靑(?~전106):前漢시대 河東郡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仲卿이다. 본래 平陽公主의 家奴였으나, 누이가 武帝의 皇后가 된 뒤 중용되어 벼슬이 大將軍에 이르고 長平侯에 봉해졌다. 元朔 2년(전127)에 匈奴 白羊王과 樓煩王을 大破하고 河套(현재의 內蒙古自治區의 오르도스 지역)를 정복하고 朔方郡과 五原郡을 설치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匈奴의 주력을 격파하는 등 전후 7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漢의 북방을 안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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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霍去病) 주 015
각주 015)
霍去病(?~전117):전한시대 河東郡 平陽縣(현재 山西省 臨汾縣 서남) 사람이며, 武帝 衛皇后의 조카이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고 驃姚校尉가 되어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수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元狩 2년(전121)에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에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 休屠王의 祭天金人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 다시 北地郡에서 출발하여 居延을 지나 공격하니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代郡을 출발하여 漠北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공이 높아 大司馬에 加해졌으며, 秩祿은 大將軍 衛靑보다 많았다. 武帝의 총애를 얻었다. 諡號는 景桓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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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장군을 파견하여, 북쪽으로 깊이 쳐들어가서 [흉노를] 정벌하였으며, 선우(單于)주 016
각주 016)
單于:음은 선우이고 匈奴 君主의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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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부유한 땅을 빼앗았다. 후에 마침내 [중국] 변경의 요새를 지키면서 [중국왕조에] 번(藩)이라 칭한 이후, 대대로 쇠약하게 되었다. [헌제(獻帝)]건안(建安)년간(196~220)에 호주천(呼廚泉)이라는 남흉노의 선우[南單于]주 017
각주 017)
呼廚泉(재위 195~216):南匈奴의 제21대 마지막 單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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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입조(入朝)한 후, 마침내 [중국에] 머무르면서 [궁궐 안에서 황제를] 모시게 되자, [후한 조정은] 우현왕(右賢王)에게 그 나라를 진무(鎭撫)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흉노는 그 절조(節操)를 꺾[어 한나라를 섬긴] 것이 [흉노가 전한(前漢)시대에 했던 것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환(烏丸)주 018
각주 018)
烏丸:‘烏桓’으로도 쓴다.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동부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지파이다. 동호는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 상태에 이른다. 이때 살아남은 동호의 일부 部衆이 烏丸山(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가는데, 手工業과 粗放農業도 함께 영위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貢物로 匈奴에게 바쳤다. 만약 공납 기일을 넘기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을 때에는 오환인의 처와 자식들이 몰수되어 흉노의 노비로 되었다. 전한 武帝는 전119년에 霍去病에게 흉노의 동부 지구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昭烏達盟 일대에 거주하던 烏桓의 일단이 이 때 降附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전한의 上谷郡과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郡의 塞外로 徙民되었다. 이들은 후한 초(49)에는 그 塞內로 들어가서 上谷郡,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屬國, 廣陽郡, 代郡, 雁門郡, 太原郡, 朔方郡 등에 분포하였다. 전한 武帝의 치세에 처음으로 이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그러나 후한 光武帝 建武 25년(49)에 다시 上谷郡 寧城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賞賜, 質子 그리고 互市 등의 업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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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선비(鮮卑)주 019
각주 019)
鮮卑:烏丸과 함께 東胡의 한 支派이다. 전 3세기 초에 東胡가 匈奴 冒頓單于에게 격파되어 해체됨에 따라 鮮卑와 烏桓은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前漢 武帝가 군대를 파견하여 匈奴의 東部를 격파함에 따라 鮮卑의 일부는 遼河의 서쪽 지류의 하나인 西剌木倫(Siramuren) 강 유역의 烏桓의 옛 遊地로 南下하였다. 89년에 北匈奴가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後漢을 비롯하여 사방의 여러 세력의 攻勢를 견디지 못하여 서방으로 이동한 후에 鮮卑는 점차 北匈奴의 故地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鮮卑는 그곳에 남아 있던 北匈奴 10餘萬 落(戶)을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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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점차 더욱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기의 내란 때문에 중국에는 사건이 많아져서, 밖으로 [이민족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오환과 선비가] 막남(漠南) 지역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읍(城邑)에 쳐들어와서 난폭하게 굴고 인민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니, [중국의] 북방 변경은 여전히 그들 때문에 곤경에 처해졌다. 원소(袁紹) 주 020
각주 020)
袁紹(?~202):後漢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아들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初平 5년(188)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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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河北)을 점령한 후에주 021
각주 021)
당시 袁紹는 冀州·幷州·幽州·靑州 4州를 지배하였는데, 그 영역은 현재의 河北省·山西省·遼寧省·北京市·天津市 전부와 山東省 북부와 동부, 河南省 북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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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오환(三郡烏丸)주 022
각주 022)
三郡烏丸:『資治通鑑』의 胡三省注에 따르면 三郡烏丸은 大人 蹋頓이 이끄는 遼西烏丸과 蘇僕延이 이끄는 遼東烏丸, 烏延이 이끄는 右北平烏丸을 지칭한다(『資治通鑑』 卷64 「漢紀」 〈獻帝建安10年條〉:2061에는 “故安趙犢·霍奴等殺幽州刺史及涿郡太守, 三郡烏桓攻鮮于輔於獷平.”이라는 기록에 “三郡烏桓, 遼西蹋頓·遼東蘇僕延·右北平烏延也.”라는 胡三省의 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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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구슬려 지배하였으며, 오환의 명성이 높은 우두머리들[名王]을 총애하면서 그들의 정예 기병[精騎]을 확보하였다. 그 후에 [원]상(袁尙) 주 023
각주 023)
袁尙(?~207):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曹操에게 패한 袁譚에게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도리어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郡烏丸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조조에게 수급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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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袁熙) 주 024
각주 024)
袁熙(?~207):袁紹의 둘째 아들이다. 후에 幽州刺史가 되었다. 袁尙이 冀州를 빼앗긴 후 蹋頓에게 도망갔다가 후에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했으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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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또 답돈(蹋頓)에게 도망쳤다. 답돈은 날래기도 하고 용맹하였기 때문에 변경 지대의 장로(長老)들은 모두 그를 [흉노의] 묵특 [선우](冒頓單于) 주 025
각주 025)
冒顿(?~전174년;재위 전209~전174):흉노의 두번 째 單于이다. 冒頓의 의미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로 영웅을 지칭하는 바가투르(baghatur) 혹은 몽골어의 神聖을 지칭하는 보구드(boghud)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전209년에 아버지인 匈奴의 초대 頭曼單于를 살해하고 스스로 單于가 되었다. 이후 내정을 정비한 다음 東胡와 月氏 등 주변 부족을 격파하고 오르도스의 樓煩과 白羊 등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秦나라가 확보했던 河南 지역을 다시 차지하는 등 세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나아가 북방의 예니세이강 상류의 丁零과 서북방의 堅昆 등도 복속시켰다. 이를 통해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漢나라와 싸워 이긴 이후에 화친을 통해 더욱 세력을 확대하는 등 匈奴帝國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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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견주었다. [답돈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감히 망명자주 026
각주 026)
원문은 “亡命”인데, 중국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호적에서 이탈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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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받아들였으며, 모든 이민족[百蠻]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태조(太祖) 주 027
각주 027)
太祖:魏王 曹操를 가리킨다. 曹操(155~220)는 沛國 譙縣 사람이다. 字는 孟德이며, 太尉 曹嵩의 아들이다. 孝廉에 천거되어 洛陽北部尉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後漢末 군웅할거를 평정하여 華北을 통일하였다. 丞相을 거쳐 魏公, 魏王이 되었으나 찬탈하지 않았다. 저서에는 『孫子略解』·『兵法接要』가 있고, 그의 詩歌를 모아 편찬한 『魏武帝集』이 있었으나 散佚되고 후세 사람이 『曹操集』을 輯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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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북벌(北伐)하였는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아가[기습하여], 한 차례의 전투로 그들을 평정하였다. 이에 이적(夷狄)이 두려워서 복종하므로, [태조의] 위세가 삭토(朔土)에 떨쳤다.
[태조는] 마침내 오환(烏丸)의 부중(部衆)을 이끌고 [그들을] 중국의 정벌과 토벌에 종군하도록 하니 [중국]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쉴 수 있었다. 후에 선비(鮮卑)의 대인(大人)주 028
각주 028)
大人:鮮卑와 烏丸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한 부족의 우두머리나 부족연합체 전체의 우두머리 모두 大人이라 불렀다 (金浩東, 1993: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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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능(軻比能)이 다시 여러 북방의 이민족들[羣狄]을 제압하고 다스렸는데, [그는] 흉노(匈奴)의 고지(故地)를 모두 거두어 들였으니, [서쪽으로는] 운중[군](雲中郡) 주 029
각주 029)
雲中郡:전국시대의 趙 武靈王(재위 전325~전298)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치소는 雲中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동북쪽)이었다. 王莽이 受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雲中郡으로 바뀌었나 幷州(치소는 晉陽縣이며 지금의 山西省 太原市 서남부의 古城營)의 屬郡이었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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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군](五原郡) 주 030
각주 030)
五原郡:朔方郡과 함께 전한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匈奴를 격파하고 오르도스(Ordos, 河套)지방을 전한이 차지하면서 그곳에 郡縣으로 설치되었다. 五原郡은 본래 秦의 九原郡 지역이었는데, 전210년에 秦始皇이 죽은 후, 진이 멸망하면서 匈奴가 점령했던 곳이다. 치소는 九原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서북쪽)이었다. 王莽이 獲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五原郡으로 복원하였다. 후한 초기에 南匈奴의 䤈落尸逐鞮單于(呼韓邪單于, 재위 48~56) 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였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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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동쪽으로는 요수(遼水) 주 031
각주 031)
遼水:현재의 遼河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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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 대인의 정(庭)이 되었다. [선비는] 자주 변경의 요새를 침범하여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는데, 유[주](幽州) 주 032
각주 032)
幽州:前漢 13 刺史部의 하나였으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後漢時代 감찰구역에서 지방의 최고행정구역으로 바뀐 후 薊縣(현재 北京城 서남쪽 모퉁이)에 治所를 두었다. 後漢時代의 관할구역은 서쪽으로 오늘날 山西省 陽高縣, 남쪽은 대략 戰國 燕의 남쪽 경계, 북쪽은 현재 河北省 承德市와 遼寧省 建昌縣 이북, 동쪽으로는 遼寧省 寬甸縣과 撫順市 以東 지역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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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幷州) 주 033
각주 033)
幷州:前漢 武帝 시기에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太原·上黨·雲中·定襄·雁門·代郡 등 6郡을 관할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대부분과 河北省 및 內蒙古의 일부에 해당하였다. 後漢時代 治所를 晉陽縣(隋代 太原縣으로 개칭, 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 古城營)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西河·五原·朔方·上郡을 더 거느리게 되었고, 代郡은 거의 관계하지 않았다. 이 당시 관할구역은 山西省 대부분과 陝西省 북부, 內蒙古 自治區 狼山·陰山 이남 지역에 해당하였다. 後漢末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建安 18년(213)에 冀州에 합병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관할구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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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전예(田豫) 주 034
각주 034)
田豫:三國時代 漁陽郡 雍奴縣(현재 天津市 武淸縣 동북) 사람이며, 字는 國讓이다. 後漢末 公孫瓚의 부하가 되었다. 公孫瓚이 패한 후 曹操에 항복하여 丞相軍謀掾에 임명되었다. 후에 弋陽太守로 전임하였다. 曹彰을 도와 代郡을 공격하여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南陽太守로 임명되었다. 曹魏 文帝시기 使持節 護烏丸校尉가 되어 鮮卑 軻比能部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太和 6년(232)에 汝南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靑州의 군대를 이끌고 해로로 遼東郡의 公孫淵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成山(현재 山東省 榮成市)에서 吳나라가 遼東에 파견한 사자를 죽였다. 正始初에 使持節 護匈奴中郞將 幷州刺史가 되어 州의 경계를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衛尉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와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82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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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현](馬城縣) 주 035
각주 035)
馬城縣:代郡의 屬縣이다. 前漢時代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현재 河北省 懷安縣 서쪽이다. 代郡 東部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末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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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선비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고주 036
각주 036)
曹魏 文帝 초기에 田豫가 鮮卑를 공격했다가 포위된 사건을 가리킨다(『三國志·魏書』 권26 「田豫傳」: 727, “豫乃進軍, 去虜十餘里結屯營, 多聚牛馬糞然之, 從他道引去. 胡見烟火不絕, 以為尚在, 去, 行數十里乃知之. 追豫到馬城, 圍之十重, 豫密嚴, 使司馬建旌旗, 鳴鼓吹, 將步騎從南門出, 胡人皆屬目往赴之. 豫將精銳自北門出, 鼓譟而起, 兩頭俱發, 出虜不意, 虜衆散亂, 皆棄弓馬步走, 追討二十餘里, 僵尸蔽地.”). 본문 「鮮卑傳」에는 이 사건을 太和 2년(228)에 발생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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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궤(畢軌) 주 037
각주 037)
畢軌(?~249):三國時代 東平縣(현재 山東省 東平縣 동쪽) 사람이며, 字는 昭先이다. 젊어서 명성이 있었으며, 三國 魏 黃初末에 출사하여 長吏가 되었다. 明帝시기에는 黃門侍郞이 되었고, 아들은 公主와 결혼하였다. 후에 幷州刺史로 승진하였다. 靑龍元年(233)에 군대를 이끌고 鮮卑의 軻比能을 습격하여 樓煩(현재 山西省 寧武縣)에서 패하였다. 또 浮華를 이유로 免官되었다. 正始년간에 中護軍, 侍中尙書, 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丁謐 등과 함께 曹爽에게 司馬懿를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正始 10년(249)에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曹爽을 살해할 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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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북(陘北) 주 038
각주 038)
陘北:雁門 以北을 지칭한다. 陘은 陘嶺, 즉 句注山(雁門山이라고도 함)을 지칭한다. 현재 山西省 代縣 북쪽에 있었다. 역대로 북방을 방어하는 중요한 屛障이었다. 雁門 이남을 陘南, 雁門 이북을 陘北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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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선비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명제(明帝)] 청룡(靑龍)년간(233~237)에 황제는 마침내 왕웅(王雄)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검객을 파견하여 [가비능을] 척살(刺殺)하였다. 그 후 [선비] 종족들과 부락들은 떨어져 나가고 흩어졌으며, 서로 습격하고 공격하니, 강자(强者)는 [중국에서] 멀리 달아나서 숨었고, 약자(弱者)는 [중국에] 항복을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의] 변경지대는 점차 평안하게 되었고, 막남(漠南)에서는 사변(事變)이 적게 되었다. 비록 때로는 자못 노략질과 도둑질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는 [선비 부락] 서로가 선동할 수는 없었다.
오환과 선비는 옛날의 소위 동호(東胡)주 039
각주 039)
東胡:고대 종족 혹은 나라의 명칭이다. 이들은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렸다. 東胡 사람들은 長城 동북의 광활한 지역에 거주하였고 목축업에 주로 종사하였다. 春秋戰國時代에 남쪽으로 燕과 접했다. 후에 燕에 패배해 북쪽의 遼水 상류지역으로 이주했다. 東胡는 秦나라 말기에 다시 강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배하여 그 대부분이 匈奴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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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들(오환과 선비)의 습속과 이전의 사건은 대(漢代)의 기사(記事)를 편찬한 사람이 이미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단지 후한 말기와 삼국 초기 이래의 사건만을 열거하여 사이(四夷)의 변화에 대비하고자 한다.[배송지주]주 040
각주 040)
『三國志』의 注는 『史記』·『漢書』·『後漢書』의 音註와는 달리 『三國志』 원문에 없는 원사료를 제시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三國志』의 裴松之注는 字句 해석 등 訓詁的인 설명 위주의 기존 주석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佚書들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裴松之注가 인용한 자료는 모두 수미완결되고, 자료의 출처가 분명하다(高國抗, 1998:259~260). 그러므로 해제에서 밝혔듯이 이 배송지의 주도 역주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이를 “[배송지주]”로 표기하여 陳壽의 『三國志』 원문과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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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書:『書經』, 즉 『尙書』를 가리킨다. 원문은 『尙書』 舜典의 기록이다(『尚書』 「虞書 舜典」, “蠻夷猾夏, 寇賊姦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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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詩:『詩經』을 가리킨다. ‘玁狁孔熾’는 『詩經』 「小雅」에 기재되어 있다(『詩經』 「小雅 南有嘉魚之什」, “六月棲棲, 戎車既飭, 四牡騤騤, 載是常服, 玁狁孔熾, 我是用急, 王于出征, 以匡王國.”). 『史記』 「匈奴列傳」에서는 獫狁이 匈奴의 선조라고 기록하였다(『史記』 卷110, 「匈奴列傳」:2879, “匈奴, 其先朝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 居于北蠻, 隨畜牧而轉移.”). 玁狁은 獫狁으로도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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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匈奴:秦漢時代 몽골고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漢나라와 병립하며 발전하다가 내분으로 인해 기원후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匈奴 대책 결과 일부 세력은 몽골 초원에서 주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때 또 다른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왔는데 南匈奴라 불리는 이 집단은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하였다. 西晉이 八王의 亂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하여 漢(前趙)를 세우고 懷帝와 愍帝를 사로잡아 西晉을 멸망시켰다. 匈奴와 훈이 同族이라는 설이 유럽과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유행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흉노를 민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의 인위적 연합조직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사와다 이사오, 2007:25~26;21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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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孝武帝:前漢 武帝(전156~전87;재위 전141~전87)를 지칭한다. 武帝의 이름은 徹이며, 景帝의 아들이다. 膠東王에 봉해졌다가 7세에 皇太子가 되었다. 景帝 後元 3년(전141)에 즉위하였다.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여 主父偃의 건의대로 推恩令을 실시하여 諸候王의 자제를 列候로 봉하고 諸侯王國의 일부를 떼어내어 侯國으로 삼아 諸候王國을 약화시켰다. 左官律을 제정하고 附益之法을 만들어 諸侯王이 租稅만을 수취하고 政事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鼎 5년(전112)에 酎金令을 실시하여 列侯가 바친 金의 성분이 열악하면 列侯의 작위를 박탈하였다. 또 13部刺史를 통해 郡國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元朔 2년(전127)부터 元狩 4년(전119)까지 衛靑·霍去病을 파견하여 匈奴를 공격하였고, 張鶱을 西域으로 보내 西域과 通交하였다. 閩越·西南夷·朝鮮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정식 察擧제도를 만들어 지방에서 孝廉·秀才·賢良方正을 천거하게 하였고, 五經博士와 博士弟子員을 두었으며 長安에 太學을 설치하였다. 말년에 匈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농민봉기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征和 4년(전89) 輪臺의 屯田을 罷하라는 조서를 내려 租稅징수를 경감하고 農桑에 힘쓸 것임을 천명하였다. 임종 전에 8세인 劉弗陵을 太子로 삼아 霍光 등에게 輔政하도록 遺詔를 내렸다. 廟號는 世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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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兩越:東越과 南越을 가리킨다. 東越은 閩越이라고도 하며, 秦漢時代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거주하였다. 『史記』 卷114 「東越列傳」에 따르면, 閩越王은 春秋時代 越王 句踐의 후예라고 한다. 秦始皇이 閩越을 정복하고 閩中郡으로 만들었는데, 漢初 無諸가 王이 되어 東冶(현재 福建省 福州市)에 도읍을 정하였다. 惠帝시기 東海王에 봉해지고 東甌(현재 浙江省 동남쪽 甌江의 永嘉縣 일대)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때문에 東甌王으로도 불렸다. 前漢 武帝는 元鼎 6년(전111)에 樓船將軍 楊僕 등을 보내 閩越을 정복하였고, 백성들을 江淮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南越은 秦末 趙佗가 세운 나라이며, 南海郡·桂林郡·象郡 등을 지배하였다. 현재의 湖南省 남부와 廣東省·廣西省 전부, 베트남 북부를 지배하였다. 趙佗는 南越의 武帝를 자칭하였다. 베트남의 최초의 王朝로 간주되는 南越은 漢武帝가 보낸 군대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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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朝鮮:遼河 유역과 韓半島 서북지방을 지배했던 나라이며 李氏朝鮮과 구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부른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 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전 7세기 초이다.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王이라 칭할 때, 朝鮮은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王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朝鮮은 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내로 쳐들어와 遼東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 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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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貳師:大宛國의 貳師城을 지칭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수트리쉬나(Sutrishna) 혹은 우스루쉬나(Usrushna)라고 부른다. 『隋書』에서는 “蘇對沙那”, 『新唐書』에서는 “堵利瑟那” 혹은 “東曹”·“率都沙那”·“蘇對沙那” 등으로 표기하였다. 唐代에는 또 來威國이라고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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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大宛:고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파미르고원 서쪽 기슭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페르가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으로는 康居, 서남으로는 大月氏·大夏, 동북으로는 烏孫과 접해 있었다. 貴山이 都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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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邛:四川省 남부에 있었던 이민족, 혹은 그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前漢 武帝시기 漢나라 군대에 점령된 후 그들의 나라에 邛都라는 縣이 설치되었다. 邛都는 현재의 四川省 서쪽 雅礱江과 金沙江 사이에 위치한 昌縣 일대에 해당한다. 후에 越嶲郡의 治所가 되었다. 中華書局本標點校勘本에서는 ‘邛莋’을 하나의 이민족 혹은 국가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邛과 莋이 별도의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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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莋:四川省 서남부에 위치한 이민족, 혹은 이들이 세운 나라를 지칭한다. 前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 莋都夷의 땅에 莋都縣을 설치하였고, 沈黎郡의 治所가 되었다. 治所는 현재의 四川省 漢源縣 동북쪽이다. 天漢 4년(전97)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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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夜郞:현재의 貴州省 일대에 있던 이민족, 혹은 이들의 세운 나라이다. 先秦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戰國時代에는 西南夷의 大國이 되었다. 정치의 중심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貴州의 서쪽, 북쪽, 남쪽의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영토는 현재의 貴州省 대부분과 雲南省 동북부, 四川省 남부, 廣西省 서북부에 해당하였다. 漢初 南越·巴蜀과 무역관계를 맺었다. 武帝 建元 6년(전135)에 唐蒙이 夜郞의 땅에 이르러 利를 미끼로 郡縣을 설치하기로 약속하여 드디어 漢 犍爲郡의 屬縣이 되었다. 元鼎 6년(전111)에 夜郞의 땅에 牂柯郡이 설치되어 200여 년간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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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荒服:五服 가운데 가장 변두리에 있는 구역을 지칭한다.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서 비유적으로 化外의 蠻夷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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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諸夏:古代 문헌에서 中國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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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衛靑(?~전106):前漢시대 河東郡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仲卿이다. 본래 平陽公主의 家奴였으나, 누이가 武帝의 皇后가 된 뒤 중용되어 벼슬이 大將軍에 이르고 長平侯에 봉해졌다. 元朔 2년(전127)에 匈奴 白羊王과 樓煩王을 大破하고 河套(현재의 內蒙古自治區의 오르도스 지역)를 정복하고 朔方郡과 五原郡을 설치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匈奴의 주력을 격파하는 등 전후 7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漢의 북방을 안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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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霍去病(?~전117):전한시대 河東郡 平陽縣(현재 山西省 臨汾縣 서남) 사람이며, 武帝 衛皇后의 조카이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고 驃姚校尉가 되어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수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元狩 2년(전121)에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에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 休屠王의 祭天金人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 다시 北地郡에서 출발하여 居延을 지나 공격하니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代郡을 출발하여 漠北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공이 높아 大司馬에 加해졌으며, 秩祿은 大將軍 衛靑보다 많았다. 武帝의 총애를 얻었다. 諡號는 景桓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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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單于:음은 선우이고 匈奴 君主의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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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呼廚泉(재위 195~216):南匈奴의 제21대 마지막 單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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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烏丸:‘烏桓’으로도 쓴다.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동부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지파이다. 동호는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 상태에 이른다. 이때 살아남은 동호의 일부 部衆이 烏丸山(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가는데, 手工業과 粗放農業도 함께 영위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貢物로 匈奴에게 바쳤다. 만약 공납 기일을 넘기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을 때에는 오환인의 처와 자식들이 몰수되어 흉노의 노비로 되었다. 전한 武帝는 전119년에 霍去病에게 흉노의 동부 지구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昭烏達盟 일대에 거주하던 烏桓의 일단이 이 때 降附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전한의 上谷郡과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郡의 塞外로 徙民되었다. 이들은 후한 초(49)에는 그 塞內로 들어가서 上谷郡,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屬國, 廣陽郡, 代郡, 雁門郡, 太原郡, 朔方郡 등에 분포하였다. 전한 武帝의 치세에 처음으로 이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그러나 후한 光武帝 建武 25년(49)에 다시 上谷郡 寧城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賞賜, 質子 그리고 互市 등의 업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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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鮮卑:烏丸과 함께 東胡의 한 支派이다. 전 3세기 초에 東胡가 匈奴 冒頓單于에게 격파되어 해체됨에 따라 鮮卑와 烏桓은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前漢 武帝가 군대를 파견하여 匈奴의 東部를 격파함에 따라 鮮卑의 일부는 遼河의 서쪽 지류의 하나인 西剌木倫(Siramuren) 강 유역의 烏桓의 옛 遊地로 南下하였다. 89년에 北匈奴가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後漢을 비롯하여 사방의 여러 세력의 攻勢를 견디지 못하여 서방으로 이동한 후에 鮮卑는 점차 北匈奴의 故地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鮮卑는 그곳에 남아 있던 北匈奴 10餘萬 落(戶)을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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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袁紹(?~202):後漢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아들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初平 5년(188)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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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당시 袁紹는 冀州·幷州·幽州·靑州 4州를 지배하였는데, 그 영역은 현재의 河北省·山西省·遼寧省·北京市·天津市 전부와 山東省 북부와 동부, 河南省 북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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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三郡烏丸:『資治通鑑』의 胡三省注에 따르면 三郡烏丸은 大人 蹋頓이 이끄는 遼西烏丸과 蘇僕延이 이끄는 遼東烏丸, 烏延이 이끄는 右北平烏丸을 지칭한다(『資治通鑑』 卷64 「漢紀」 〈獻帝建安10年條〉:2061에는 “故安趙犢·霍奴等殺幽州刺史及涿郡太守, 三郡烏桓攻鮮于輔於獷平.”이라는 기록에 “三郡烏桓, 遼西蹋頓·遼東蘇僕延·右北平烏延也.”라는 胡三省의 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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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袁尙(?~207):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曹操에게 패한 袁譚에게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도리어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郡烏丸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조조에게 수급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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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袁熙(?~207):袁紹의 둘째 아들이다. 후에 幽州刺史가 되었다. 袁尙이 冀州를 빼앗긴 후 蹋頓에게 도망갔다가 후에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했으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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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冒顿(?~전174년;재위 전209~전174):흉노의 두번 째 單于이다. 冒頓의 의미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로 영웅을 지칭하는 바가투르(baghatur) 혹은 몽골어의 神聖을 지칭하는 보구드(boghud)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전209년에 아버지인 匈奴의 초대 頭曼單于를 살해하고 스스로 單于가 되었다. 이후 내정을 정비한 다음 東胡와 月氏 등 주변 부족을 격파하고 오르도스의 樓煩과 白羊 등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秦나라가 확보했던 河南 지역을 다시 차지하는 등 세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나아가 북방의 예니세이강 상류의 丁零과 서북방의 堅昆 등도 복속시켰다. 이를 통해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漢나라와 싸워 이긴 이후에 화친을 통해 더욱 세력을 확대하는 등 匈奴帝國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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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원문은 “亡命”인데, 중국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호적에서 이탈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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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太祖:魏王 曹操를 가리킨다. 曹操(155~220)는 沛國 譙縣 사람이다. 字는 孟德이며, 太尉 曹嵩의 아들이다. 孝廉에 천거되어 洛陽北部尉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後漢末 군웅할거를 평정하여 華北을 통일하였다. 丞相을 거쳐 魏公, 魏王이 되었으나 찬탈하지 않았다. 저서에는 『孫子略解』·『兵法接要』가 있고, 그의 詩歌를 모아 편찬한 『魏武帝集』이 있었으나 散佚되고 후세 사람이 『曹操集』을 輯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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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大人:鮮卑와 烏丸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한 부족의 우두머리나 부족연합체 전체의 우두머리 모두 大人이라 불렀다 (金浩東, 1993: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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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雲中郡:전국시대의 趙 武靈王(재위 전325~전298)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치소는 雲中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동북쪽)이었다. 王莽이 受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雲中郡으로 바뀌었나 幷州(치소는 晉陽縣이며 지금의 山西省 太原市 서남부의 古城營)의 屬郡이었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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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五原郡:朔方郡과 함께 전한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匈奴를 격파하고 오르도스(Ordos, 河套)지방을 전한이 차지하면서 그곳에 郡縣으로 설치되었다. 五原郡은 본래 秦의 九原郡 지역이었는데, 전210년에 秦始皇이 죽은 후, 진이 멸망하면서 匈奴가 점령했던 곳이다. 치소는 九原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서북쪽)이었다. 王莽이 獲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五原郡으로 복원하였다. 후한 초기에 南匈奴의 䤈落尸逐鞮單于(呼韓邪單于, 재위 48~56) 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였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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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遼水:현재의 遼河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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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幽州:前漢 13 刺史部의 하나였으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後漢時代 감찰구역에서 지방의 최고행정구역으로 바뀐 후 薊縣(현재 北京城 서남쪽 모퉁이)에 治所를 두었다. 後漢時代의 관할구역은 서쪽으로 오늘날 山西省 陽高縣, 남쪽은 대략 戰國 燕의 남쪽 경계, 북쪽은 현재 河北省 承德市와 遼寧省 建昌縣 이북, 동쪽으로는 遼寧省 寬甸縣과 撫順市 以東 지역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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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幷州:前漢 武帝 시기에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太原·上黨·雲中·定襄·雁門·代郡 등 6郡을 관할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대부분과 河北省 및 內蒙古의 일부에 해당하였다. 後漢時代 治所를 晉陽縣(隋代 太原縣으로 개칭, 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 古城營)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西河·五原·朔方·上郡을 더 거느리게 되었고, 代郡은 거의 관계하지 않았다. 이 당시 관할구역은 山西省 대부분과 陝西省 북부, 內蒙古 自治區 狼山·陰山 이남 지역에 해당하였다. 後漢末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建安 18년(213)에 冀州에 합병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관할구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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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田豫:三國時代 漁陽郡 雍奴縣(현재 天津市 武淸縣 동북) 사람이며, 字는 國讓이다. 後漢末 公孫瓚의 부하가 되었다. 公孫瓚이 패한 후 曹操에 항복하여 丞相軍謀掾에 임명되었다. 후에 弋陽太守로 전임하였다. 曹彰을 도와 代郡을 공격하여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南陽太守로 임명되었다. 曹魏 文帝시기 使持節 護烏丸校尉가 되어 鮮卑 軻比能部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太和 6년(232)에 汝南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靑州의 군대를 이끌고 해로로 遼東郡의 公孫淵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成山(현재 山東省 榮成市)에서 吳나라가 遼東에 파견한 사자를 죽였다. 正始初에 使持節 護匈奴中郞將 幷州刺史가 되어 州의 경계를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衛尉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와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82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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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馬城縣:代郡의 屬縣이다. 前漢時代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현재 河北省 懷安縣 서쪽이다. 代郡 東部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末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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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曹魏 文帝 초기에 田豫가 鮮卑를 공격했다가 포위된 사건을 가리킨다(『三國志·魏書』 권26 「田豫傳」: 727, “豫乃進軍, 去虜十餘里結屯營, 多聚牛馬糞然之, 從他道引去. 胡見烟火不絕, 以為尚在, 去, 行數十里乃知之. 追豫到馬城, 圍之十重, 豫密嚴, 使司馬建旌旗, 鳴鼓吹, 將步騎從南門出, 胡人皆屬目往赴之. 豫將精銳自北門出, 鼓譟而起, 兩頭俱發, 出虜不意, 虜衆散亂, 皆棄弓馬步走, 追討二十餘里, 僵尸蔽地.”). 본문 「鮮卑傳」에는 이 사건을 太和 2년(228)에 발생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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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畢軌(?~249):三國時代 東平縣(현재 山東省 東平縣 동쪽) 사람이며, 字는 昭先이다. 젊어서 명성이 있었으며, 三國 魏 黃初末에 출사하여 長吏가 되었다. 明帝시기에는 黃門侍郞이 되었고, 아들은 公主와 결혼하였다. 후에 幷州刺史로 승진하였다. 靑龍元年(233)에 군대를 이끌고 鮮卑의 軻比能을 습격하여 樓煩(현재 山西省 寧武縣)에서 패하였다. 또 浮華를 이유로 免官되었다. 正始년간에 中護軍, 侍中尙書, 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丁謐 등과 함께 曹爽에게 司馬懿를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正始 10년(249)에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曹爽을 살해할 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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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8)
    陘北:雁門 以北을 지칭한다. 陘은 陘嶺, 즉 句注山(雁門山이라고도 함)을 지칭한다. 현재 山西省 代縣 북쪽에 있었다. 역대로 북방을 방어하는 중요한 屛障이었다. 雁門 이남을 陘南, 雁門 이북을 陘北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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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9)
    東胡:고대 종족 혹은 나라의 명칭이다. 이들은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렸다. 東胡 사람들은 長城 동북의 광활한 지역에 거주하였고 목축업에 주로 종사하였다. 春秋戰國時代에 남쪽으로 燕과 접했다. 후에 燕에 패배해 북쪽의 遼水 상류지역으로 이주했다. 東胡는 秦나라 말기에 다시 강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배하여 그 대부분이 匈奴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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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0)
    『三國志』의 注는 『史記』·『漢書』·『後漢書』의 音註와는 달리 『三國志』 원문에 없는 원사료를 제시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三國志』의 裴松之注는 字句 해석 등 訓詁的인 설명 위주의 기존 주석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佚書들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裴松之注가 인용한 자료는 모두 수미완결되고, 자료의 출처가 분명하다(高國抗, 1998:259~260). 그러므로 해제에서 밝혔듯이 이 배송지의 주도 역주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이를 “[배송지주]”로 표기하여 陳壽의 『三國志』 원문과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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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무제(孝武帝), 효무제,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헌제(獻帝), 호주천(呼廚泉), 원소(袁紹), [원]상(袁尙), [원]희(袁熙), 답돈(蹋頓), 답돈, 묵특 [선우](冒頓單于), 답돈, 태조(太祖), 태조, 태조, 가비능(軻比能), 전예(田豫), 필궤(畢軌), 명제(明帝), 왕웅(王雄), 가비능, 배송지
지명
진(秦)나라, 한(漢)나라, 조선(朝鮮), 이사(貳師), 대완(大宛), 공(邛), 작(苲), 야랑(夜郞), 후한, 한나라, 전한(前漢), 한나라, 하북(河北), 운중[군](雲中郡), 오원[군](五原郡), 요수(遼水), 유[주](幽州), 병[주](幷州), 마성[현](馬城縣), 형북(陘北), , 후한,
서명
서[경](書經), 시[경](詩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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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흉노, 선비, 오환의 관계를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10_0010